알라딘서재

새파랑 서재
  • 내 여자의 열매
  • 한강
  • 12,600원 (10%700)
  • 2018-11-09
  • : 35,930
N25033

˝눈물 따위로 버틸 생각은 처음부터 하지 마˝


이 책을 사놓은 건 몇년전이다. 그때는 아직 작가님이 노벨상을 수상하기 전이어서 우주점에 중고책이 많았다. 그래서 그때 영등포점이었던가? 작가님의 책을 중고로 몇개 업어 왔는데, 그동안 안읽고 있다가 아주 뒤늦게 읽었다. 뒤늦게 읽은 소감은... 너무 좋았다. 노벨상 후광효과가 아니더라도 완전 최고였다.


이렇게 슬픔으로만 꽉 채워진 작품이 가능한건가, 이렇게 감정의 높낮이가 없이 계속 높은 밀도의 우울로 글을 쓰는게 가능한건가. 내가 우울한걸 좋아하긴 하지만, 한강 작가님의 우울은 내가 소화하기에는 너무 깊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강 작가님의 작품은 계속 읽고 싶어진다.


이 책은 한강 작가님의 세 단편집 중 두번째로 엮은 단편집으로, 총 여덟편의 단편들이 수록되어 있는데, 어느 하나 빠지는 작품 없었다. 한편 한편 너무 무겁고 여운이 깊게 남아서 연속해서 읽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다 읽는데 오래 걸렸다. 다 좋았지만 그 중 몇가지 인상적인 단편들을 소개해 보자면,




1. 내 여자의 열매

이 작품의 표제작이다. 언제 부터인가 아내의 몸에서 피멍을 보게 된 나는, 처음에는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다가 계속해서 커지는 멍을 보고 아내에게 병원진료를 권유한다. 하지만 병원에서는 이상이 없다고 하고, 아내는 점점 식물처럼 말라간다. 그러면서 아내에 대한 예정도 점점 식어간다.

[아내의 몸에서 피멍을 처음 본 것은 늦은 오월의 일이었다. 관리실 옆 화단의 모란은 잘린 혀 같은 꽃이파리들을 뚝뚝 밸어대고, 노인정 어귀의 보도블록에는 분드러진 흰 라일락꽃들이 행인들의 구두 밑창에 엉기던 봄날이었다.] P.9


해외출장을 다녀온 어느 날 집이 엉망이 된걸 보게 된 나는, 베란다에 있는 아내가 초록빛을 띠는 나무가 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나는 다시 아내에게서 아름다움을 느끼게 된다. 그렇게 시간은 흐르고 아내의 몸에서 석류알과 같은 열매들이 쏟아져 나온다. 나는 그 열매를 다른 화분에 심는다. 가을이 가고 겨울이 오면서 아내의 몸도 시들어간다. 봄이 오면 아내는 다시 돋아날까?

[어머니, 낯선 사람들로 가득한 이 거리를 늙고 망가진 얼굴로 떠돌게 될 줄을 그때는 몰랐어요. 고향에서도 불행했고 고향 아닌 곳에서도 불행했다면 나는 어디로 가야 했을까요.] P.34


=> 처음 읽었을때 느낀 감정은 당혹이었다. 작가님은 무슨 메세지를 전달하고 싶었던 걸까? 소통의 부재? 낯선 도시에 대한 두려움? 고향, 자연으로의 회귀? 어디론가 떠나고 싶지만 갈 수 없는 아쉬움? 상당히 어려운 작품이었다. 그럼에도 상당히 강렬했다. 채식주의자랑 비슷한 느낌이었다. 여기 실린 다른 단편 중 가장 아름답고 슬픈 문장들이 가득했다.




2. 해질녘에 개들은 어떤 기분일까?

아이는 아빠와 엄마와 함께 푸드트럭에서 장사를 한다. 아빠의 우는 모습이 좋아서 결혼했다는 엄마는 어느날 집을 나간다. 아빠의 의처증에 지쳐서인지, 찢어진 가난에 지쳐서인지, 희망없는 현재의 삶이 지겨워서인지는 모르지만 엄마는 아이도 버리고 떠난다. 해질녁의 개들은 어떤 기분일까?

[해질녁에 개들은 어떤 기분일까. 해질녁에 아이는, 여관방 창 너머로 아스라이 사위는 바다를 향해 걸어가고 싶어진다. 흙펄을 핧는 파도의 거품이 흰빛인지 황금빛인지 가까이서 보고 싶어진다.] P.43


이후 아빠는 나를 데리고 엄마를 찾아 다닌다. 하지만 어디에서도 엄마를 찾을 수 없었다. 매일 술을 마시는 아빠와 함께 하루하루를 여관방에서 근근히 살아간다. 아빠에게는 더이상 희망이 없고, 아빠는 나와 함께 죽어버리려는 생각까지 한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에 아빠는 포기한다. 엄마에 대한 여전한 사랑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나에 대한 미안함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혼자남은 외로움 때문이었을까? 오히려 나는 아빠가 밉지 않고 안쓰럽다. 아빠의 슬픔을, 무서움을 이해하니까. 이제 더이상 해질녘 개들의 기분은 궁금하지 않다.

[바닷바람이 아이의 옷 속으로 파고든다. 오그라드는 가슴을 퍼려 애쓰며 아이는 계속해서 걸어간다. 무허가 주택들의 들쭉날쭉한 담벼락들이 흐린 시야 속에서 겹처진다. 해질녁의 개들이 어떤 기분일지 아이는 궁금하지 않다. 너무 아팠기 때문에, 오래 외로웠기 때문에, 아이에게는 이 순간 두려운 것이 없다.] P.99


=> 아이의 눈으로 바라본 아빠와 엄마의 이별 이야기. 엄마가 지겨워하는것도, 아빠가 무서워하는것도 다 이해가 되지만 그래도 함께 갈수는 없었던 걸까? 그들을 헤어지게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사람이 함께 간다는건 그만큼 어렵다. 서로 사랑한다 해도 말이다.




3. 아기 부처

나는 어느날 아기 부처의 꿈을 꾼다. 그 아기부처는 불상이 아니었다. 내 자신의 손으로 주물러서 만들어진 얼굴이 아기 부처의 얼굴이었다. 나는 아기부처의 얼굴을 주무르지만 내가 생각했던 인자한 얼굴은 만들어지지 않고, 빚으면 빚을수록 눈초리는 더 날카로워졌다. 그리고 잠에서 깨어났다. 아기 부처 꿈은 무엇이었을까?


주인공인 나에게는 남펀이 있다. 남편은 뉴스 아나운서였고 누구나 다 아는 유명인이었다. 그런 남편에게는 아무도 모르는 비밀이 있는데, 바로 얼굴과 목을 제외하고는 온 몸에 화상을 입어 큰 흉터가 있다는 것이다. 화려한 것을 싫어하는 평범한 나는 남편과 결혼할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남편이 아무에게도 밝히지 않은 상처를 나에게만 보여준 순간 그와의 결혼을 결심한다.

[나는 그의 흉터와 용기를 함께 받아들이기로 했다. 아니, 바로 그 흉터가 나에게 안겨준 충격 때문에, 평생 숨기고 싶었을 알몸을 보여줄 만큼 나를 신뢰해준 데 대한 고마움 떼문에 그를 받아들였다는 편이 옳을 것이다.] P.127


그런데, 견딜수 있을 줄 알았지만, 상처투성이의 남편의 육체는 내가 감당하기 힘든 것이었다. 연민에서 시작한 사랑이 결혼 후 고통으로 바뀌었다. 나의 이런 고통을 말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남편은 느꼈을 것이다. 내가 남편을 피한다는 사실을, 증오한다는 사실을. 남편은 결국 다른 여자를 만난다, 하지만 나는 그런 사실에 오히려 안도감을 얻는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믿기지 않는 일이었지만 나는 그의 흉터 때문에 그를 사랑한다고 생각했고, 이제 그 흉터 때문에 그를 혐오하고 있었다. 그의 흉터가 다만 한 겹 얇은 살갖일 뿐이라는 것을 나는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안다는 것이 내 마음의 얇은 한겹까지 벗겨내주지는 못했다. ] P.134


나는 두번째 아기 부처의 꿈운 꾼다. 이번에 나는 아기 부처의 얼굴 주변을 진흙으로 덮어버린다. 그러나 아기 부처의 얼굴은 더욱 선명하게 살아나서 나를 쳐다본다. 나의 몸이 진흙에 꼬꾸라진다. 이 꿈은 또 무엇을 의미하는걸까? 나는 결국 남편과 이혼할 결심을 한다. 둘 중 한 사람이 죽지 않는 한 영혼할 거라 믿었던 관계는 그렇게 망가져 버렸다. 육체의 한꺼풀도 극복하지 못하는 나의 나약함.

[삶이 얼마나 긴 것인지 몰랐던 죄, 몸이 시키는 대로 가지 않았던 죄, 분에 넘치는 정신을 꿈꿨던 죄, 분에 넘치는 사랑을 꿈꿨던 죄, 자신의 한계에 무지했던 죄, 그리고도 그를 증오했던 죄,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가학했던 죄.] P.135


어느날 남편이 술에 잔득 취해 들어온다. 그리고 그 여자와 헤어졌다고 말한다. 그 여자는 남편의 비밀을 알게 되었고, 그 여자는 나를 존경한다는 말을 남편에게 남기고 떠난다. 그는 아무도 자신을 사랑해주지 않는 자신의 처지에 대해 비관한다.

[나는 얼마나 어리석였나. 그 어리석음으로 서로를 망쳐면서도 그것을 몰랐나. 그것을 인내라고, 혹은 연민이라고 부르며 믿었으나, 과연 누구를 위한 인내였나.] P.159


그날 밤 나는 마지막으로 아기 부처의 꿈을 다시 꾼다. 그런데 그곳에는 아기 부처의 얼굴은 없었고, 아기부처를 이루던 모래알들은 부서져 내렸다. 잠에서 깬 나는 옆에 잠들어있는 남편을 본다. 남편의 흉터에 내 손을 뻗어서 어루만진다. 그리고 내 안에 있던 남편에 대한 증오가 이제 사라진것을 느낀다. 나는 남편의 유자차를 준비한다.


=> 이 단편집에서 제일 좋았던 작품이다. 연민이 사랑이 되었다가 증오가 될때까지 주인공은 남편과의 거리를 두고 방관했지만, 결국 깨닫는다. 문제는 남편의 흉터가 아니라, 남편의 육체가 아니라, 바로 나였다고, 내 마음이었다고. 아기 부처의 얼굴은 내 마음에 쌓여있던 증오였다.

증오를 극복하는 것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것도, 상대방을 구원하는 것도 결국 내 마음가짐이다. 극복하는게 쉽지는 않겠지만, 갈등은 영원할 수 없다. 긴 겨울을 이겨낸다면 봄은 반드시 올 것이다.




4. 붉은 꽃 속에서

주인공인 선이는 어린시절 가족과 함께 절에 가서 연등회를 본다. 그때 선이른 일곱살, 동생 윤이는 네살이었다. 그 연등회에서 선이와 윤이는 많은 인파속에서 엄마 일행을 놓치고, 나중에 엄마에게 혼난다. 그럼에도 선이는 윤이와 함께 바라본 붉은 연등과 사미니(예비승려)를 마음 깊은 곳에 새긴다.

[그때 그는 자신이 언젠가 일 년에 하루뿐인 초파일을 아쉬워했던 것을 기억했다. 하지만 일 년에 하루만 볼 수 있는 게 아니라면, 그만큼 아름답게 느껴질 수 있을까.] P.260


일년후 다시 연등회를 찾았지만 작년과 달라진게 있었다. 동생 윤이가 사고로 죽은 것이다. 이제 여덟살인 선이는 동생이 어디서 왔는지, 또 어디로 갔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매년 선이는 연등회에 가서 윤이를 추억한다. 그리고 현실에 허무함을 느낀 그녀는 여승이 된다. 이제 세상과의 인연을 끊고 깨달음과 평안을 얻기 위해 산으로 들어간다.

[신기한 것은, 순서 없이 떠오르는 그 기억들 속에서 어떤 감정이 솟아났을 때 그것을 잠자코 들여다보고 있자면, 그래서 그 감각과 생김새를 찬찬히 헤아리고 나면 어느 사이 그것이 사라져 있곤 한다는 것이었다. 사라지고 난 밝고 빈 마음속에서 그는 잠시 쉬었다. 다시 기억이나 감정이 솟으면 그것을 들여다보았고, 사라지고 나면 다시 쉬었다. 선방에서 나와 잠시 경내를 걸을 때면 보이고 들리는 것들이 폭우에 씻긴 듯 또렷해져 있곤 했다.] P.284


속세에서 동생 윤이를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가정과 학교에서 사랑받았지 못한 아픔을 가진 선이는, 이제 승려가 되어 깨닫는다. 모든 감정에는 육체가 있다고, 눈으로 보이는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겠다고.

[불빛은 제가 불빛인 줄을 알았을까. 붉은 꽃 속에 제가 밝혀져 있었던 것을 알았을까.] P.287


=> 이 단편집에서 가장 쓸쓸한 작품이었다. 누군가를 잃은 슬픔을 종교적으로 승화한 작품인데, 불교에 대한 전문용어를 모르더라도 그 슬픔과 체념이 잘 전달되었다. 그날 윤이와 함께 바라본 붉은 꽃속에는 무엇이 들어있었을까? 무언가가 아름답다고 느끼는 건 그 속에 추억이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이 외에도 다 한결같이 여운이 깊게 남는 작품들이었다. 앞으로 한달에 한권씩만 한강작가님의 작품을 읽어야 겠다. 두권씩 읽으면 정상적인 생활이 안될거 같다... 하지만...아직 안읽은 한강 작가님 책이 많아서 행복하다.


  • 댓글쓰기
  • 좋아요
  • 공유하기
  • 찜하기
로그인 l PC버전 l 전체 메뉴 l 나의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