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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서재
  • 삶의 한가운데
  • 루이제 린저
  • 11,700원 (10%650)
  • 1999-06-25
  • : 11,198
N25006


˝당신은 사는 게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을 나만큼 잘 알고 있어요. 우리는 생의 의미를 알려고 했어요. 그래서는 안 되는 거죠. 만약 의미를 묻게 되면 그 의미는 결코 체험할 수 없게 돼요. 의미에 대해 묻지 않는 자만이 그 의미가 뭔지 알아요.˝



다 읽고 나서 이 책의 제목에 대해 생각했었다. 왜 책 제목이 <삶의 한가운데> 일까?


전후 독일의 가장 뛰어난 작가로 평가받는 ‘루이제 린저‘의 작품이자 세계 젊은이들에게 ‘니나‘신드롬을 일으킨 작품이라는 <삶의 한가운데>는 두명의 주인공이 등장 한다. 의사 ‘슈타인‘과 그보다 20살 어린 여성 ‘니나‘.


의사 ‘슈타인‘은 ‘니가‘가 19살일때 자신의 진료실에서 환자로 온 그녀를 처음 알게된다. 한눈에 반한다. 그리고 무려 18년동안 그녀를 사랑한다. 하지만 그녀는 그를 좋아했을지도 모르지만, 연민했을지도 모르지만 그의 사랑을 받아주지 않는다. 오직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감정이 이끄는대로 삶을 살아간다.

[나는 자유롭게 있어야 한다는 것 외에는 분명히 알고 있는 것이 없습니다. 나는 내 속에 수백 개의 가능성이 있는 것을 느껴요. 모든 것은, 나에게 아직 미정이고 시작에 불구합니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자신을 어떤 것에다 고정시킬 수 있겠습니까. 나는 정말 내가 누구인지 모릅니다. 당신에겐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나는 정말로 나를 모릅니다.] P.127



그런 ‘니나‘는 삶의 한가운데를 살아가고, 의사 ‘슈타인‘은 삶의 가장자리에서 그녀를 바라보기만 한다. 그리고 그녀가 연락하거나 요청하면 다 들어준다. 바보처럼 달려간다. 두려움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렇게 니나와 절연한 채 사는 것이 견딜 수 없다. 나는그녀가 찾아올 때를 대비해서 집 밖으로 한 걸음도 나가지 않는다. 어리석은 짓이다. 니나는 오지 않을 것이다. 지금은 아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나는 끊임없이 그녀가 오기를, 혹은 그녀에 대한 소식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녀를 염려하는 나의 불안은 점점 커져간다.] P.185



‘니니‘가 얼마나 자유분방하냐고 하면, 그녀는 반나치즘 활동도 하고, 주위 동료들의 정치적 망명도 도우며, 수용소에 갇히기도 한다. 그뿐만 아니다. 그녀는 첫 남편이 있는 상태에서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했었고(나중에 이 아이의 아버지는 ‘슈타인‘의 절친으로 밝혀짐...), 아이를 임신한 상태에서 자살을 기도하기도 하며, 이후에도 여러번 결혼과 이혼을 반복한다. 첫번째 남편의 자살도 돕니다. 그녀의 가십은 한두가지가 아니다...


그럼에도 ‘슈타인‘은 ‘니나‘가 찾아오면 무조건 돕니다. 연락이 없을때는 그녀가 살았던 흔적을 찾아가기도 하고, 평생 독신으로 살아가면서 ‘니나‘를 기다린다. 기회가 없었던 것도 아니다. ‘니나‘ 역시 ‘슈타인‘에게 호감을 느낀 적이 있었고, 안정된 의사부인의 삶을 살까 하고 망설인 적도 있었다.


하지만 신념이 너무 확고한 ‘니나‘는 생의 의지가 강했기에 결코 안주하는 삶을 살 수 없었다. ‘슈타인‘에게 ‘니나‘는 손을 뻗어도 결코 잡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왜 그는 ‘니나‘에게 빠지게 된걸까? 왜 포기하지 못한 걸까? 아마 처음 본 순간부터 ‘슈타인‘에게 ‘니나‘는 자신의 삶 그 자체가 되버렸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는 니나를 사랑한다. 나는 절대 잃을 수 없는 새로운 순화된 방식으로 니나를 사랑한다. 나를 구원한 그 고통에 대해서 니나에게 감사한다. 지난밤의 눈물은 내 인생의 경직된 궁핍함을 씻겨 내려가게 했다. 남아 있는 것은 이 새로운 밝은 기분의 어두운 밑바닥인 체념의 슬품이다. 니나는 내가 가지려고 했고 되기를 원했던 모든 것에 대한 비유일지 모른다. 그렇게라도 항상 있어주면 좋겠다. 니나는 생 자체에 대한 비유이다.] P.277



이 책은 ‘슈타인‘이 ‘니나‘에게 보낸 편지와 ‘슈타인‘이 죽기 직전까지 ‘니나‘만을 위해 18년간 쓴 일기장과 ‘니나‘와 니나의 언니와의 짧은 대화로 이루어 져있다. 나는 이 책을 두번 읽었는데 한번은 ‘슈타인‘의 입장으로, 한번은 ‘니나‘의 입장으로 읽었다.


‘슈타인‘이 바보 같기도 했지만 왠지 그의 순애보가 낯설지 않았고, ‘니나‘가 ‘슈타인‘을 매몰차게 끊어 냈더라면 어땠을까란 생각을 하다가도, 그랬다면 ‘슈타인‘이 자살하지 않았을까란 생각도 들었다. ‘슈타인‘은 어떻게 해서라도 ‘니나‘와의 끈이 이어지길 바랬을거 같다.

[나는 여느 때처럼 어두운 쪽 강변에 남아 있었고 니나는 더 밝은 반대편에 있었다. 그 사이에는 다리가 없었다. 그러나 한 사람이 부르면 다른 사람은 알아들었다. 니나가 돌아가기 전 우리가 나눈 마지막 말들 뒤에 남은 측량할 길 없는 침묵의 시공에서 우리는 그 어느때보다도 서로 밀착해 있다고 느꼈다. 나는 말했다. 내가 어둡고 출구가 없어 보이는 낭하를 끝없이 가고 있을 때마다 나에게 문을 열어준 것은 당신이었다고. 당신은 왔으며 당신과 함께 양지바르고 확 트인 대지가 펼쳐져 있었소. 나는 비록 이 대지에 발을 들여놓지는 못했지만 그 대지를 본 것으로 나의 지난 암담함은 구제될 수 있었소.] P.368



너무나 삶을 사랑해서 언제든지 사랑도 버릴수 있었던 ‘니나‘는 너무 자유분방하고 충동적이며 신념이 완고하여 가까이 하면 인생 꼬이기 딱 좋은 사람인것 같으면서도, 동시에 옆에 있다면 감정적으로 끌릴 수 밖에 없는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슈덜린‘은 바보같지만 연민이 느껴지는 사람,
‘니나‘는 이기적이지만 결코 미워할수 없는 사람 .


어차피 삶은 자기가 선택하는 거니까 누구의 탓도 할 수 없고, 제3자가 맞다 틀리다 평가할 필요도 없다. 삶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삶을 사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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