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이승준님의 서재
  • 정적과 소음
  • 이수명
  • 16,200원 (10%900)
  • 2024-11-20
  • : 978

‘날짜 없는 일기’ 시리즈는 이수명 시인의 1년 동안 쓴 일기를 한 권에 묶은 산문집이다. 다만 보통의 일기 에세이와는 다른 독특한 점이 하나 있는데, 바로 날짜를 쓰지 않고 월별로만 장을 나눈 것이다. 뭐랄까, 구체적인 날짜를 알지 못한 채 책을 읽다보니, 그 달에 할 법한 생각들과 느낌들이 어렴풋한 일관성 혹은 통일성 등을 가지고 모여있는 느낌이 들어 꽤나 새롭게 느껴졌다.

그리고 이 책은 ‘일기’라는 장르의 말마따나 가볍고 조용한 호흡으로 쓰인 글의 묶음이었지만, 그런 일상적인 순간조차 시인의 시선으로 포착되어 상당히 색다르고 신선한 내용을 품고 있었다. ‘와 이걸 이렇게 바라본다고?’ 혹은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지?’ 등 시인만의 눈길과 사유가 무척이나 독특했고, 신기했고, 그래서 흥미로웠다.

감정은 들여다보거나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피하는 것인가보다. 비켜서는 것이다. 공간이 이것을 가능하게 해준다. 장소를 바꾸면 방금 전의 장소에서 가졌던 감정도 바뀐다. 감정은 내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머문 공간 안에 담겨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왜 그동안 감정이 내면에 있다고 생각했을까. 내가 감정을 들고 다닌다고 생각했을까. (「1월」, 27p)

생활이 고요를 깨뜨리는 순간을 따르면서 한없는 침묵 속에 빠져들지 않고 지낸 것일 테다. 생활은 생활을 보게 한다. 생활로 향하며 우리가 바로 소음이라는 것을 보게 한다. 그러니 고요는 생활이 갑자기 멈추는 상황일 것이다. 비가 오려고 흐려서라기보다는 생활이 문득 멈춰서 고요가 고인다. 나는 일어서서 수돗물을 튼다. 물이 쏟아지는 소리를 듣는다. 생각난 듯이 세면대의 비누 얼룩을 지운다. 고요를 지운다. 생활이다. (「4월」, 72~73p)

작년에도 이렇게 더웠던가, 새삼스럽게 기억을 더듬는다. 해마다 더 더워지는 것 같다. 태양이 인간을 옭아맨다. 더이상 돌아갈 곳이 없는 사람들을 몰아붙인다. 오늘도 집안에서 숨어지낸다. 왜 태양이 단번에 뭉쳐졌을까 생각하면서. (「8월」, 145p)

물론 『정적과 소음』에는 단순히 일상에 대한 사유만 있는 것이 아니다. 시인으로서 ‘문학’을 대하는 마음과 태도, 이수명 시인만의 생각과 통찰 등이 담겨 있다. 내가 문인의 산문을 좋아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이다. 문학을 좋아하는 나는, 그런 문학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너무나도 진심으로 문학을 사랑하고 갈망하는 작가들의 태도를 감히 엿볼 수 있는 이런 책들이 있어 항상 감사함을 느낀다. 『고요한 읽기』(이승우), 『소설 만세』(정용준),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신형철)에 이어 이 책을 내 마음 속 목록 한 곳에 올리련다.

문학작품에서 아우라를 지니고 감동을 주는 인물은 싸우는 주체다. (…) 이 주체는 자신과 싸우고 운명과 싸우고 세계와 싸운다. (…) 싸움의 결과는 중요하지 않다. 패배도 귀하게 처리된다. 오히려 패했을 때 싸움이 빛난다. 패배하면 싸움이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2월」, 39p)

고전이란 아마도 현대성을 선취한 작품을 일컬을 것이다. 현대가 들어 있지 않으면 고전이 될 수 없다. 작품이 낡으면 사라지는 까닭이다. 결국 낡지 않아야 고전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현대의 작품에는 그야말로 고전이 녹아 있다. 제대로 잘 녹아 있을수록 좋은 작품이다. 고전에서 더 나아가야 비로소 현대시가 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것 역시 사라지게 마련이다. (「3월」, 51p)

이미지가 시의 시동이다. 한 줄, 늦어도 두어 줄을 쓰면 이미지가 나타난다. 이미지가 나타나야 진행이 되고 진전도 이루어진다. 그리고 문장들이 계속 이어지면서 가능성으로 남아 있는 이미지와 좀더 선명하게 드러나는 이미지로 나뉘어진다. 시는 이미지가 선명해지는 방향으로 움직인다. 선명해야 움직일 수 있다. (「9월」, 180p)

젊은 시는 대개 무엇인가 맞닥뜨린다. 그리고 그 맞닥뜨린 것을 크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다. 직면의 힘이다. 시 세계가 정면일 수밖에 없다. 만약 맞닥뜨리지 못했을 때는 눈앞에 무엇을 세우기도 한다. 잘 세워지지 않더라도 시도를 한다. 그러한 동력들이 흥미를 끈다. (「10월」, 192p)



  • 댓글쓰기
  • 좋아요
  • 공유하기
  • 찜하기
로그인 l PC버전 l 전체 메뉴 l 나의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