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삭이는 모임’을 만들어 시끄러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시내’와 그런 그녀에게 모임 입회를 제안받는 ‘모아’,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치고 다니는 ‘수자’, 시내의 윗집에 살며 층간소음 항의를 받고 이에 억울해하는 ‘두리’. 소설에는 이렇게 독특하다못해 튀는(?) 네 명의 여성 인물이 등장한다. 그리고 이들이 ‘속삭이는 모임’에서 활동하며 벌어지는 내용이 이 소설의 주된 내용이다.
이 인물들을 통해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간단하고 명쾌하다. 바로 ‘세상은 쉽게 살아가기 힘들어졌다’는 문제의식을 던지는 것이다. 시내는 세상이 너무 시끄러워 살기 힘드니 ‘속삭이는 모임’을 만들었고, 수자는 살아가면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들은 ‘예수’를 통해 극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치, 쉽게 살아지면 그건 세상이 아니지… 하며 <소란한 속삭임>의 주제에 나 또한 충분히 공감하였다.
그러나 그게 끝이었다. 다시 말해, 이 소설은 문제의식을 던지는 것에서 더 나아가지 않는다. ‘세상은 살아가기 힘들어.’라는 질문에서 ‘ㅇㅋ 인정, 그러면 어떻게 해야하는데?’라고 답질문을 던졌을 때, <소란한 속삭임>에서 그 답을 찾을 수는 없었다. (물론 답이 있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내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문학이라면 응당 문제의식을 가지고, 이를 가감없이 드러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을 왜 보여주는지, 독자 입장에서 ‘왜’ 마주해야 하는지 등에 대해서도 담론을 이끌어나갈 필요 또한 충분히 있다. 이번에 읽은 예소연 작가의 <소란한 속삭임>에서는 그런 부분이 다소 아쉬운 감상으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