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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님의 서재
  • 가나
  • 정용준
  • 12,600원 (10%700)
  • 2011-11-18
  • : 1,335

『내가 말하고 있잖아』, 『선릉산책』, 『소설 만세』 등 정용준의 저작들을 읽을 때면 언제나 '조심스러워하는 태도를 지닌 섬세함'이 느껴지곤 한다. 그의 소설에는 ‘아픔’을 소재로 하는 것이 많고, 누군가의 아픔을 대하는 자세는 필히 조심스러워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초기 소설집 『가나』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풍긴다. 소설 속 주인공이 고통을 느끼고 역경을 겪는 모습을 훨씬 더 직접적이고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총 아홉 편의 단편이 수록되어있고, 그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두 편의 소설을 소개해본다.


「떠떠떠, 떠」

얼마 전에 너무 감명 깊게 읽은 산문집 『밑줄과 생각』에도 언급되는 단편이자, 『내가 말하고 있잖아』의 전신(前身)이라 할 수 있는 소설이다. 작가님께서 실어증을 앓으신 경험이 소설 속 주인공에게 그대로 녹아들었다. 하여 말을 하고 싶지만 말이 나오지 않는 그 느낌, 그리고 말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의식 무의식적으로 가하는 폭력을 당할 수밖에 없는 그 마음이 너무나 구체적이고도 적확하게 드러나 있다. 바로 이 부분이 이 소설의 백미이자 가장 아픈 지점일 것이다.


그럴 수 있다. 하지만 그런 것과 상관없이 아직도 그녀가 어딘가에서 멀쩡히 숨 쉬며 건강하게 늙어가고 있을 생각만 하면 몸에 열이 오르고 어금니가 꽉 조여진다. 열한 살을 27일, 단 하루만 남기고 까맣게 만들어버린 그 선생을 용서할 수 없다. (13p)


내가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은 성격이 급한 것도, 말이 꼬여서도 아니야. 자신감이 없기 때문도 아니고 어휘력이 떨어져 단어 선택을 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지. 내게 말은 붕괴된 조직이고 소멸된 유적이며 퇴화된 신경과도 같아. 혀끝에 달라붙어 절대로 떨어지지 않는 말은 이끼와도 같고 증발하고 흔적만 남은 얼룩과도 같지. (20p)


이런 주인공에게도 비슷한 아픔을 겪고 있는 동지(?)가 한 명 있다. 학창시절 동급생인 그녀는 간질(로 추정되는 질병의) 환자이다. 이 소설은 결말에 대해, 주인공들의 관계를 두고 의견이 분분하게 나뉜다. 두 인물 모두 자신들의 장애 및 질병에 억눌려 침잠해버리는 결말인지, 그럼에도 두 인물이 서로를 이해하고 구원해주는 결말인지 말이다. 『밑줄과 생각』에 이에 대한 작가님의 생각이 담겨있으니, 궁금하다면 꼭 읽어보길 바란다.



「벽」

「벽」은 굴도의 한 염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곳에서 채취하는 ‘소금’은 인간에게 반드시 필요한 너무도 중요한 물질이지만, 이를 채취하기까지의 과정은 그 중요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소설 속 노동자들은 이름은커녕 오로지 ‘숫자’로 불리며 강제로 낙인을 찍히고 끝없는 노동에 시달린다. 이곳은 인간의 존엄을 무시하고 오로지 폭력과 죽음만으로 노동자들을 다룬다. 즉, 이곳에서 얻는 소금은 ‘사람’을 살리지만 ‘일꾼’을 죽인다.

소설은 ‘21’이라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어쩌다 이 지옥같은 염전에 사람들이 오게 되었는지 그리고 이곳에서 어떤 참혹한 일들을 견뎌야 하는지를, 과거와 현재의 장면들을 교차하여 제시한다. 그리고 독자들은 그 과정을 차근차근 밟아가며 숨통을 조여오는 듯한 긴장감을 느끼게 된다. 또한 소설은 노동자들만 등장시키지 않고, 이들을 관리하고 감독하는 ‘반장’ 계급을 만들어 노동자와 대비되도록 설정했다. 여기서 주목해야하는 것은, 바로 반장 계급의 인물들 또한 실은 ‘노동자’ 출신이었다는 점인데… 더이상 자세한 설명은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므로 꼭 소설 전체를 읽어보길 바란다.

게다가, 놀랍게도 이 소설집이 출간된 몇 년 후 ‘신안군 염전 섬노예사건’이 수면 위로 떠오르면서 「벽」은 다시 한번 주목을 받았다. 마치 ‘성지 순례’ 느낌으로 말이다. 여러모로 소설 속의 폭력적인 설정과 세계관이 정말 ‘찐’현실이었다는 점에 기함을 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런 점에 있어서 꼭 이 소설을 많은 사람들이 읽어보았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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