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선작인 '핀 캐리'는 신춘문예 당선작이라는 기대에 비해서는 좀 평이한 느낌이었다. 보통은 오빠의 학비를 대기 위해 집안의 여자형제가 희생하기 마련인데, 그 성별이 뒤바뀌어 있었을 뿐 신선한 느낌은 없었다. 오빠의 인생을 이해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결국 도박꾼이지 않았나 라는 생각도 들고.
여유라는 건 무리를 한다고 만들어지는 게 아니었다. 처음부터 그것을 당연히 가지고 있었던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넉넉함이 여유였다.
우리가 이웃하던 시간이 지나고 / 100p
이 책을 읽으면서 밑줄 긋고 싶은 문장이 3개가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저 문장이었다. 나는 늘 저런 치사함에 공감을 한다. 부러운 걸 부럽다고 말하지 못하는 치사함에 대해 말하는 문장같은 것. '우리가 이웃하던 시간이 지나고'의 화자는 나랑 참 많이 겹쳐 보였다. 괜히 심술부리고 사람을 밀어내면서도 그 사람에 대한 생각은 놓지 못하는. 고향을 떠나온 사람들의 특징일까. 영주와 성희가 아직도 주공아파트에 살고 있었다면 둘의 관계는 달라져 있었을텐데. 하지만 어느 관계가 더 좋은 것이라고 확실히 말하진 못하겠다.
나 역시 하루하루 버텨내기에 급급했다. 그럼에도 버텨낼 자리 하나도 허락되지 않은 누군가에게는 이렇게 보잘것없는 나조차도 상처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 그저 답답할 따름이었다.
탬버린 / 152p
단편을 실은 소설집의 표제작이 가지는 의미는 상당하다고 생각한다. 보통은 그 단편들의 주제를 정통하고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탬버린'도 그랬다. 한 때 해방의 의미로 흔들었던 탬버린을, 대표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흔들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일은 이 현대사회에서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일이 되어버렸으니까. 이 단편집들은 고향을 떠나 타지로 온 화자들이 피할 수 없는 일들을 겪는 개인화된 이야기라는 점에서 이 표제작인 '탬버린'이 가지는 의미는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송은 문자메세지에 답을 했을까. 그랬으면 좋겠다. 이 답답한 현실 속에서 둘이 꼭 다시 만나서 해방의 의미인 탬버린을 신나게 흔들었으면 좋겠다.
'멀고도 가벼운'을 읽으면서는 매일 연락하며 시덥잖은 카톡을 남발하는 사이보다, 인스타그램에 올라오는 사진에 몰래 좋아요 하나를 눌러가며 그의 행복을 진심으로 바라는 사이가 어쩌면 더 건강한 관계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길고 유구한 역사가 이어져 온 것은 아니지만 단편적인 기억의 조각들에서 좋은 장면을 많이 차지하고 있는 사람. 비행기표를 끊어가며 찾아가게 되는 사이는 아니지만 솜 이불 한 채 정도는 택배로 보내줄 수 있는 사람. 고향을 떠나 타지에서 혼자 생활하는 사람들에게 어쩌면 가장 큰 위로가 되는 사람일 수도 있지 않을까.
'두고두고 후회'도 읽으면서 참 내 삶이 많이 겹쳤다. 삼남매에 장녀라는 그녀는, 우리 가족에게 대표 같은 것은 없다고 딱 잘라 말하면서도 대표역을 자처할 수 밖에 없다. K-장녀들은 너무 착하고, 책임감이 강하다. 내가 소설을 쓰게 된다면 나는 그녀를 친구들과 함께 눈 썰매장에 놀러가도록 놔둘 것이지만 장어값을 계산하게 놔두진 않을 것이다. 너무 그리워지거나, 후회되는 순간이 오는 것을 막을 수는 없겠지만, 그냥 저정도는 해주고 싶기 때문에.
누군가를 지키겠다고 함부로 선언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현재를 지키려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영국산 찻잔이 있는 집 / 290P
'영국산 찻잔이 있는 집'은 왜 화자를 '한'으로 설정한 것인지 모르겠다가도 '한'의 시점으로도 소냐와 피티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지 않은 것을 느끼며 알 것 같기도 했다. '넌' 짐작조차 할 수 없는 피티의 삶 속에서 자신이 꼭 필요한 존재라고 믿었던 한. 그러나 결국 피티가 챙겨서 떠난 것은 찻잔이었지 한이 아니었다. 피티가 사라지고 나서야 자신의 위치를 깨닫는 한을 보면서 '누군가를 지키겠다고 함부로 선언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현재를 지키려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에 대한 반박의 말이 생각났다. 자신의 현재를 지키려는 것이 곧 그 누군가의 현재를 간절히 바라는 것이라고. 그리고 그것은 아주 최소한으로 그사람에게 바라는 것일 수 있다고. 피티의 일탈을 응원한다. 피티는 소냐의 현재를 간절히 바라다 자신의 현재가 없어져 간다는 느낌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작고 예쁜 찻잔에 티가 마르지 않는 한 피티는 살아갈 존재니까 크게 걱정하지 않기로 했다. 끊임 없이 자신의 잔에 차를 따르며, 혹은 따라주는 사람을 만나며 그렇게 자신의 현재를 바라고 또 타인의 현재를 바라는 사람으로 그냥 그렇게 살아가기를.
모든 단편들은 드라마틱한 해피엔딩으로 끝나진 않는다. 그렇다고 드라마틱한 새드엔딩도 아니다. 그래서 그런가. 모든 결말에 작가의 응원이 들어가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모든 단편 끝에 이 문장이 달라붙어있는 것 같았다 "다들 그렇게 다음 순간을 살아 갑니다." 소설은 더 이어지진 않지만 우리는 그들이 저 단편 속에서 살아갈 것임을 알고, 그렇다면 조금이나마 더 나은 삶을 알았으면 좋겠는 마음이 절로 드는 느낌.
꼭 내 얘기 같은 소설은 왜 이렇게 슬픈지 모르겠다. 언젠가 미친듯이 행복한 기분으로 다 읽고 덮은 책이 꼭 내 얘기 같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