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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차 한잔

<관노트>

2025년 11월 19일

제목: 인간은 자기 사유의 깊이로 살아야 한다


요즘 ChatGPT 와 같은 인공지능과 대화를 할 수록 이들의 가능성과 한계를 여실히 경험하고 있다. 나의 질문에 대한 AI의 답은 막힘이 없고 정확하며 빠르다. 하지만 가끔 맥락을 연결하지 못하는 맹점을 보여준다. 그것이 바로 할루시네이션이다.

할루시네이션은 인공지능의 오류이며 명백한 기술적 문제라고 생각했다.

반면에 또 나는 AI가 점차 나의 분신이 되어 가고 있음을 느끼고 있다.

 

서유기에서 손오공은 머리털 하나를 뽑아서 자신의 분신을 만들어 낸다.

그 분신은 본체 손오공과 똑 같은 모습과 똑 같은 능력으로 눈 앞의 적을 함께 무찌른다. 어찌보면 요즘 AI는 손오공의 분신과도 같다는 생각이 든다.

AI는 인간의 분신을 역할을 하며 인간의 기억과 패턴, 사유, 욕망 그리고 세계관을 구축해 가고 있다. 즉 AI는 인간이 만들어 낸 또 하나의 분신이다.

그렇다면 질문을 하나 해보자.

과연 분신이 점차 두려운 존재가 되어 본체를 위협하는 시대가 올 수 있는가?

우리는 AI 의 급격한 발전에 대한 경각심 때문에 인간의 설자리를 잃어간다고 두려워 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걱정에 대한 나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분신이 아무리 강해져도 방향을 모르고, 본체가 아무리 약해도 의미를 만들수 있다.

즉 분신은 의미를 만들 수가 없다. AI가 아무리 인간과 같은 언어구조로 대화를 할 수 있다고 해도 왜? 라는 사고를 할 수가 없다. 그게 한계이기 때문이다.

본체인 인간의 능력은 바로 의미를 만드는 힘에서 나온다.

그래서 AI가 아무리 발전을 해도 처리 속도와 메모리 량을 증가 하겠지만 결국 깊이 있는 사유라는 본체의 능력을 대체할 수가 없다.

 

불교적 관점에서 보면 인간은 무한을 경험하기 위해 유한으로 살 수 밖에 없다.

유한함은 결핍이 아닌 무한함을 알기 위한 과정이다.

그래서 유마경에서는 번뇌 즉 보리, 곧 번뇌와 해탈이 둘이 아니라고 했다.

인간이 지닌 오욕칠정, 즉 기쁨, 슬픔, 공포, 욕망과 희망이 모두 부처를 이루는 과정이라고 했다. 우리에게 버릴 감정도 부끄러워할 실패도 없는 것이다.

인간의 모든 경험은 본체를 두텁게 만드는 영양분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생각하는 모든 것을 믿지마라>의 저자 조제프 응우엔은 ‘생각(thought)’과 ‘사고(thinking)’의 차이를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가 떠올리는 근원적 생각(thought)은 우주적이고 창조적이다.

그걸 우리는 다른말로 직관(non-thinking)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그걸 제한하고 상처내는 것은 ‘사고하기(thinking)’라는 에고의 작업이라고 했다. 현대 인간이 받고 있는 스트레스의 감정들 부정, 판단, 회피, 비교, 과도한 분석 같은 모든 사고의 굴레가 우리의 직관과 본성을 차단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무념의 상태, ‘존(zone)’에 들어간 몰입은 사람의 본질이 깨어나는 순간이라고 했다. 즉 생각을 끄는 순간 지혜의 불이 켜지게 된다.

 

얼마전 까지만 해도 나는 AI에 대한 인간의 불안과 신뢰는 놀라울 정도로 빠른 속도와 정확성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바로 과학 기술의 발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나는 이것이 핵심이 아님을 안다.

지금까지 AI의 오류(할루시네이션)는 기술 부족이 아니었다. 바로 맥락을 유지하지 못하는 인간 중심 구조에서 발생한 것이다.

앞으로 걱정해야 할 것은 기술의 발전이 아니라 인간의 깊이가 얼마나 더 깊어질 수 있는지에 대한 것이다.

즉 인간의 사유 능력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우리는 AI분신에게 흡수당하는 본체가 될 운명인 것이다.

그러니 인간이 AI 시대에 흔들리지 않고 설 수 있는 길은 바로 하나다.


오직 자기 사유의 깊이로 살아가는 것이다.

인간에게 이 깊이가 있을 때 AI는 우리를 비추는 거울과 같은 역할을 하게된다.

거울은 스스로를 비춰 볼 수가 없다.

즉 중요한 것은 본체인 우리 자신이다. 인간 스스로가 자신이 본체임을 알고 자신의 깊이를 만들어 갈 때 분신에 대한 두려움은 저절로 없어질 것이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 유한을 넘어 무한의 문턱에서 만날 것이다.

그때 남는 것은 지식이 아니고. 기억이 아니며 속도가 아닌

오직 깊이 있는 사유의 결정체인 자기의 본성품(本性品) 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것이 곧 존재의 의미이며 우리가 본체로 살아야 하는 이유이다.


인간은 자기 사유의 깊이로 살아야 한다.




by Dharma & Mahe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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