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0월 16일
제목: 유리알 유희/ 잡문의 시대를 향한 헤세의 외침
헤르만 헤세의 작품 <데미안>, <수레바퀴 아래에서> 그리고 <싯다르타> 를 읽으며 받은 감동은 정말 대단했다. 뒤늦게 읽었기에 오히려 그 깊이를 체감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만약 나의 20대에 이 책들을 접했다면 아마도 감동의 울림은 없었을 것이다. 독서는 결국 경험치와 함께 숙성되는 법이다. 그런 흐름 속에서 <유리알 유희> 는 내게 또 다른 충격이었다.
이 작품은 전작들과 달리 훨씬 난해하다. 서문부터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라이프니츠, 스콜라 철학, 바흐, 베네딕스 수도회, 여씨 춘추, 우파니샤드 등 수많은 이름과 학문이 등장한다.
읽다 보면 내가 난독증이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다. 그러나 이때 정신 차려야 한다. 사실 맥락을 잡고 보면 단순하다. 결국 《유리알 유희》는 ‘고도의 정신적 놀이’를 말한다. 음악과 수학, 철학과 언어학, 종교와 천문학까지 인류가 쌓아온 모든 지혜를 유리알이라는 상징에 담아 조합하는 유희 였다.
작품은 전설적 유희 명인 요제프 크네히트의 전기로 서술된다. 그는 카스탈리엔이라 불리는 수도원적 교육 공동체에서 성장한다. 최고의 영재들이 모여 순수 학문을 익히고 명상으로 완성하는 곳. 크네히트는 여기서 정신적 정점에 이르러 명인이 된다. 그러나 결말은 뜻밖이다. 그는 명인의 자리를 내려놓고 속세로 돌아가려 한다. 아무리 숭고한 정신의 세계도 무상하며, 진정한 깨달음은 중생 속에서 완성된다는 자각 때문이다.
이 지점은 선불교의 십우도(十牛圖)와 겹친다. 목동이 잃어버린 소를 찾는 심우에서 시작해, 발자국을 발견하고(견적), 소를 얻고(득우), 소를 기르고(목우), 소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며(기우귀가), 마침내 소와 나를 모두 잊는(인우구망) 경지를 거쳐 마지막엔 세상으로 돌아와 중생을 제도하는 ‘입전수수’에 이른다.
크네히트가 카스탈리엔을 떠나는 결단은 바로 이 ‘입전수수’의 경지와도 같다.
깨달음은 홀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현실과 함께해야 한다는 통찰이다.
나는 헤세가 전하고자 한 이러한 메시지를 변증법적 구조로 읽었다.
정(正): 잡문의 시대. 무책임하게 쏟아지는 단편적 지식과 강연, 언어의 가치 상실. 헤세는 이것을 정신적 침체라 불렀다.
“그날그날의 모든 사건에 대해서 급하게 성의 없이 쓴 글들이 홍수처럼 쏟아져 나왔고, 이 모든 정보를 끌어모아서 가려내고 기사화하는 일은 급속도로 무책임하게 대량 생산되는 상품과 완전히 같은 길을 밟고 있었다.” (1권 p.26)
“2곱하기 2가 무엇인지 권력자가 결정하도록 내버려 두는 자는 비겁자이며 배신자입니다. 진리에 대한 지조, 지적 성실성을 다른 이익을 위해 희생시키는 일은, 설혹 그것이 조국의 이익을 위한 일이라 해도 배신입니다.” (2권 p.61)
놀라운 건, 헤세가 그린 ‘잡문의 시대’가 바로 지금 우리가 사는 현실이라는 점이다. 유튜브와 SNS, 인터넷 매체에서 매일같이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글과 영상들, 자극과 가짜뉴스의 홍수 속에 언어는 이미 가치를 잃고 있다. 지식인들은 정치화 되었고, 권력의 도구가 되었다. 헤세가 “진리에 대한 배신자”라고 경고했던 모습이 지금 우리 눈앞에 있는 것이다.
반(反): 정신의 시대. 잡문에 대한 반작용으로 인류는 유리알 유희와 같은 정신 문명으로 향한다. 진리에 대한 배신을 거부하고, 지식을 초월한 정신적 승화를 갈망한다.
유리알 유희는 단순한 놀이가 아니다. 인류가 가진 모든 학문들, 즉 수학, 철학, 음악, 종교 를 하나의 언어로 종합하는 정신적 연금술이다. 그것은 단순한 지식 축적이 아니라, 명상과 깨달음의 경지를 통해 완전성에 다가가는 길이다.
“유희는 유희자에게 완전한 것을 찾아가는 어떤 상징적인 형식을, 숭고한 연금술을, 모든 형상이나 다양성을 넘어서 내면의 고유한 정신세계로, 즉 신에게 다가가는 것을 의미했던 것이다.” (1권 p.50)
합(合): 그러나 그 정신의 시대조차 무상하다. 유리알 유희도 결국 사라진다.
아무리 고결한 정신도 무상(無常)의 법칙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아무리 아름다운 것, 가장 아름다운 것일지라도 역사가 되고 지상의 한 현상이 되는 즉시 무상한 것이 되기 마련입니다.” (2권 p.64)
결국 지고한 정신의 성과도 속세로 돌아가야 한다. 깨달음은 소수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두와 나누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크네히트는 명인의 자리를 내려놓고 카스탈리엔을 떠난 것이다.
정신의 성소가 무너지는 순간, 그가 택한 길은 세속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유리알은 둥근 결정체다. 동양에서 영단(靈丹)이라 불렸던 불사의 환처럼, 모든 학문과 지혜가 응축된 상징이다. 그러나 동시에 유리는 쉽게 깨질 수 있다. 정신 세계의 성취도 무상하다. 그렇기에 크네히트는 그것을 붙잡는 대신 놓아버리고, 속세로 향한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할까?
헤세는 ‘정신의 시대’라는 대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그것조차도 덧없음을 알았다. 그래서 마지막 메시지는 분명하다. 깨달음은 머물러서는 안 된다.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 깨달음은 동서양의 전통과 맞닿아 있다. 불교의 공(空), 도가의 도(道), 기독교의 복음(福音). 이름 붙일 수 없지만 반드시 전해야 하는 그것. 헤세는 바로 그 ‘무명(無名)’의 메시지를 유리알 유희라는 장치를 통해 보여주려 했다.
오늘날 우리는 헤세가 예측한 잡문의 시대를 살고 있다. 정치의 극단화, 국제 질서의 패권주의, 정보의 과잉과 언어의 퇴락에 대한 헤세의 경고는 아직도 유효하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희망도 남겼다. 잡문을 넘어선 정신의 시대, 그리고 다시 세상 속으로 돌아오는 순환. 그 길이 바로 인류가 가야 할 길이라고 이미 유리알 유희를 통해 예측했다,
독서란 무엇인가? 그것은 내 알 껍질에 금을 내는 일이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금이 넓어지고, 마침내 껍질이 깨져 세상 밖으로 비상한다.
<유리알 유희>는 그 껍질을 깨부수는 망치 같은 책이다.
헤세는 잡문의 시대에서 방황하는 우리에게, 다시 묻는다.
“너는 어디로 갈 것인가?”
by Dharma & Maheal
어떻게 보면, 경박한 사람들에게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물보다 존재하지 않는 사물을 말로 표현하는 것이 더 쉽고 책임이 덜 느껴질지 모른다.- P12
자네는 완전한 가르침이 아니라 자네 자신의 완성을 바라야 하네.신성은 개념이나 책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네 안에 있어. 진리는 체험되는 것이지 가르쳐지는 것이 아니야.- P107
이윽고 전신 운동을 하면서 감격에 찬 춤으로 하루의 시작을 찬미하고,주변의 물결치며 빛나는 자연과 자신이 한마음으로 이어져 있음을 표현하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