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네스북에서 인정한 세계 최초의 국기는 덴마크의 국기인 '다너브로(Dannebrog)'라고 한다. 유럽에서 교회의 위세가 절정이던 1219년 교황의 명령으로 발트해에서 십자군 원정에 나선 덴마크 국왕 발데마르 2세(Valdemar II)는 지금의 에스토니아 수도 틸린에서 벌어진 린데니세 전투(Battle of Lyndanisse)에서 이교도들의 기습을 받아 위기에 몰린 가운데 하늘에서 붉은 바탕에 흰색 십자가가 그려진 정체불명의 천이 떨어졌고 신의 선물이라고 여긴 덴마크군은 용기백배하여 승리를 거두었다는 것. 물론 믿거나 말거나한 도시 전설이지만 아무튼 그때부터 자신들의 상징으로 삼아서 무려 800년이 넘도록 쓰고 있다는 것이 덴마크인들의 주장이다. 물론 덴마크의 정식 국기로 공식 지정된 것은 그보다 훨씬 나중인 1625년 5월 8일이지만 말이다.

1809년 덴마크 화가 크리스틴 오거스트 로렌젠(Christian August Lorentzen)이 그린 다너브로 전설. 하늘에서 저런 식으로 낙하했다고. 신이 천쪼가리만이 아니라 추 역할을 하도록 묵직한 깃대에 매달아서 공기역학까지 고려하여 투하한 모양. 공학도 신인가.
따지고 보면 전쟁에서 깃발은 인류 역사만큼이나 오래되었을 것이다. 수천, 수만명이 뒤엉킨 난장판 속에서 피아구분은 물론이고 병사들로서는 우리 쪽 깃발이 등 뒤에서 힘차게 펄럭이면 아군이 아직까지 버티고 있는 것이며 꺾이고 찢겨진다면 싸움에 졌으니 도망쳐야 한다는 얘기이다. 아마도 원시시대에도 조잡한 뭔가를 만들어서 성물마냥 높이 쳐들고 싸우지 않았을까. 전쟁이란 서로의 깃발 뺏기 싸움이며 깃발은 아군에게는 결속과 용기를, 적군에게는 공포와 좌절을 주는 일종의 토템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인간들은 그저 아무거나 들고 다니는 대신 신이 부여한 색깔과 문양을 그려넣고 나름의 의미를 부여한다. 어쨌든 싸움은 이겨야 하니까 말이다.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찾아 성지로 향한 엘프 대장장이의 여정을 다룬 영화 <킹덤 오브 헤븐>에서 십자군은 기독교의 상징인 십자 문양을, 살라딘의 이슬람 군대는 초승달과 별이 그려진 깃발과 방패를 들고 있다. 가문과 세력을 상징하던 깃발은 근대에 와서 국기의 원형이 되었다. 오늘날에도 깃발은 승리를 상징한다. 이오지마 전투에서 미 해병대가 성조기를 세우는 광경이나 베를린 전투에서 독일 국회의사당 꼭대기에 소련군 병사가 소련 국기를 내거는 모습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2차대전에서 연합군의 승리를 각인시켰다.

총격 직후 성조기를 등 뒤로 피를 흘리면서 주먹을 치켜 올리는 트럼프. 워낙 절묘한 구도였기에 짜고 친 거 아니냐는 음모론까지 나올 정도. 어쨌든 AP통신 기자 에반 부치(Evan Vucci)가 찍은 한 장의 사진은 이 꼴통 영감이 대선에서 이기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깃발이 인간의 심리에 얼마나 영향력이 큰 지 보여주는 셈. 광화문에서 태극기 휘두르는 양반들도 그런 이치 아닐런지.

교유서가에서 나온 신작도서 <전쟁과 디자인>은 전쟁을 통해 돌아보는 디자인 에세이이다. 저자인 마쓰다 유키마사(松田行正)는 그래픽 디자이너로 원래는 법학도였지만 우연한 기회에 출판사 디자인을 맡게 되었고 디자인을 주제로 역사 에세이를 쓰고 있다고 한다. 국내에도 몇 권이 책이 나와 있는 유명 작가이기도.

저자인 마쓰다 유키마사 옹. 1948년생이니 내일 모레 팔순인데 젊게 사시는 듯. 무려 1년에 한권 출간이 목표라고. 노안 안 오시나.
제2차 세계대전하면 빼놓을 수 없는 문양은 나치의 상징인 하켄크로이츠일 것이다. 서양인들이 한국이나 일본에 관광왔다가 불교 사찰에 달린 卍자를 보고 깜놀한다는 이 문양은 히틀러 대굴빡에서 창안된 것이 아니라 고대 그리스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갈만큼 역사가 오래 되었으며 원래는 행운의 상징이라고 한다. 심지어 대서양 너머 북미 인디언들 사이에서도 비슷한 기호가 발견될 정도. 사실은 외계인이 원조일지도. 그것을 1919년 나치의 수령이 된 히틀러가 자신들이 독일 민족의 구세주라는 이미지를 대중에 각인할 요량으로 나름 변형하여 자기네 당기로 쓴 것이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하켄크로이츠의 모습이다. 덕분에 행운의 상징은 하루 아침에 악마의 상징으로 둔갑했고 유럽 전체에서 저주받은 기호 취급을 받고 있으니 억울하다고 할 듯.
하켄크로이츠는 나치가 정권을 손에 넣기 전부터 깃발과 완장에 사용되었다. 정권을 얻은 다음부터는 깃발과 배지, 종국에는 문구류 같은 소품에까지 등장해 독일 전역을 휩쓸었다. 반 나치 세력은 나치를 비난하기 위해 하켄크로이츠를 사용했으나 도리어 하켄크로이츠의 힘을 재인식하는 결과를 낳았다. - p.149
이 책은 군용기에 그려진 각국의 마크를 비롯하여 인류 전쟁사에서 디자인이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해 왔는지를 얘기한다. 오늘날 많은 나라들이 사용하는 국기들 또한 어떤 의미에서는 전쟁이 탄생시킨 것이기도 하다. 유럽 국가 중에는 덴마크처럼 십자군 시절의 영향으로 십자 문양을 쓰는 나라들이 있는가 하면, 혁명과 해방, 자유의 상징으로 삼색기를 쓰는 나라들도 많다. 사람을 많이 죽일수록 선이라고 믿었던 공산주의 국가들은 피를 상징하는 붉은 색을 선호한다. 냉전 시절 소련군의 이름은 '붉은 군대'였다. 중국 마오쩌둥 추종자들은 자신들을 홍위병이라고 불렀다. 그게 꽤 쓸만하다고 여긴 사람이 모방의 달인이었던 히틀러였다. 하켄크로이츠의 바탕이 하필이면 붉은 색인 것도 소련 적기를 베낀 것이며 나치의 거대한 대중집회 또한 공산주의자들의 방식이다. 인사할 때 손을 치켜드는 것은 무솔리니를 흉내낸 것이지만. 극좌와 극우는 통하는 법이라나. 총성이 난무하는 전장만이 아니라 설전과 암투로 진흙탕 싸움을 벌이는 정치인들 또한 색깔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강조한다. 우리만 해도 언제부터인가 한쪽 당이 빨간색을 쓰니까 다른 쪽에서 파란색을 들고 나오더라. 우크라이나 전쟁을 일으킨 푸틴은 해리포터 20주년 기념판을 금지했다. 표지색이 파란색과 노란색이라서 우크라이나 국기를 연상시킨다는 이유였다. 색깔을 가지고도 편을 가르고 싸우는 게 인간인 셈이다.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도 국기의 색으로 싸운다. 트럼프와 바이든이 맞붙었던 2020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트럼프 진영이 붉은 색, 바이든 진영이 파란 색으로 각자 국기 색상 중 하나를 휘감고 싸웠다. - p.17
러시아에서는 이렇게 색 대비가 두드러진 해리 포터의 파란색과 노란색 판본을 갖고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구속되었다는 뉴스도 있다. 파란색과 노란색이 우크라이나를 나타내는 색이기 때문이다. - p.37
히틀러는 붉은 색을 사회사상 운동, 흰색을 국가주의 사상, 검은 색은 아리아 민족의 승리를 위한 투쟁으로 정의했다. 그러나 붉은 색은 아리아 민족, 흰색은 아리아 민족의 순결, 검은색은 아리아 민족 이외의 절멸을 나타낸다는 설도 있다. 국가의 색에 이렇게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다소 진부하지만 검은 색을 절멸의 색으로 보는 시각은 독특하면서도 공포스럽다. - p.62
사실 원래는 갈고리십자도 행운의 상징이었고 나치친위대의 해골 표식은 죽을 때까지 충성을 바친다는 의미였다. 최종적으로는 사악한 상징으로 전락했지만 원래는 자유와 독립을 염원한다는 의미였기에 조직의 표식이 된 것이리라. - p.137
일본에서는 메이지 유신 뒤인 1873년에 정식으로 육군을 발족하면서 프랑스 육군과 미 육군을 참고하여 군복 수칙을 정했다. 이때 별 모양을 군모와 계급장에 채택했다. 군모에도 계급장과 똑같은 개수의 별을 붙였다. 메이지 유신으로 서구 문화가 들어와 '★'이 별이라는 의미가 되기 전까지 일본에서 별은 '●' 모양이었다. ★은 헤이안 시대 아베노 세이메이의 '세이메이 인'처럼 주술적인 기호였다. - p.171
키치너는 정면을 바라보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영국은 당신이 필요하다'라고 말한다. 심리적인 압박은 크지 않지만 개인에게 직접 호소하는 디자인에 가슴이 뜨금하는 기분을 느끼게 한다. 결국 키치너 포스터는 많은 지원자를 모아서 크게 성공했다. 고무된 영국 육군은 협박이 더 두드러지는 포스터를 만들었다. 영국을 의인화한 존 불이 정면을 가리키며 '아직도 전쟁에 불참한 건 당신인가'라고 묻는다. - p.211
크메르 루즈는 검은 인민복에 캄보디아의 전통적인 '끄러마'를 착용했다. 끄러마는 스카프 겸 수건이면서 머리에 두르는 터번이 되기도 했다. 크메르 루주는 붉은 색 깅엄체크 무늬의 끄러마를 둘렀다. 참고로 남베트남해방전선(베트콩)은 푸른색 깅엄체크 끄러마를 착용했다. - p.292
300여 페이지의 본문에는 십자군의 십자 기호, 러일전쟁 당시 일본 연합함대가 내건 Z깃발,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모병 포스터, 히틀러의 프로파간다가 써먹었던 게르만의 룬문자, 여성들에게 검은색 히잡을 강요하는 아프간 탈레반의 여혐, 푸틴과 우크라이나 전쟁에 이르기까지 칼라풀한 사진과 함께 다양한 디자인이 등장한다. 인간 심리에서 색깔과 기호가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깨닫게 된다. 그렇다고 본격적인 역사서는 아니고 저자의 생각을 담은 에세이에 가깝다. 각각 독립된 얘기인 것으로 보아서 저자가 어디에서 연재한 짧은 칼럼을 모아서 엮은 모양. 부담 없는 분량에 흥미로운 주제, 분잡한 명절에 방 한켠에서 편안하게 읽을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