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30년도 더 전의 일이지만 TV를 통해서 걸프전 뉴스를 봤을 때가 생각난다. 바그다드 상공을 무수히 수놓는 대공포 사격을 뚫고 주요 시설들을 정확하게 때리는 토마호크 순항 미사일과 스텔스 전투기들, 사막을 가로지르며 내달리는 미군 M1 전차 행렬, 쉴 새 없이 날아다니며 이라크군 전차들을 사냥하는 A-64 아파치 편대, 스커드 미사일을 공중에서 파괴하는 패트리어트 요격 미사일의 활약. 미군의 모습은 PTSD에 시달리고 약에 쩔었던 베트남전 때와는 전혀 달랐다. 그것은 최첨단 무기의 향연이자 이전과는 전혀 달라진 새로운 형태의 전쟁이었다. 세계 4위의 군사대국이라고 자처하던 이라크군은 변변히 싸우지도 못한 채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았다. 이전의 제2차 세계대전식 물량전이었다면 제아무리 미국이라고 해도 만만찮은 싸움이 되었을 것이다. 한국전쟁에서 호된 맛을 보고 베트남전쟁에서는 게릴라들에게 쩔쩔 매던 미국은 걸프전에서 환골탈태한 모습을 보여줌으로서 비로소 누구도 이길 수 없는 진정한 세계 최강의 군사대국으로 등극했다.

1991년 사막의 폭풍 작전 당시 바그다드의 상황을 실시간 보도하는 CNN. 눈먼 폭탄을 쏟아붓던 과거 전쟁과 달리 스텔스 폭격기와 토마호크 순항미사일, 위성과 GPS로 정밀 유도되는 스마트 폭탄의 등장은 이전과 다른 첨단 하이테크 전쟁의 개막이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실은 그런 싸움은 오직 돈 많은 미국만이 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와칸다는 23세기 무기로 무장한 중세 군대랄지.
걸프전이 전 세계에 엄청난 임팩트를 남긴 것에 비하여 2003년의 이라크 전쟁은 12년 전의 재탕같은 느낌이었다. 마치 전편을 능가하는 후속편은 없다는 할리우드 특유의 불문율이랄까. 미군은 여전히 압도적이었고 약체화된 이라크군을 토끼몰이하듯 분쇄했다. 승리는 거두었지만 그게 전부였다. 등장한 무기들도 좀 더 성능이 개선되었다는 것 이외에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오히려 아들 부시와 럼스펠드 국방장관의 무계획성은 후세인 사후의 이라크를 난장판으로 만들어 하이테크 만능론에 빠져 있던 미군의 한계를 보여주었다는 호된 비판을 받아야 했다. 미군의 값비싼 첨단 무기는 눈에 보이는 적은 몰라도 대중 속에 숨어서 암약하는 게릴라들에게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결국 아버지 부시가 대히트를 친 작품을 아들 부시가 말아먹은 격이었다.
이라크 전쟁이 걸프전의 실패한 후속편이라면 제대로 센세이션을 일으킨 쪽은 2022년 러시아의 침공으로 시작된 우크라이나 전쟁이다. 우크라이나군의 모습은 미군의 첨단 무기 앞에서 구닥다리 무기로 맞서는 이라크군과도 다르고 민간인을 고기 방패삼아 상대가 알아서 지쳐 나가떨어질 때까지 무한 소모전을 벌이는 탈레반이나 하마스와도 다른, 전혀 새로운 유형의 전쟁을 보여주었다. 이른바 '하이브리드 전쟁'이다. 최전선에서는 우크라이나 로봇이 뛰어다니면서 러시아 전차와 보병을 사냥하고 드론이 상대편 후방 시설을 때리며 인터넷에서는 러시아의 딥페이크와 가짜 뉴스가 판을 치면서 여론을 왜곡한다. 만약 드론과 로봇이 아니었다면 우크라이나는 제아무리 서방의 원조를 받았다고 한들 3년씩이나 버티지는 못했을 것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보면서 세계 각국 언론들은 이것이 진짜 미래전쟁이라며 어서 대비해야 한다고 호들갑을 떨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특징은 드론과 로봇이 더 이상 보조병기가 아니라는 점이다. 광선검 들고 제다이처럼 무쌍찍는 거대 로봇은 아니라도 로봇 개에서 한층 진화하여 중화기로 무장하고 고기동으로 움직일 수 있는 저런 다족 병기를 만나는 것은 그리 멀지 않은 듯.
돌이켜보면 우리네 세상은 정말 급변하는 느낌이다. 20~30년 전만 해도 상상 속의 무기들이 현실화되고 있다. 인류 역사상 이렇게 빨리 변화하는 순간이 있었을까. 만약 을지문덕 장군이 타임머신 타고 1천년 뒤의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때에 뚝 떨어져서 조선군의 지휘를 맡는다고 해도 그리 위화감을 느끼지는 않을 것이다. 그 사이 화기가 등장했다고 하지만 주력 무기는 여전히 냉병기이며 싸움 방식에서 크게 달라진 것은 없기 때문이다. 그보다도 물렁한 조선군이 대륙을 누비던 고구려의 개마무사 조상님들을 이길 수 있을지가 더 의문이. 알렉산더 대왕이 카이사르 시절에 와도 여전히 그는 위대한 왕이며 그가 이끄는 마케도니아식 팔랑크스는 로마 군대에게도 무서운 적수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들도 21세기 전쟁에 적응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전쟁의 규모는 커지고 입체적이며 군대는 전문화되었다. 심지어 눈에 보이는 적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적과 싸워야 한다. 무기의 발전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그것을 운용하는 사람의 사고가 바뀌어야 한다는 점이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재앙적인 살육전은 늙고 고루한 장군들이 산업혁명이 불러온 변화를 무시하고 젊은 시절의 방식을 고집한 결과였다. 푸틴의 잠 못 드는 밤을 선사한 우크라이나 전쟁 역시 마찬가지이다. 러시아군은 2년 동안 죽을 쑤고 푸틴이 무능한 똥별들 여럿 목을 날리고야 비로소 승기를 굳힐 수 있었다. 그것도 극동의 가난뱅이 동생 북한에까지 손을 벌이고 소울 친구 트럼프가 물심양면 편들어 준 뒤에 말이다.
앞으로 30년 뒤의 전쟁은 또 어떤 모습일까 궁금해진다. 지금보다 훨씬 무인화, 첨단화될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바뀌지 않는 것도 있을 듯하다. 훈련소 입소 후에 제일 먼저 받는 제식 훈련은 수백년 전 전열 보병 시절의 유물이지만 군인으로서 가장 기본적인 절도와 복종심, 동질감을 심어줄 수 있다는 이유로 여전히 전 세계 거의 모든 나라에서 유지하고 있다. 어쩌면 우주세기의 군인들도 제식 훈련만큼은 우리와 똑같지 않을까.

미래의 창 출판사에서 나온 신작 도서 <전쟁이 만든 세계>는 15세기 화약 무기가 처음 등장한 이후 지금에 이르기까지 500여년의 시간 동안 전쟁이 어떻게 진화했는지에 대한 책이다. 저자는 오하이오 주립 대학 명예 교수이며 육군대학과 항공전 대학, 해군전쟁대학, 사관학교 등에서 역사와 외교를 강의한 전쟁사 전문 교수이다. 2023년에 돌아가셨다고 하는데 수십편의 저서 중에서 이번 책은 최신작으로 저자의 유작이기도.

이 푸짐한 몸매의 영감님이 저자인 윌리엄슨 머리 교수. 보기에는 이래도 젊은 시절에는 미 공군 조종사 출신으로 C-130를 몰았다고.
600여 페이지에 달하는 이 책의 주된 내용 또한 여느 책들마냥 몇몇 전쟁에 대한 단편적이고 뻔히 아는 사실을 단순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전쟁을 끊임없이 바꾸고 있으며 그럼으로서 오늘날 우리가 어떤 교훈을 얻어야 하는가이다. 전쟁사 교수로서 어째서 전쟁사를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되는지 당위성을 짚어준 셈이다. 저자는 근세 이후 총 다섯번의 군사 혁명이 있었다고 규정한다. 그 중 첫번째가 화약 무기의 등장이었다. 백년전쟁에서 처음 사용한 대포는 원시적이고 거의 쓸모가 없었다. 중요한 사실은 일회성 무기로 끝나는 대신 유럽 각국들이 그 가능성에 주목하여 경쟁적으로 도입하고 성능을 개량했으며 전술 또한 맞추었다는 것이다. 그럼으로서 수천년 동안 창, 칼, 활로 육탄전을 벌이던 인간들의 싸움을 바꾸어 놓았다. 제아무리 항우의 용력, 장비의 용맹함, 관우의 무용을 가지고 있다고 한들 총알 한발이면 숨통을 끊어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궁금한 점은 정작 화약을 더 빨리 발명한 중국이나 한 때 유럽 전체를 위협했을 만큼 강성했던 오스만 제국이 어째서 군사 혁명을 주도하지 못했는가이다. 이들의 화약 기술은 16세기에서 사실상 정지해 버렸다. 적어도 인력과 자원이 유럽보다 부족했던 탓은 아니었을 것이다. 저자는 이들 국가들이 혁신과 적응에 무관심했기 때문이라고 단언한다. 중국과 오스만 제국은 주변에 강력한 경쟁 상대가 없었다. 무사안일에 젖은 권력자들은 외부의 적보다 궁중 깊숙한 곳에 틀어박힌 채 반란 진압과 권력투쟁에 급급했고 혁신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자기네들 보기에 이미 다 가지고 있으니 더 욕심낼 이유가 없었다는 얘기. 반면, 올망졸망하게 모여 있는 유럽국가들은 하루가 멀다하고 투닥거리며 싸웠다. 화약무기를 이용한 전쟁은 이전과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어마어마한 비용이 소요되었다. 그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 나라가 전쟁에서 이겼고 그러기 위해서 금은보화를 찾아 신대륙 개척에 나서면서 우리가 아는 대항해 시대가 열렸다. 만약 중국이 통일국가를 세우지 못하고 춘추전국시대가 지금까지 내려왔다면, 로마제국이 멸망한 후 유럽이 분열되지 않았다면 이후의 역사는 또 달랐을까. 알 수 없다. 어쨌거나 큰 나라 세우는게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닐지도.
석기시대부터 중세시대까지 전술 구성은 거의 비슷하게 유지되었다. 평화시에는 혁신이 일어나지 않았고 전장에서의 응용도 거의 없었다. 실제로 14세기 스위스 전투 대형은 그리스 도시국가의 팔랑크스와 유사했다. 또한 서기 3세기의 파르티아의 중갑 기병대도 중세의 중갑 기사들의 방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기원전 5세기와 4세기의 주요 그리스 전함은 트리레미스였다. 이 형태의 전함은 16세기까지도 지중해 해군의 중추로 남아 있었다. 지중해에서 함선 설계와 해전 방식이 바뀐 것은 갤리선에 대포가 도입된 이후였다. - p.28
1543년 영국인들은 주철 대포를 만드는 법을 발견했다. 주철대포는 청동대포에 비하여 효과는 떨어지고 폭발할 가능성이 있어서 더 위험했지만 만들기 쉽고 제조 비용이 2/3에 불과했다. 그로부터 40년이 채 지나지 않아서 북유럽의 거의 모든 국가에서 저렴한 철제 대포를 대량 생산하기 시작했다. 대포 가격이 낮아지고 사용 가능한 대포 수가 많아지면서 범선에 충분한 무기를 장착할 수 있게 되었다. 범선은 갤리선보다 더 효과적인 전쟁 무기가 되었다. - p.55
유럽 국가들 간의 끊임없는 충돌은 무기와 전술, 전쟁을 뒷받침하는 병참과 재정의 기본 구조에 변화와 적응을 가져왔다. 이런 변화는 육지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바다와 해양에서도 일어났다. 유럽인들은 신속하고 효과적으로 적응한 반면, 적응하지 못하거나 적응할 능력이 없는 국가들은 설 자리를 잃었다. 15세기의 새로운 선박 설계 및 건조 방법같은 기술 변화는 군사 분야로 자연스럽게 유입되었다. - p.78
더 중요한 사실은 화약 혁명이 돈키호테같은 기사들을 몰락시킨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점이다. 전쟁의 규모는 어마어마하게 커졌으며 산업혁명을 촉진하고 사회를 변화시켰다. 더 많은 세금을 뜯어내기 위해서 관료조직은 전문화되고 근대적인 조세제도와 통치 기반이 등장했다. 나폴레옹 시대에 오면 승리를 위해서 국가 전체가 총동원되는 총력전 시대가 열렸다. 물론 이런 발전은 유럽에만 국한된 얘기였다. 중국을 비롯한 동양 국가들은 20세기 초반까지도 수백년 전과 다를 바 없었다. 유일한 예외는 서양을 재빨리 모방한 일본이었다. 자기들만의 세상에 갇혀 있었던 중국은 일본보다 한발 늦게 서구화에 나섰지만 신해혁명 이후 정치적 혼란 속에서 변화는 매우 느렸고 최초의 총력전이었던 중일전쟁에서 일본에 시종일관 밀릴 수밖에 없었다.
이 책은 수천년 동안 거의 변화가 없었던 인류 문명이 갑자기 상승곡선을 타게 되었는지, 그런 변화가 어디에서 시작되었으며 세상을 어떻게 바꾸게 되었는지를 두루 다루고 있다. 여기에는 7년 전쟁, 미국 독립전쟁, 나폴레옹 전쟁, 두 번의 세계대전,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걸프전, 그리고 가장 최근의 우크라이나 전쟁에 이르기까지 굵직굵직한 사건을 중심으로 이른바 '군사 혁명'이라고 할 만한 전쟁의 변천사가 담겨 있다.
나폴레옹 전쟁의 사상자 수는 그 후에 일어날 전쟁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나폴레옹이 유럽을 황폐화시킨 15년 동안 양측에서 발생한 총 사망자는 200~300만명에 달했다. 이 수치는 30년 전쟁의 사망자 수치와 비슷하다. 나폴레옹 전쟁은 30년 전쟁의 반 밖에 안 되는 기간 동안 같은 수의 사망자를 냈던 것이다. 2세기 동안 유럽의 전쟁 기술이 발전한 까닭이었다. - p.171
근대국가들이 전쟁에 엄청난 인구를 동원할 수 있었던 것은 산업혁명과 프랑스혁명의 영향이 결합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제4차 군사-사회 혁명은 근대국가가 유럽의 대규모 전쟁의 경제적 비용을 감당할 수 없을 거라는 우려를 종식시켰다. 농업의 발전으로 전장의 군대와 본국의 노동력을 유지하기에 충분한 식량과 사료를 확보할 수 있게 된 덕분이었다. 근대 국가는 전례없는 막대한 자금과 자워을 동원해 탄약과 무기를 생산했고 수많은 젊은이들을 끊임없이 전쟁터로 보낼 수 있었다. - p.229
나폴레옹 전쟁의 사상자 수는 그 후에 일어날 전쟁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나폴레옹이 유럽을 황폐화시킨 15년 동안 양측에서 발생한 총 사망자는 200~300만명에 달했다. 이 수치는 30년 전쟁의 사망자 수치와 비슷하다. 나폴레옹 전쟁은 30년 전쟁의 반 밖에 안 되는 기간 도안 같은 수의 사망자를 냈던 것이다. 2세기 동안 유럽의 전쟁 기술이 발전한 까닭이었다. - p.171
제1차 세계대전이 끔찍하게 오래 지속되고 엄청난 희생을 초래한 이유는 프랑스 혁명의 산물인 민족주의에 의해 촉발된 광기와 산업혁명의 결합으로 일어난 제4차 군사-사회 혁명의 결과였다. 프랑스 혁명은 근대 국가가 국민을 통제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부여하는 행정 및 관료 구조를 만드는데 도움을 주었다. 즉, 프랑스 혁명은 이 전쟁에 동기와 수단을 모두 부여했다. - p.295
두 차례의 세계대전 사이인 전간기에 기술과 능력은 크게 향상되었지만 1930년대 중반 등장한 레이더가 몇 안 되는 예외적인 경우로 보일 만큼 놀라운 기술적 전진은 거의 없었다. 그 대신 제1차 세계대전의 무기들은 전장에서 효율성이 크게 개선되었고 군사 교리와 전술 개념의 변화가 요구되었다. 군사조직이 전투를 얼마나 잘 수행하는지는 무기 시스템의 숫자가 아니라 전술 및 작전 시스템의 문제였다. 따라서 평시 훈련과 연습을 얼마나 많이 제대로 수행했는지가 제2차 세계대전 초기에 영향을 미쳤다. - p.307
또 다른 대전쟁의 발발은 제1차 세계대전의 군사적 사회적 교훈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1920년대와 1930년대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갔다는 것을 의미했다. 프랑스 혁명과 산업혁명의 결합은 다시 전장을 흔들었다. 프랑스를 비롯한 서유럽 국가들에 대한 독일의 일시적인 승리는 전쟁 수행이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바르바로사 작전은 "변화가 거듭될수록 본질은 더욱 한결같아진다."라는 격언을 증명했다. 나치즘과 소련 공산주의의 본질적인 특성은 전쟁을 전례없이 격렬하게 만들었다. 이 전쟁은 나치 독일과 소련 둘 다 거대한 산업국가였음에도, 그 어떤 기술적 또는 군사적 발전도 두 교전국을 소모전이라는 불변의 법칙에서 벗어나게 할 수 없음을 보여주었다. - p.391
1970년대 초부터 이루어진 급격한 기술 발전으로 소련은 점점 불리한 입장에 처하게 되었다. 1989년 소련 붕괴는 불가피한 것이 아니라 전임자들과 같은 무자비한 방법을 사용하지 않으려는 고르바초프의 의지가 반영된 결과였다. 그의 전임자였던 유리 안드로포프가 사망하지 않았다면 소련은 몇 년 더 버틸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소련 경제는 더 이상 괴물같은 국방 체계를 유지할 수 없는 상태였다. - p.579
저자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지금의 시대를 제5차 군사혁명으로 규정한다. 그것은 핵무기의 등장이 아니라 IT 기술의 발전이다. 무기는 더욱 정교해졌고 훨씬 파괴적이다. 사이버 전쟁은 전후방 구분이 없다. 여차하면 인류 문명을 끝장내는 것조차 불가능하지 않다. 동시에 인류 문명을 끌어올리는데도 일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가 쓰는 컴퓨터, 휴대폰, GPS, 인터넷 등 수많은 이기들은 원래 전쟁 무기에서 비롯되었다.

나같은 길치에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준 GPS 네비게이션. 원래는 이동식 핵미사일 유도를 위한 기술이었지만 민간에 개방한 사례.
남북전쟁 당시 북군의 명장이었던 윌리엄 셔먼 장군은 남부를 행진하면서 지나가는 곳마다 쑥대밭으로 만들었고 이를 비판하는 목소리에 대해서 "전쟁은 잔인한 것이오. 그걸 바꾸려고 할 필요는 없소. 그래야 빨리 끝나는 법이오."라고 일축했다. 전쟁은 누군가를 영웅으로 만들고 또 누군가는 PTSD를 얻기도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어쨌든 전쟁이 인류를 발전시켜 왔다는 점이다. 전쟁은 파괴를 낳고 파괴는 창조로 이어진다는 점이 아이러니이다. 만약 인간에게 투쟁심이 없었다면 인류 문명은 판도라 행성의 나비족에서 머물렀을지도.
출판사에서는 <전쟁이 만든 세계>라고 의역했지만 원제는 <어둠으로 가는 길(The Dark Path)>이다. 기술 발전으로 전쟁은 나날이 참혹해지고 있음에도 정작 전쟁을 결정하는 정치인들은 오히려 갈수록 역사에 무지몽매한 자들이 그 자리를 차지함으로서 과거의 교훈이 무시되고 있다는 것이다. 걸프전 이후 미국이 실패를 거듭하는 것도 그 때문이라는 얘기. 그 중 최악은 말할 것도 없이 트럼프.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도널드 트럼프는 역사책은 커녕, 그 어떤 책도 펴본 적이 거의 없는 사람이었다." 그야말로 촌철살인같은 평가랄지.

저 코믹한 얼굴을 보면 막연한 편견보다는 의외로 재미있는 사람일지도. 특유의 고집과 괴팍한 성질머리만 어떻게 할 수 있다면.
중간중간 번역이 다소 매끄럽지 않은 부분이 눈에 띄기는 하지만 올해 들어서 가장 흥미롭게 읽은 책이다. 전쟁사 최고 전문가다운 저자의 해박한 지식과 거침없는 필력으로 마치 5편짜리 전쟁 다큐멘타리를 보는 느낌이다. 저자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세상을 뭉떵그려서 제5차 군사혁명이라고 하지만 우크라이나 전쟁을 보면서 이미 제6차 군사혁명이 시작된 것은 아닌가 싶다. 인간 대신 로봇이 전장을 지배하는 시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