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라스트 듀얼 : 최후의 결투>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다. 14세기 중세 프랑스를 배경으로 주인공(맷 데이먼)이 귀족의 길을 향한 눈물겨운 사투를 다루고 있다. 소지주의 아들인 그는 자신의 땅을 얻기 위해서 최전선에서 죽으라 싸웠지만 싸움에 패배했고 다른 지주의 딸과 결혼하여 장인으로부터 받은 지참금조로 받은 영토 덕분에 꿈에도 그리던 귀족이 되었지만 막상 알짜배기 땅은 자신이 속한 영주의 장난질로 친구에게 빼앗기고 분을 참지 못한 나머지 그 친구와 목숨 건 결투를 벌인 끝에 최후의 승자가 되고 땅도 되찾게 된다.
땅 앞에서는 생명의 은인도, 죽마고우도 필요없다는 것이 중세 귀족들의 숙명. 귀족에게 땅이 곧 지위이자 재산이다보니.
영화 분위기는 굉장히 암울하고 초반의 잠깐 나오는 짧은 전투신과 막판의 결투 장면 말고는 <킹덤 오브 헤븐>처럼 화려한 액션과는 거리가 멀지만 중세 귀족의 모습을 가장 사실적으로 묘사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맷 데이먼은 명색이 귀족이지만 아내를 마치 자신의 소유물처럼 대하는 난폭한 모습은 우리가 아는 기사도와는 거리가 멀다. 특히 영화 내내 땅에 대한 극도의 집착은 중세 귀족에게 영지란 생명이자 모든 것임을 보여주는 셈이다. 그는 한몫을 벌기 위해서 전쟁터에 목숨 걸고 나가지만 이 또한 싸움에서 이겨서 전리품을 챙기지 못하면 말짱 꽝이다. 겉으로는 지배계층의 일원으로 웅장한 성에서 눌러앉아 농민들을 수탈하여 남 부럽지 않은 삶을 누린 것 같아도 실제로는 그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서 나름 개빡시게 살아야 했다는 얘기이다.
요즘 전생이 유행하는 일본 판타지 만화에서는 약소 귀족으로 태어나서 영지를 개발하고 인재를 모아서 강대국으로 거듭난다 어쩌구하는 뻔한 스토리가 난무하지만 현실에서는 어림없는 소리일 뿐. 비유하자면 동네 편의점을 몇년 만에 대기업으로 키우겠다는 꼴.
물론 제아무리 불평을 늘어놓은들 왕후 귀족의 사치를 위해서 끝없이 고혈을 짜내야 했던 대다수 민중의 입장에서 본다면 배부른 소리겠지만 말이다. "불공평이다. 부조리다. 혁명이다. 지배 계급은 공포에 떨어야 한다. 노동 계급이 잃을 것은 상전이요, 얻는 것은 세상일지니.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 공산당 선언 중."
타인의 사유 출판사에서 나온 <귀족 시대>는 중2병 가득한 일본 판타지 만화와는 다른 현실 속 중세 귀족들의 참된 모습을 파헤친 책이다. 저자는 국내 대표적인 서양사 전문가로서 <벌거벗은 세계사>에도 나왔다고.
흔히 귀족이라고 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를까. <베르사유 장미>에서 화려한 드레스와 치렁치렁한 머리를 하고 한손에는 부채를 들고 철 없는 왕비의 주변을 매돌면서 어딘가 있을 돈 많은 도련님을 기다리는 허영심 가득하고 골은 빈 상류층 부인들이 생각난다. 그러다가 성난 민중에게 붙들려서 기요틴행으로 말이다. 이 책을 읽어보니 실제로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을 듯 하다. 어차피 졸부라는 게 어느 시대이건 다를 바 있겠냐만. 이 책은 유럽 사회에서 지배계층으로서 귀족들이 어떻게 등장했으며 그들이 자신들을 우리같은 평범한 소시민들과 구분짓고 자기들만의 신분 세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어떻게 살고 어떻게 행동했는지를 들여다 본다.
나는 한 여성이 옆에 있던 부인에게 괴상한 질문을 하는 것을 듣고는 박장대소했다. '그녀는 푸른 피를 갖고 있나요?' 이는 그녀가 진짜 귀족인지 묻는 질문이다. 언제부터인가 귀족에게는 푸른 피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었다. 푸른 피의 신회는 꽤 오랜 기간 그리고 많은 곳에서 보편화되었다. - p.16
흔히 결투를 1:1대결이라고 상상하지만 이는 틀린 생각이다. 결투에는 나름의 규범이 존재해서 모욕이나 비방에 대해 한쪽이 다른 한쪽에게 무력으로 이를 보상할 것을 요구하면서 결투가 성사된다. 이 때 결투 당사자는 증인을 대동하는데, 증인들은 정해진 규범이 준수되는지를 감시하거나 사상자를 수습하려고 온 게 아니라 같이 싸우러 왔다. 17세기의 결투는 말이 결투이지 작은 전투를 방불케 했다. - p.30
결혼 적령기에 이른 귀족 자제들에게 사교 시즌은 사교계에 데뷔하는 무대였다. 사교계에 첫발을 내딛는 귀족의 딸들, 즉 데비당트는 왕실 접견 행사나 왕비의 무도회에서 공식적으로 소개되었다. 일주일에 두 개 이상의 무도회에 참석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무도회는 춤을 추는 곳이라기보다 결혼 시장에 가까웠다. 상류 사회는 일종의 족내혼을 기대했기에 엄선된 초대 명단이 작성되었다. - p.59
귀족의 그랜드 투어에 지나친 환상을 품을 필요는 없다. 모든 여행이 그렇듯이 그랜드 투어가 늘 즐거웠던 것은 아니었다. 18~19세기 프랑스를 여행한 영국인들은 프랑스 숙소의 위상 상태에 기겁했다. 벽에는 새까만 더께가 앉아 있고 부엌에서는 개가 동물의 내장을 뜯어 먹고 있었다. 여관방에서 하룻밤에 이 480마리를 잡았다는 기록도 있다. 부드러운 빵을 기대하는 건 사치일 경우가 많았다. 툴루즈 지방에서는 일주일치 빵을 한번에 구웠고 알프스 산지에서는 1년치, 심지어 2~3년치를 한번에 굽고 훈제하거나 햇볕에 말렸다. 그것을 먹으려면 망치로 깨서 5번은 삶아야 했다. - p.77
귀족 가문의 딸들에게 주어진 운명은 대동소이했다. 그들은 어려서부터 바느질과 자수를 배웠다. 여건이 된다면 수녀원에 보내져 기본 교육을 받았지만, 이 모든 교육의 목적은 훌륭한 신붓감이 되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딸의 혼인에는 한 가지 추가적인 아니 가장 중요한 문제가 남아 있었다. 결혼 지참금이다. 지참금의 형태는 사정에 따라 규모도 달랐지만 형편이 넉넉하지 않은 귀족 집안에서 딸의 존재는 큰 부담이었다. 지참금 없이는 결혼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 p.114
귀족의 식탁은 평민의 식탁과 재료부터 달랐다. 중세에는 하늘과의 거리에 따라 식재료 위계가 결정되었다. 땅에서 자라는 채소는 등급이 낮은 식재료로 여겨져 가난한 농민의 몫이 되었다. 반대로 땅에서 멀리 떨어진 과일과 하늘을 나는 새는 귀족의 몫이었다. 농민의 주식은 곡물로 만든 빵이나 죽이었지만 귀족은 흰 빵, 사냥으로 잡은 다양한 고기, 생선, 과일, 치즈를 주식으로 삼았다. 특히 향신료는 매우 중요한 식재료였다. 젤리나 파이, 튀김과 스튜 요리와 더불어 고기 요리는 단연 귀족 식단의 메인이었다. 다양한 종류의 고기가 활용되었다. - p.142
인간이란 사회적 동물이다. 스스로를 왕후이니 귀족이니 하면서 남들과 자신을 차별화함으로서 우월감을 가질 수 있는 것도 인간이 무리를 이루고 사는 사회적 동물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또한 여기에는 중요한 전제가 필요하다. 남들로부터 우월한 존재임을 인정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냥 중2병 걸린 미친 놈 취급을 받을 테니 말이다. 귀족들은 일반인들이 쉽게 누릴 수 없는 고상한 취미를 가지고 좋은 옷과 값비싼 음식을 먹었으며 비천한 육체 노동 대신 군인이나 법률가와 같은 고도의 전문성을 요구하는 직업에 종사했다. 문제는 돈이 많이 든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수입에 맞추어 생활 수준을 낮춘다면 귀족이기를 포기하는 셈이다. 아무리 지체 높아도 돈 없으면 귀족들 사이에서 귀족답게 살기도 쉽지는 않았을 거라는 얘기이다.
박지원의 <양반전>에서는 조선 후기 이름만 번드레한 가난한 몰락 양반이 양반 노릇을 하는 허식적인 모습을 조롱한다. 21세기인 지금도 눈에 보이는 신분제는 없지만 현대판 귀족이라고 할 수 있는 극소수 상류층의 리그에 입성하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다. 이게 인간의 끝없는 허영심이며 시대가 달라진다고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이 책은 그런 귀족 사회의 허영심을 통해 보는 유럽 역사의 한 단면을 다룬 대중 교양 서적이다. 300여 페이지에 불과한 분량이다보니 깊이는 다소 부족한 느낌이지만 꽤 재미있다. 유튜브를 책으로 옮긴 느낌이랄까. 시간날 때 가볍게 읽을만한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