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IP TV에서 우연히 <아르키메데스의 대전>이라는 영화가 하더라. 동명의 만화가 원작인데 태평양전쟁이 일어나기 수년 전 동경대 수학과 다닌다는 중2병 꼬꼬마가 항공 주병론을 제창하는 야마모토 이소로쿠에게 스카웃 되어서 해군의 전함 꼴통들에 대항하여 훗날 일본을 구하게 된다는 전형적인 일뽕 가공전기라고.
영화 초반부 야마토 특공에 나섰다가 미군의 폭격으로 침몰하는 야마토. 웅장하다기에는 뭔가 값싼 CG 삘이 팍팍. 그렇다고 <남자들의 야마토>처럼 비장미가 있는 것도 아니고. 원작에 숟가락 얹기에만 급급하여 대충 만들어 욕을 처먹는게 요즘 일본 영화들인지라.
주인공이 야마모토에게 스카웃되는 과정도 일본 만화스러운 전개. 신형 주력전함의 경합을 놓고 수세에 내몰린 야마모토가 단골 기생집에서 술을 걸치면서 상대편의 건조 예산이 엉터리임을 증명할 방법을 고민하다가 우연히 옆방에서 기생들과 숫자 놀이를 하는 주인공을 발견하고 수학의 달인인 그를 삼고초려한다는 내용. 제아무리 일본인들이 선망하는 동대생이라고 한들 교수도 박사도 아니고 끽해야 스무살 남짓의 학부생인데. 만화니까. 중2병 애송이를 상대로 해군 중장의 자존심을 내려놓고 도움을 애걸하는 야마모토 "이대로라면 전쟁이 일어날 걸세." "전쟁요? 누구랑요?" "미국일세." 어이없다는 듯 비웃는 주인공 "미국과는 절대 전쟁이 일어날 수 없어요." "왜 그렇게 생각하는건가?" "공업력에서 50대 1, 석유 생산력에서 120 대 1입니다.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 법이죠. 애들도 이런 싸움은 안 해요." "그걸 하려는 게 일본 해군일세."
아버지 뻘의 별 두개짜리 장군(중장)을 상대로 바보같은 소리 말라며 중2병의 패기를 단단히 보여주는 주인공. 실제로 그 바보같은 짓을 벌여서 나라를 패망의 나락으로 몰고갔다는 점에서 진짜 중2병은 이런 꼬꼬마가 아니라 일본 군부였다는 일본인들의 자학 디스.
청나라, 러시아를 꺾은 것만 믿고 자만한 나머지, 정신줄 놓고 미국한테 덤볐다가 영혼을 탈탈 털리고 막판에는 핵폭탄까지 두발 맞은 덕분에 그 트라우마가 뼛속까지 단단히 각인되었는지 8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다시는 정신줄만큼은 놓지 말자는 것. 그럼에도 침략전쟁에 대한 반성은 죽어도 없다는 점에서 강자에게는 비굴하고 약자에는 오만한 일본인들의 이중성을 보여준다랄까. 하긴 그런 게 세상 이치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일본이 미국에 다시는 덤빌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은 전쟁을 통해서 힘의 격차를 뼈저리게 느낀 것도 있지만 한편으로 패전 이후의 궁핍함 속에서 미국이 공급한 막대한 식량이 일본인들의 위장을 사로잡은 덕분이기도 하다. 일본은 전쟁 통은 물론이고 전쟁 이전에도 영양실조가 만연할 만큼 가난한 나라였기 때문이다. 국가는 근대화에 성공하여 세계 최강 미국과도 맞장을 뜰 만큼 부강해졌다고 하지만 소수 엘리트들을 제외하고 정작 대다수 국민들은 그 수혜를 거의 보지 못했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근대화였나 싶을 정도. 상식적으로 생각한다면 그 남아도는 힘을 전쟁이 아니라 국민들 복지에 쏟아야 함에도 그건 일본의 방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국민이란 다스리고 쥐어짤 대상이지 그 반대가 아니라는 것이 한결같은 일본 지배자들의 사고이다. 심지어 명색이 21세기인 지금도 그리 다를 바 없다. 어차피 정치하는 양반들의 영혼이 바뀌지 않는 이상에야.
에도 시절 '마비키(間引き)'라고 하여 가난한 농민들이 입 줄이기 일환으로 영아 살해가 보편적이었던 일본은 근대 이후에도 궁핍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도시는 사정이 좀 나아졌지만 농촌에서는 여전히 "이밥에 고깃국" 먹는 것이 소원이었다. 오죽하면 농촌 출신 병사들이 군대 와서 처음으로 고기라는 것을 접했다고 할 정도이니 말이다. 하지만 패전 덕분에 국민들을 쥐어짜던 일본 지배자들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한 미국 점령군은 일본인들에게 무엇이 진정한 풍요로움인지를 각성시켜 주었고 일본인들이 다시는 배를 곪을 일은 없었다. 그리고 점령군 사령관이었던 맥아더는 일본인들의 신이 되었다. 이 점이 제1차 세계대전에서 진 뒤 '순무의 겨울'을 보냈던 독일인들이 그때의 치욕을 두고두고 기억했다가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던 것과 결정적인 차이이다. 제아무리 사무라이 정신이 어쩌구해도 배고픈 놈이 돈 주고 밥 주는 놈에게 어캐 이겨.
맨날 치고 박고 싸우는 전쟁사 말고 독특하거나 별난 역사 이야기를 좋아하는 호사가라면 한번 주목해 볼만한 신작도서가 나왔다. 소명출판사에서 나온 <전쟁은 일본의 밥상을 어떻게 바꿨나>라는 책이다. 중일전쟁 때부터 태평양전쟁 말기까지 여성 잡지에 실린 요리기사를 통해서 일본인들의 전시 생활을 다룬 책이다. 저자는 사이토 미나코(齊藤美奈子)라는 여류 문학 평론가. 전문 역사가나 음식과 관련된 사람은 아닌 듯.
도입부에 삽입된 1929년 단오에 일본인들이 먹었다는 군국주의 버전의 오셋쿠 요리(端午の節句料理)라는데. 비행기 미트볼, 군함 샐러드, 철모 메쉬. 여기에 일장기까지 꽂는 센스. 밀덕으로서 한번 먹어 보고 싶은 기분이 들지 않는 것도. 본문에 레시피도 있다는.
원래는 이렇게 먹는거람서.
중일전쟁이 폭발한 뒤 식량이 부족해지자 관에서 권장하는 소위 절식밥(節約メシ). 현미를 물에 담근 다음 하루종일 불리면 부피가 불어나서 똑같은 양이라도 주부들 입장에서는 든든하게 보인다나. 뭔 눈속임도 아니고. 공무원들 머리에서 나오는 것이 그렇지.
그나마 이조차도 나중에는 진수성찬이 되는데.
태평양전쟁 말기 식량이 바닥나고 배급제가 무너지는 고난의 행군 시절에는 밥 대신 집 근처에 난 잡초 뜯어 먹는 판국이라. 버마에서 일본군 고위 장군으로 암약하면서 항일을 위해 멸사봉공하시던 어느 분이 그러셨지. 일본인은 초식동물이라서 풀만 먹어도 된다고.
일본은 태평양전쟁은 고사하고 만만한 중국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켰을 때부터 대번에 식량 부족에 직면한다. 전쟁의 직접적인 영향이라기보다 원래 일본이 인구는 많은데 식량이 부족한 나라였기 때문이었다. 평화로운 시절 식민지 조선과 타이완에서 수탈하거나 동남아에서 싸게 수입한 쌀이 대량으로 들어오면서 높으신 분들이 우리 일본은 앞으로 공업국가가 될 것이므로 애써 농업을 발전시킬 필요가 없다고 여긴 탓이었다. 하지만 전쟁이 폭발하자 수송선 태반이 전쟁 물자 수송에 동원되면서 국민 경제를 유지하기 위한 물자 수입은 뒷전으로 밀려났고 당장 먹거리부터 줄어들었다. 뒤늦게야 식량 증산과 함께 머리 굳은 일본 지도자들이 내놓은 방법이란 게 저런 식의 절식 강요였다. 한마디로 다들 적게 먹으면 그만큼 식량도 덜 필요하다는 것.
이 책에는 전쟁 발발 이전의 평화로울 때부터 패전기까지 당시 일본의 식생활과 다양한 레시피를 소개한다. 처음에는 다양한 식재료로 메인 메뉴는 물론이고 아이들 디저트까지 지금 만들어 먹어도 괜찮다 싶은 것에서 일본이 패전에 가까워지는 뒷페이지로 갈수록 식단이 점점 가난해지는 것이 체감된다는.
전시 레시피에는 가끔 뜬금없는 내용도 보인다. 절미요리가 대표적인데, 대용식을 그토록 열심히 권장하면서 고구마나 감자, 호박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절미요리라는 이름으로 우동, 소바, 때로는 쌀을 부족으로 활용하자고 제안한다. 이것이야말로 본말이 전도된 게 아닌가. 우동과 소바 정도는 그대로 먹어도 될 텐데 말이다. 하물며 쌀은 더더욱 그렇다. 주식을 모두 빵이나 우동으로 대체하면 그 비용도 만만치 않다. 그리하여 반찬에 변화를 주고 주식은 가능하면 밥 한공기, 식빵 한장을 권장했다. - p.55
게다가 이처럼 관이 모든 것을 주도하고 국민들은 닥치고 따라야 하는 전체주의 시절답게 살림 비법이랍시고 앞뒤 맞지 않는 탁상공론적인 권고사항도 난무한다. 한마디로 "쌀이 없으면 빵을 먹으면 되지"라는 식. 쌀보다 밀가루가 더 비싼 나라에서 말이다. 주부들 앞에서 시장 한번 안 가본 티를 낸담서.
배급된 고기는 여러번 나누어
배급된 고기는 한 번에 다 먹는 것이 아니라 여러 번 나누어 사용합시다. 우선 큰 덩어리 째로 기름을 둘러 노릇하게 구은 후 뜨거운 물을 살짝 잠길 만큼 넣어 맛있는 스프를 만듭시다. 그런 다음 고기를 꺼내고 스프에 여러가지 제철 채소를 넣고 푹 익힙니다. 고기는 그대로 2~3일 보관할 수 있으므로 다음과 같이 두세번 나누어 사용하도록 합시다.
적은 양의 고기로 여러번 사용하기
갈거나 작게 다진 고기와 채소를 듬뿍 넣어 섞은 후 미트볼 식으로 졸이거나 볶거나 하고 고르케나 양배추롤, 잡채 등을 만들면 적은 양의 고기로 풍성한 상차림을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을 읽고 있으면 빈곤한 식단으로 가족을 위해서 어떻게든 맛있게 창조해야 하는 그 시절 주부들의 애환이 절절이 와닿는달지. 차라리 전쟁을 멈추라고.
말린 밥 이용법
아무리 깨끗하게 먹는다고 해도 밥통이나 찜통에 눌러붙은 밥알이 남아 있기 마련입니다. 이것을 가는 제반에 널어 바싹 말려두면 다양하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기름에 튀겨서 국물 요리 건더기로 사용하거나 프라이팬에 달달 볶아서 설탕옷을 입히면 아이들 취향을 저격한 맛있는 간식이 됩니다. - p.74
이른바 설탕 누룽지 레시피. 이건 내 어린 시절의 추억에도 있는 듯. 그러고보면 밥솥에서 누룽지 말려서 먹었던 것이 언제던가 싶다는. 요즘이야 인터넷에서나 구경하는 물건이지만.
오징어말이 튀김
달걀 2개에 중간 크기의 오징어 3마리면 5~6인 가족이 마음껏 즐길 수 있습니다. 오징어는 껍질을 벗기고 배를 갈라 절구공으로 두들기거나 부엌칼로 잘 저며줍니다. 이 안에 오징어 다리와 껍질 벗긴 완두와 당근, 피, 죽순 등 여러 채소를 잘게 썰어넣고 섞어줍니다. 밀가루 적당량을 넣고 소금으로 간합니다. 달걀은 잘 풀어 1할 정도의 물과 소금 한 자밤을 넣습니다. 기름을 두른 프라이팬에 얇게 부쳐내어 도마 위에 펼친 다음 밀가루를 뿌리고 갈아 놓은 오징어를 깔아 끝에서부터 말아줍니다. 끝 부분은 물에 푼 전분가루를 발라 마무리합니다. 그리고 2~3개 꼬치로 고정한 후 찜통에 넣고 7~8분 찐 후 잘 익으면 꺼내어 프라이팬에 기름을 살짝 두르고 굴려가며 바싹하게 구워줍니다. 1.5cm 두께로 잘라 접시에 담아내고 국화꽃 등으로 장식합니다. 오징어 유부말이, 갈분 소스 버무림은 오징어말이 튀김과 속은 같으나 달걀 대신 유부로 말고 쩌낸 것을 곱게 썰어 갈분 소스를 걸쭉하게 얹어서 일본식으로 맛을 냅니다. - p.103
태평양전쟁 시절 아버지와 남편에게 인기 있었다는 전시 레피시. 이런 건 요즘도 술안주로 쓸만할 듯. 일본 근해에 오징어가 하도 많이 잡힌 덕분에 오징어의 오자만 들어도 물릴만큼 먹었다나. 아직은 중국 어선 떼가 그 동네까지 마수를 미치지 않을 때인지라.
저자는 전시 레시피를 통해서 그 시절 일본을 비판적으로 다루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인 특유의 역사적 피해 의식만큼은 피할 수 없는 모양이다. 읽다보니 이런 대목이 있더라.
1941년 미국이 대일 석유 수송을 금지하자 일본은 큰 타격을 받았다.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해 동남아시아로 진출을 꾀하게 되면서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것이다. - p.181
1941년 8월 1일 루스벨트 행정부는 일본에 전격적으로 석유 금수조치를 취한다. 그러나 저자의 말처럼 미국의 금수조치가 일본을 궁지로 내몰아서 태평양전쟁으로 이어진 것이 아니라 일본이 프랑스령 베트남에 무력 진주하고 1940년 9월 27일 추축 조약에 가입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미일 협상 과정에서 베트남에서의 철수와 추축에서 탈퇴하라는 미국의 요구를 일본이 거부했기에 금수조치를 단행한 것이다. 미국이 바보가 아니고서야 일본이 미국을 실질적인 적국으로 취급하는 상황에서 당연한 결과이다. 한마디로 원인과 결과를 거꾸로 이해하는 셈이다. 미국을 신으로 여기는 것과 별개로 자신들의 침략전쟁은 정당하다는 일본인들의 보편적인 역사 인식을 보여준다. 그건 그거고 이거는 이거라는 식. 그러니 뭔 과거사 사죄를 하겠음.
전후의 식량난을 미국의 원조물자로 극복했다는 이야기를 한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점령군은 군용 통조림 5천톤을 방출하고 라라물자와 유니세프로부터 기증받은 탈지분유 등도 동원했다고 한다. 같은 해 가을부터는 탈지 분유를 수입하는 등 학교 급식을 전국으로 확대하기 위해 분투했다. 일본인의 대미감정이 호감으로 바뀐 데에는 이러한 원조의 영향이 컸다고 할 수 있다. - p.196
미국에 대한 피해의식과 더불어 부채의식도 함께 안고 있는 것이 오늘날 일본인들의 복잡한 마음이랄까. 하지만 우리가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할 부분이 있다. 트루먼 행정부의 소극적인 태도 속에서 패전 일본인들이 재빨리 기근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 이웃한 남한에서 대량의 식량을 수출한 덕분이기도 했다는 사실이다.
맥아더 입장에서는 남한보다 자신이 직접 통치하는 일본이 더 중요했고 남한의 미군정은 어차피 자기 부하들이 맡고 있다보니 명령 한마디면 충분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일본인들의 행복은 우리의 불행이었다. 미 군정의 마구잡이식 공출에 따른 물자 부족은 일제 말기를 능가했을 정도였다. 심지어 미 군정의 어떤 양반은 언론과 인터뷰에서 "조선인들은 미역만 먹어도 된다"라고 하여 불난 집에 부채질까지. 해방 직후에만 해도 미군에 우호적이었던 남한이 1년도 되지 않아 반미로 돌아서고 1946년 10월 1일 대구 봉기를 시작으로 전국에서 반미 시위와 함께 공산주의자들이 활개를 치게 된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 중에서도 최악의 사건이 우리가 잘 아는 제주 4.3 사건이었다. 일본인들이 진작에 패전의 혼란에서 벗어나 미국의 원조로 먹고 살만해졌을 때 우리는 최악의 기근에 직면해 있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신생 남한의 상황이 심각함을 뒤늦게 깨달은 트루먼 행정부는 공산주의에 넘어가지 않도록 일본보다 두발짝 늦게 경제 원조에 나서면서 미제 밀가루와 옥수수 가루같은 식량 원조를 받았지만 그 직후에는 한국전쟁이 폭발하는 비극까지 겪어야 했다.
일본인들도 이런 역사를 알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전쟁은 너희가 일으키고 벌은 우리가 받았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