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가 되자고 마음먹은 뒤부터 책을 '책'으로 읽을 수 없게 됐다. 독서라는 행위에 부담과 책임이 덧붙여진 기분이었다. 글의 흐름을, 이야기를, 종이의 여백을 그 자체로 음미하는 방법을 잊어버린 사람이 된 것이다. 책이 잔뜩 쌓인 방 안에서 어쩌지도 못하는 날들이 계속 되고 있었다.
그러다 츠즈키 쿄이치의 <권외편집자>를 집어들게 됐는데, 몇 장 읽지도 못하고 밤새 뒤척였다. 한 마디로 충격이었다. 표지가 주는 간결함에 끌려 구매한 책이었는데, 그 안에는 츠즈키 쿄이치의 담담하고도 강인한 40년 편집 인생이 담겨 있었다.
"일에는 배울 수 있는 영역과 배울 수 없는 영역이 있다. 기술은 배울 수 있지만 애초에 편집자에게 필요한 기술은 거의 없다. 그러니 책은 만들고 싶은 대로 자유롭게 만들면 된다."(p.31)
"편집에 '기술' 같은 것은 없기 때문이다", "독자층을 예상하지 마라", "절대 시장 조사 하지 마라"와 같이 홍보문구로 쓰인 말들은 사실 별 것 아닌 축에 속한다. (그동안 듣고 배워왔던 얘기들과 완전히 정반대의 이야기를 해 입을 다물지 못 했지만.) 내가 놀란 건, 책을 만드는 과정을 통해 "자신만의 세계를 선명하게 의식"하게 된 저자때문이었다. 저자는 말한다, 책을 만드는 데 필요한 기술은 거의 없으니 "책은 만들고 싶은 대로 자유롭게 만들면 된다"고. 그 다음은 "책을 한 권이라도 더 많이 만들어보는 일"뿐이다. 이 끝없는 순환 속에서 저자는 읽고 싶은 책을 만들 수 있었고, 더불어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다.
"알지도 못하는 누군가를 고려하지 말고 자신이 생각하는 '진짜'를 추구하라는 가르침을 통해 나는 진정한 편집자로서 첫발을 내딛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p.27)
물론 출판사의 적극적 지원 아래 기획을 밀어붙일 수 있었던 건, 단카이 세대의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그가 지낸 시대는 출판뿐만 아니라 문화계 전반의 부흥기였다. 편집의 다양한 시도와 실패가 가능했던 것도 (초반에는) 그가 잡지에 글을 싣는 편집자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시대의 혜택을 받으며 생활한 그의 이야기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대 '꼰대'의 것처럼 읽히지 않는다. 어째서 그럴까 고민한 결과, 혼자 내린 답은 다음과 같다.
1. 자랑하려고 쓴 글이 아니라서.
2. 부러워하라고 쓴 글이 아니라서.
3. 편집의 기술을 알려주려고 쓴 글이 아니라서.
이 글을 읽고 "그래, 이거야!" 소리치며 수첩을 펴고 편집의 규칙을 적는 독자는 없을 것이다. 독자마다 다르겠지만, 나의 경우엔 무언가를 배우기 위해서가 아닌 일관된 태도로 편집자 생활을 해온 저자의 삶을 보기 위해서 읽었다. 그런 생각에 그치자 다음과 같은 이유가 하나 더 생겨났다.
4. 책을 통해 주류 바깥에 있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려 했던 노력 때문에.
세련되고 부유한 일본의 모습을 담은 <JAPANESE STYLE>을 접한 그는 일본의 젊은이들이 진짜로 살고 지내는 공간을 보여주기로 마음먹는다. 아마추어용 카메라를 사고 두 발로 직접 뛰어어다닌 끝에 <TOKYO STYLE>을 낸다. "자신만의 진정한 삶을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엮어내고 싶다는 자신의 바람을, 그는 책을 통해 이뤄나갔다. "죽을 때까지 핑크 플로이드를 들으며 만족하는 패자 그룹"을 존경한다는 그의 말이 허투루 들리지 않는 건, 바로 이 때문이다.
"인터뷰를 할 때 '좋아하는 책만 만들 수 있어서 좋겠네요'라는 말을 자주 듣지만, 사실을 말하자면 좋아해서 만드는 것이 아니고 아무도 하려고 하지 않으니까 만들 수밖에 없는 것일 뿐이다." (p.129)
아직 예비 편집자라 그런지, 공부하다보면 취직에 대한 불안이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밀려온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나는 불안한 내게 자주 묻는다. '나는 어떤 책을 재미있게 읽었나?' '앞으로 어떤 책을 읽고 싶은가' 그리고 그 끝에는 '어떤 편집자가 되고 싶은가'라는 질문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진짜 중요한 건 그런 거다. 좋은 출판사, 좋은 원고가 아니라 위의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책을 만드는 것. 그러기 위해 필요한 건 "호기심과 아이디어와 추진할 에너지"뿐이다.
마지막으로, 출판에 대한 암울한 전망을 시원하게 날려버리고 싶은 사람들에게 이 책을 권하며, 다음의 문단을 함께 읽고 싶다. 사람들이 책을 읽지 않는다고 한탄하기에 앞서 고민해볼 문제가, 스스로를 '권외편집자'로 지칭한 이유가 여기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언어에 대한 현대인의 감성은 옛날 사람에 비해 결코 둔해지지 않았다. 둔해지기는커녕 인터넷이나 휴대전화의 발달로 모든 사람이 이렇게 글을 열심히 쓰는 시대는 이제까지 없었다. '시인들의 문단' 바깥쪽이야말로 전율하게 하는 언어가 지천에 널려 있는 것이다."(p.1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