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과도기적 인간

역시 호언장담은 하는 게 아니다. 지난주에 한 고마운 이웃님의 격려 넘치는 댓글을 보고 주중에 또 다른 글을 쓸 수 있을 거라 자신했지만, 웬걸. 결국 ‘1주 2회 연재’는 성사되지 못했고, 그 다음 주도 다 넘어가는 지금에 와서야 부랴부랴 책상 앞에 앉아 글을 쓴다.

 

 

 

지난 번 글의 제목에 ‘기록’이라는 단어가 포함되어 있는데, 사실 이것은 반쯤 『기록하기로 했습니다.』의 영향이다. 왜 반쯤이냐면, ①당시 글을 쓸 때는 저 책을 사 두기만 하고 읽지는 않은 상황이어서, ②그럼에도 불구하고 잠깐 훑어본 책의 앞머리에서부터 확인할 수 있는, 저자의 성실히 기록하는 태도에 감명을 받아서. 독서기록을 업데이트하며 책의 제목을 다시 확인해 보니 제목으로 쓰인 문장 마지막에 마침표(.)가 있다. 마침표까지가 표제인 것이다. 어쩌면, 자주 계획대로 되지 않고 처음의 뜻이 흐지부지해지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짧은 기록이나마 성실하게 맺음을 하겠다는 태도를 권하는 저자의 결연함이 제목의 문장에 반영된 것은 아닐까. 그렇게 짐작해 본다.

    

 

 일기 쓰기야말로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이르게 시작할 수 있는 날입니다. 어제를 되돌려 살 수는 없으니, 그저 오늘부터 기록해나가면 돼요. (p. 31)

 

‘목수는 연장 탓을 하지 않는다’는 말은, 옛말이 으레 그렇듯 일정 부분 사실을 반영한다(‘100% 사실’이라고 표현하지 않은 것을 유의하자). 나는 실존적으로든 비유적으로든 목수가 아닌 관계로 연장 탓부터 하고 보는 사람이다. 무슨 말이냐면, 책에서 언급한 5년 일기의 필요성을 절절히 공감하면서도(‘맞아, 그런 기록이 있다면 미래의 나에게 정말 소중할 것 같아!’), 작가가 추천한 구체적인 아이템이 갖추어지기 전까지는 쓸 생각 자체를 머릿속에서 차단했다는 뜻이다(‘그래도 형식도 없이 5년 일기를 시작하기는 좀 어렵지 않을까?’). 그런 고로 지금 쓰고 있는 5년 일기는 2021년 3월 하순 경부터 시작한다.

 

여하튼 ‘내 기록’이 이전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많아지다 보니, 남에게 보여도 괜찮은 기록과 그렇지 않은 기록을 구분하게 된다. 후자의 기록에 담긴 내용이 음습하고 반사회적이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나에게도 나만의 심리적인 방 하나는 있어야 하지 않겠나 싶어서.

  

  

일상적인 기록의 가치는 시쳇말로 ‘요즘 SNS에서 난리 난(=알라딘 서재의 이웃들 사이에서 근자에 자주 언급되는)’ 작가인 이주윤의 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 모두, 나이를 먹을 만치 먹었을 테니 다른 사람들은 내 고민에 큰 관심이 없다는 실상을 이미 잘 알고 계실 것으로 사료된다. 그러니 친구를 붙잡고서 인생의 고단함을 털어놓는 쓸데없는 과정은 과감히 생략하고 일기에다 한풀이를 해보시기를 권한다.

한 줄도 좋고, 열 줄도 좋고, 오조 오억 줄도 좋다. ‘부담 없이 일기를 쓴다면 쓸거리가 넘쳐난다’에 내 손목과 내 아이패드 프로와 애플 펜슬을 건다. 왜냐하면 아까도 말했다시피 살다 보면 거의 매일, 하루에도 두세 번씩 힘든 일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팔리는 작가가 되겠어, 계속 쓰는 삶을 위해』, p. 124-125)

 

 

 

책은 짧은 에세이니까 금세 읽을 수 있었고, 읽고 난 소감은 뭐랄까, 일 때문에 처음 만난 사람이랑 회식 자리에서 어쩌다 2차까지 같이 남아 별 말 다 듣게 되는 것 같은 기분을 간만에 느꼈달까(지금은 회사에서도 5인 이상 집합금지 덕분에 회식 안 한다). 요즘 출판 트렌드에서는 이 정도로 자기를 까발려도(?) 허용이 되는구나 싶다가도, 편집자랑 출판사가 사전에 손을 봤으니까 독자들이 이 정도까지 읽을 수 있는 거겠지, 라는 생각도 들고. 부정적이지는 않은 흥미로운 독서 경험이었다. 이 책을 읽고 작가의 다른 책에도 관심이 생겨 서점에서 저자의 나머지 책을 모두 샀다, 는 것이 ‘글값’에 상응하는 바람직한 결말이겠으나,

    

 

 

사실은 이전에 전자책으로 사 둔 『오빠를 위한 최소한의 맞춤법』을 먼저 읽었다. 맞춤법 책을 이렇게나 차지게 쓸 수 있다니, 감탄하며 읽었지만 사실을 하나 뜬금없이 고백하자면 나는 이 책의 ‘주요 독자’가 아니었다.

 

나는 사실 –그런 직업이 있다면- ‘문법 경찰’을 하고도 남았을 사람이다. 사람은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한다고 했던가, 한글 맞춤법을 오래 공부하다 보니 맞춤법을 안(못) 지키는 사례들이 아주 거슬렸다. 문법 경찰을 사임(?)한 이유는 두 가지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재수 없어 해서(나는 타인의 평가를 많이 의식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문법 단속’에 걸리면 사실 나도 다 피해나갈 수 없어서(이럴 때 동종/유사업계 사람들이 자주 쓰는 레퍼토리: “국립국어원 원장님도 띄어쓰기 다 모른대요!”). 

 

각설하고, 작가의 차진 맞춤법 설명에 감탄하면서도 한편으로 머릿속에 계속 맴도는 하나의 키워드(=딴생각)가 있었으니, 바로 ‘주 독자의 역설(또는 목적의 역설)’이다. 읽으면서 글이나 말은 읽거나 듣는 사람을 고려하지 않으면 발화가 의도한 목적을 달성하기 어렵다. 그런데 어떤 책은 주 독자를 확실히 고려했는데도 주 독자로 상정한 이들이 읽지 않는다. 나는 감히 이야기하건대 그건 작가의 문제가 아닌, ‘아무 생각 없이도 잘들 살아가는’ 예상 독자의 문제다. 세상에는 책 안 읽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으니까. 마치 페미니즘 도서는 한 글자도 보지 않으면서 양성의 평등, 성별 간 화해 어쩌고 나불대는 남자들처럼. 어떤 식으로 알려줘도 알아먹을 생각을 안(못) 하는 ‘오빠’들에게 ‘최소한의 맞춤법’을 주입시키겠다는 것이 책의 목적인데, 과연 그 ‘오빠들’ 중 이 책을 제대로 읽은 사람은 얼마나 될까? 교육은 ‘인간은 바뀔 수 있다’는 가능성을 대전제로 해야만 이루어질 수 있고, 어떤 독서는 교육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래도 한 명의 오빠가 이 책으로 구원받는 게, 공리주의적으로 보았을 때 한국 사회의 엔트로피 감소에 조금이라도 기여하는 바가 있겠지? 다시 한 번 이야기하지만 적어도 이 책의 작가는 잘못한 것이 없다.

    

 

 

 

이전에 알라딘 북펀딩으로 받아본 『수화 배우는 만화』를 작년에 읽다 중도에 놓았던 적이 있어서, 다시 읽기를 시도했고 마무리를 지었다. 배움을 통해 무엇을 하겠다는 뚜렷한 목적의식 없이 수어를 배우기 시작한 작가의 경험을 그린 일상만화인데, 가볍게 보는 중간에도 성찰하게 되는 지점이 많았다. 하긴, 나의 일이 아니라고 ‘가볍게’ 볼 수 있는 남의 일은 없다. 작가가 흔치 않은 됨됨이를 지닌 신실한 사람이라 생각했다. 이 책을 읽는 중에 시선을 돌린 현실에서는 장애인들이 투쟁하고 있었다. 나는 그 투쟁에 시혜와 연민의 무게 없이 온전히 연대할 수 있을까.

    

 

 

 

 

『새로 쓴 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은 초판이 2008년에 나왔고 2012년에 개정한 저자의 ‘출세작’을 전면 개정한 『자본론』 입문서다. 나는 이제 자기 객관화를 대학생 때보다는 잘 한다. 이 책을 쉽게 읽고 주요 논지를 이해한 건 사실이지만, 『자본론』 원전의 문으로 곧장 돌격할 정도의 지적 수준을 담보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책에서 저자는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평균 수준의 상식과 이해도’를 가진 학생들과 강사가 강의에서 만나는 형식을 빌려 내용을 서술하는데, 그 서술 방식이 내 생각을 엉뚱한 곳으로 데려다 놓았다. 

 

강의의 형식을 차용한 것이지 실제 강의록을 바탕에 둔 것이 아니기에 강사의 말이든 학생의 말이든 저자의 목적의식을 부각하기 위해서는 결국 저자가 ‘계획한 대로’ 서술의 흐름이 흘러가야 한다. 강의 중간에 학생들이 내놓는 반론도, 허를 찌르는 듯한 돌발성 질문도 사실은 예측 범위 내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가. 자본론을 처음 접하는 학생인 것처럼 캐릭터를 표현했지만 왜 내 눈에는 운동권 학생처럼 보였을까. 뭐 눈엔 뭐만 보인다고, 그건 아마도 내가 과거에 꿘이었기 때문이겠지?

    

 미국이 일으키는 숱한 전쟁도 따지고 보면 결국에는 돈벌이를 위한 것이잖아요. 군수 자본의 욕망 탓에 전쟁까지 나고….

 

이게 여러 ‘학생’ 중 한 명의 말이고, 말만 놓고 보면 지극히 당연한 말인데, 나는 왜 이렇게 이 말이 꿘들이 애용하는 레퍼토리의 하나처럼 보일까 궁금했던 것이다. 나빴다는 것이 절대 아니다! 회사에서든 뉴스에서든 가는 데마다 부동산 얘기하고 주식 얘기 하는 데에 넌더리가 나서 그랬는지, 이런 ‘꿘들의 대화’가 과거의 흥취를 불러일으키는 신선한 맛이 있었다. ‘이거 완전 NL 아니냐고 ㅋㅋㅋ’ 혼자서 막 이러면서 읽고.

 

 

그래도 오늘은 일기까지 써도 2주 전보다 30분 정도는 일찍 자겠다. 이번 주말에는 도서관에서 빌린 책들을 마저 읽고 새로 찜해 둔 책들 빌려 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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