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 외계인, 낯선 장치와 용어가 SF의 본질이 아니다.
SF가 그려야 할 우주란 지구 밖의 공간이 아니라
우리의 편협함과 정상 이데올로기 바깥이어야만 한다.
그런데 이 동화를 보자.
'정상 가족' 이데올로기에 이렇게 집착할 수가 없다.
소수자인 얀이 지구인의 '가족'으로 받아들여지기 위해
눈물겹게 고군분투한다.
그뿐인가.
안키노스인인 얀은 부모를 잃고 '불행'해졌다.
플라이언 어린이들의 민폐를 부모가 대신 사과한다.
어째서 지구 밖에도 이분법적 성별이 존재하며
그들 슬하의 '자녀'로 구성된 '가족'이라는 집단이 존재하는가.
왜 외계의 어린 존재조차 부모의 양육과 통제 하에 놓여야 하는가.
고작 두 달 먼저 태어난 얀은 왜 '언니'가 되어야만 하는가.
우주로 뻗어간 정상 이데올로기와 한국식 병폐의 나이 주의는
단지 상상력 부족의 산물이 아니다.
지구 밖을 꿈꾸며 읽어야 할 SF에서 왜 우주로 확장된 지구를,
블랙홀처럼 우주를 삼켜 버린 지구를 만나야 하는가.
주인공 미소는 왜 이리도 오만하고 까칠한가.
물론 현실에 그런 인물은 얼마든지 있다.
하지만 뒤집어 보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재현'은 완전한 실패다.
그런 인물이 개과천선하는 과정이 중심 서사가 됨으로써
소수자 얀은 서사의 주체가 되지 못한 채 바깥으로 밀려나
철저히 대상화되며 온통 미소의 개과천선 과정에 소비될 뿐이다.
지구에서도 미소 앞에서 납작 엎드리고 설설 기는 얀은
고향 행성에 가서도 미소 앞에서 연신 저자세일 뿐 아니라
위험한 희생을 감행해 자신의 '쓸모'를 입증한다.
지구 밖 행성들이 지구와 다를 바 없이 지구에 수렴하듯
얀도 고향 행성에 남는 대신 지구로 돌아와
미소의 진정한 '언니'가 됨으로써 '정상 가족'에 합류하는 결말은
우리의 편협함과 정상성 집착이 해체되기는커녕
우주를 무대로 재현되었다는 점에서 매우 회의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