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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속에 눈썹을 두고 왔어 

찾으러 갈까

 

박연준의 시 <침대> 부분. 도발적인 시상 포착이 뛰어난 시인, 시인다운 시다. "심장이 몸 밖으로 나와 저 혼자 툭, / 떨어질 때가 있다" 시집 『베누스 푸디카』에서 발견한 이 시의 첫 부분도 쎄다. 한때 자연방목 꽃사슴 목장을 자주 오갔다. 가파른 산을 낀 22만 평 넘는 목장에는 수백 마리 꽃사슴이 자라고 있다(고 했다). 가까이 그리고 먼발치에서도 그들을 만나기란 쉽지 않았다. 100% 자연방목은 아니라, 동한기 등 야생 먹이가 귀할 때는 사료를 제공한다. 의존성이 생겨 급이할 때가 있다. 사슴들은 그런 관리자에게는 경계를 늦춘다. 하지만 낯선 이들에겐 곁은 물론 한두 끼 굶을지언정 급이 장소에 나타나지 않는다고 했다. 


업무상 사진이 필요했다. 지붕이 뚫린 차량 밖으로 몸을 내밀고 최대한 서행하면서 촬영을 시도했다. 그렇게 100미터쯤 전방 들판에 노니는 사슴들을 만났다. 찰칵!, 순간 셔터음을 들은 것처럼, 사슴들은 숲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스포츠 모드라야 했어) 이어진 컷들은 피사체가 흔들려 쓸 수가 없었다. 그렇게 200여미터를 달리던 사슴들, 말 그대로 '사슴처럼' 달리던 사슴들이 산기슭에서 문득 멈춰 선다. 그리고 뒤를 돌아본다. 차알~칵, 그렇게 필요한 사진 한 장을 ‘세이브’했다. "선생님, 미안해요. 미리 말씀드렸어야 하는데." 운전석 생산자가 들려준 얘기다. "녀석들은 무섭게 달리다가 잠시 멈춰요. 그리고 뒤를 돌아봐요. 바로 그 순간 녀석들은 총을 맞아요." 사냥꾼이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이란다. 노련한 사냥꾼은 바로 그 순간을 느긋하게 기다린다, 했다.

들판을 가로지르는 노루나 고라니들을 곧잘, 그렇게 만났다. 하지만 사슴(꽃사슴)은 교과서(시)에서 먼저 만났다. 분명하다.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은 왜 달리기를 멈추고 잠시 돌아보는 것일까? 그렇게 하게 하는 그것은 무엇일까? 둘 중 하나이거나 둘 모두라고 생각했다. 남겨두고 떠나야 하는 달콤한 먹을거리(풀들), '내가 왜 달려야(에너지 낭비) 하지, 위험은 사라졌나 확인하려고. 하지만 '무엇'은 설명이 가능하지만 '왜'는 왜 그런지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이런 해석에 필자처럼 사슴을 국어 교과서에 먼저 만난 분들의 아쉬움 없지 않으리라.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 내고는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 그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데 산을 바라본다'가 더, '무척 높은 족속에게'는 걸맞다. 사슴들은 늘 그렇게 바라보아야만 한다. 사물이나 추억에 대한 그리움. Homesickness 또는 Nostalgia', 향수(鄕愁) 때문이었을까? 면벽 선승처럼 씨름하는 화두쯤은 아니지만 사는 동안 문득 내겐 화두 한두 개 쯤으로 있다. 3~4월 다 자란 꽃사슴의 뿔은 떨어지는데, 녹각(鹿角)이다. 노천명은 '향기로운 관(冠)'으로 읽었다. 새로 자라난 뿔은 6~7월이면 가장 크고 화려하게 자라고, 이후부터 녹각이다. 이즈음 5월에서 6월 사이 말랑말랑한 뿔을 채취하는데, 새로 자란 사슴의 연한 뿔, 이것이 녹용(鹿茸)이다. 귀(耳) 위에 자란 풀(艸), 죽순(竹筍과 생리와 채취 시기에서 다를 바가 없다.

 

여기까지, 어린이들도 접근 가능, 이제부터는 잔혹한 동화다. 이즈음 먹을거리를 찾아 꽃사슴들은 속속 급이(급식) 장소에 도착한다. 먹을거리도 차츰 달콤하였다. 이번엔 그냥 돌아갈 수 없다. 수금할 시간. 마취총에 사슴들은 쓰러지고, 두꺼운 천막 위로 옮겨진다. 모든 생명에게 삶은 전쟁, 야전(野戰) 침대다. 생산자는 전기톱으로 사슴의 연한 뿔을 자른다. 피가 흐른다. 지혈을 한다. ’해주는‘. 동안 깨어나지 못한다. 후숙이 덜 된 바나나를 만지는 촉감, 최고급 녹용은 그렇게 생산된다. 인위이지만 내겐 카이로스. 다가가 촬영한다. 오얏꽃(자두나무의 )들의 낙화, 꽃비 내려 꽃사슴이 되었구나. 만져본다. 오얏꽃은 조선 왕실의 문양. 그들의 벛꽃이 아니다. 오얏꽃과 벚꽃, 꽃들의 한일전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작품 자체, 작품 '그' 자체만 보자 그랬다. 뉴크리시티즘(신비평)이다. 첫째, 작품 외적 요소는 배제하고 작품 자체만 볼 것. 둘째, (사람) 작가의 삶을 작품에 결부하는 것도 금물, 기타 등등.

김지하 시인이 어제 작고했다. 명복을 빈다. 젊은 날, 이후로도 오랫동안 우상이었던 선배 시인의 다른 견해(모습)에 입은 상처는 여전하다. 애증이다. 애증이니까 사람이었다. <사슴>의 노천명만 보자는데, 노천명의 <사슴>이 보인다. <타는 목마름으로>의 김지하만 보고 싶다. 안 된다. 나만 그러한가?

 

102. 샘물가의 사슴과 사자(이솝 우화, 천병희 원전 번역)

사슴이 목이 말라 샘물가에 갔다. 사슴은 물을 마신 뒤 물에 비친 제 그림자를 보았다. 사슴은 크고 여러 갈래로 뻗어 있는 제 뿔이 자랑스러웠지만, 가늘고 약한 제 다리들을 보고는 몹시 속이 상했다. 사슴이 여전히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사자가 나타나 사슴을 쫓기 시작했다. 사슴은 도망치기 시작해 사자를 크게 앞질렀다. 사슴의 힘은 다리에 있고, 사자의 힘은 심장에 있기 때문이다. 빈 들판에서는 사슴이 사자를 앞질러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무가 우거진 곳에 이르러 뿔이 나뭇가지에 엉기자 사슴은 더 이상 뛰지 못하고 잡혔다. 숨이 끊어지려는 순간 사슴이 중얼거렸다. “불쌍한 내 신세야! 내가 불신했던 다리는 나를 구해주었는데, 내가 믿었던 뿔이 나를 죽이는구나!

 

사슴은 초식동물. 살기 위해 뜯어야 한다. 

그런 삶을 위협하는 존재가 있다. 목은 그렇게 길어졌다. 

위험으로부터 벗어나려고 다리가 길어졌다. 

다리가 길어지는 동안, 멀어지는 지상의 풀들을 먹기 위해 ’모가지‘가 길어졌다. 

이상은 생태에서 추출한 꽃사슴들, 그들의 해부학적인 슬픔이다. 

우리가 혹은 내가 삶의 시간 어디쯤, 꿈속에 두고 온 것은 무엇일까? 

그런 줄 알면서도 놓지 못하는 그 무엇, 그것은 일종의 ○○은 아닐까?

김지하는 노쳔명은 그리고 나는?


꿈속에 눈썹을 두고 왔어

찾으러 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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