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단순노동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는데, 처음에는 몸이 적응하기 힘들었다. 어떤 일을 해도 힘든 건 마찬가지라서, 일장일단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냥 했다. 몸을 쓰면서 일하다 보니 아프지 않은 곳이 없더라. 심지어 손가락이 부어서 잘 굽어지지 않고, 젓가락질이 힘든 적도 있다. 그것도 며칠 지나면 그나마 적응되어 그냥 힘들다고 하면서 일하게 되더라는. 하지만 그런 일의 장점도 나름 있었다. 밤새 잠이 안 와서 짜증 났던 순간이 많았는데, 잠은 잘 오더라. 저녁 먹고 나면 초저녁부터 잠이 슬슬 온다. 엄마가 매일 저녁 일일 드라마를 보고 일찍 잠드실 때 왜 그런가 했는데, 이제야 좀 이해가 된다. 종일 종종거리며 집안일 하다가 몸이 쉬는 시간이 되니 잠이 오는 거다. 근데 잠이 일찍 온다고 다 좋은 건 또 아니었다. 책을 못 읽었다. 책 펴놓고 몇 분 지나면 고개가 꾸벅꾸벅 쏟아진다. 애들한테 공부하라고 하면 교재 펴놓고 바로 잠들어버리는 걸, 이제 뭐라고 하면 안 될 것 같다는 반성도 해 본다.
작년 말에 집에 있는 책을 200권 정도 기증에 보냈다. 그중 절반 이상은 세계문학이었고, 나머지는 베스트셀러 위주였다. 읽은 책보다 안 읽은 책이 훨씬 많아서 죄책감에 시달리기도 했지만, 그래, 아무리 오랜 시간 내 책장에 모셔놔도 앞으로도 안 읽을 것 같다는 확신에 미련 살짝 얹어서 보냈다. 어딘가에서 좋은 의미로 쓰일 것이라고 위안 삼으면서 말이다. 그래도 남아있는 죄책감은 어쩔 수가 없어서, 덜 미안해지고 싶어서 펼쳐 든 책이 조경국의 『책, 읽는 재미 말고 』이다. 제목부터 죄책감 덜어주지 않나? ^^ 표지의 한 문장처럼, ‘솔직히 다 읽으려고 사는 건 아니잖아요…’ 김영하 작가의 ‘책은, 읽을 책을 사는 게 아니라, 산 책 중에 읽는 거’라는 말과 함께 큰 위로가 된다. 진짜.
『책, 읽는 재미 말고』의 저자는, 자기가 이 책을 쓴 단 하나의 목적은, 책방으로 사람들을 이끌어 책을 사게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 읽지 않아도 사서 집에 쟁여 놓고 싶게 하는 많은 재미를 알려주고 싶었다고. 사장님(헌책방 운영하신다고 함), 이 책이 아니어도, 정말 읽지 않아도 사서 집에 쟁여 놓고 사는 독자(?)는 이제 어떡해야 하나요? 저자가 더 알려주지 않아도, 이미 책을 쟁여 놓는 습관은 오래전에 생겨버렸고, 앞으로도 쉽게 놓지 못할 버릇인 것 같다. 가끔 한 번씩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뜨끔한 마음이 들면 또 한 번씩 기증에 보내기는 하겠지만, 읽지 못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사게 되는 이 몹쓸 습관은 어찌해야 할꼬. 어쨌든, 반복적으로 하는 반성에도 불구하고, 이런저런 이유로 책을 사야 하는 이유는 좀 들어봐야 하지 않을까?
이 책의 목차만 봐도 이유가 공감되긴 하는데, 그중 몇 가지만 봐도 괜히 흐뭇해진다. 특히 ‘이 빠진 시리즈 채워 넣는 재미’는 놓칠 수 없다. 내가 그 시리즈를 더는 읽지 않기로 마음먹지 않는 이상, 포기할 수 없다. ‘책 선물하는 재미’는 진짜 누군가에게 선물하면서, 내 돈 쓰고 기분 좋아지는 일이어서 행복했는데, 지금은 책을 선물하지 않는다. 처음에 뭘 모를 때, 내가 읽은 책이 너무 재미있어서 받는 사람도 당연히 좋아할 거란 착각을 하기 전까지는 종종 책을 선물했다. 하지만 받아보니 알겠다. 아무리 좋은 책도, 재밌는 책도, 내 취향에 맞지 않으면 받아도 미안한 선물이 된다. 꼭 책을 주고 싶다면, 차라리 받고 싶은 책을 골라서 말해 달라고 하는 게 서로에게 편하다. ‘책싸개 하는 재미’는 좀 부지런해야 계속할 수 있는 습관이 아닐까 싶다. 한때는 내 책을 소중히 여기겠다고 비닐 커버를 종종 씌우기도 했는데, 이것도 몇 번 하니 귀찮더라. 정말 애서가가 아니라면, 이 책에 애정이 없다면 계속하기 힘든 책사랑이 아닐까. ‘영화 속 책을 찾는 재미’는 가끔 따라 하기도 한다. 영화나 책에서 소개된, 언급된 책이 궁금해서 찾아보곤 한다. 다 읽지 못할 걸 알면서도, 목록이 늘어나는 게 부담스럽기도 하지만, 혹시 알아? 어느 날 문득 그 책에 스르륵 손이 가게 될지도. ‘망가진 책 고치는 재미’는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에 종종 하던 습관이다. 가장 흔한 건 찢어지거나 쩍벌이 책. 찢어진 책은 조심스럽게 가능하면 표시 덜 나게 붙여놓곤 했고, 쩍벌이 책은 목공풀로 섬세하게 발라서 뜯어지지 않게 만들어 놓고 반납하곤 했다. 시간이 남아돌아서가 아니라, 내가 빌린 책에 일정 페이지가 없다면, 찢어져서 문장이 잘려 나갔다면 화가 날 것 같아서. 그 외에도 책을 좋아하고 쟁여두고 싶은 이유를 많이 언급해주었는데, 책갈피나 사인본 수집하는 재미는 내가 아예 애정이 없는 부분이고, 필사는 게으름과 악필로 시도하지 않았고, 책 속 메모를 발견하면서 공감했던 경우는 거의 없고 낙서 때문에 화가 난 적이 많았고, 오탈자 찾아내는 재미도 없고 오히려 다른 독자보다 오탈자 잘 못 보는 인간이어서 많이 공감하지 못했다.

그래도 샀다. 200여 권의 책을 기증 보내고 새해가 시작하자마자 또 샀다. 물론, 못 읽었다. 책장에 꽂아두고 배시시 웃기만 했다. 이 녀석들이 웃음이라도 주니 다행인가 싶어서 혼자 당당했다. 『책, 읽는 재미 말고』의 저자가 언급한 이유 중의 하나로, ‘이 바진 시리즈 채워 넣는 재미’로 차곡차곡 채우는 책이 있다. 그럼 이 시리즈를 왜 사기 시작했나 스스로 물어봤는데, 다른 이유는 없었다. 예뻐서 샀다. 녹색광선 출판사의 책이다. 처음에는, 예쁘기도 했지만 읽어보려고 산 거였다. 하지만 당연히 읽지 못했고, 가지고 있는 이 시리즈 중에서 완독한 것은 『셰리』 한 권이다. 생각보다 재미있었고, 이런 사랑이 가능하다는 것을 참 오랜만에 느껴본 것 같다. 디자인이 예쁘기만 하고 재미는 그에 미치지 못할 거라는 생각도 하긴 했는데, 『셰리』 읽고 나서 다른 책도 서둘러서 읽고 싶어졌다. 예쁜 외모만큼이나 내용도 아주 즐겁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대가 생긴다. 다 읽었다고 해서 이 책을 쉽게 기증이나 다른 경로로 내보낼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래서 나머지, 이 빠진 시리즈를 채워 넣어야 할 의무(?)가 생긴다. 이 정도면 책을 사야 할 이유가 분명한 거지? 헤헤

그동안 문학과지성사 출판사의 ‘소설 보다’ 시리즈를 꾸준히 사긴 했으나, 띄엄띄엄 샀다. 그때그때 기분이 내켜서 읽어보고 싶을 때만 샀는데, 2025년의 시리즈는 알림 신청해 놓고 다 샀다. 표지가 너무 예뻐서, 제목에 맞는 계절감을 책에서 느낄 수 있어서 말이다. 봄의 딸기, 여름의 포도, 가을의 무화과, 겨울의 감귤. 이렇게 썼지만, 표지의 각 과일이 내가 생각하는 게 맞는지 모르겠다. 요즘에는 제철 과일이 아니어도 일 년 내내 먹을 수 있는 시대가 되었지만, 그래도 과일이든 채소든, 제철이 가장 맛있긴 하지. 맛있는 과일 옆에 두고 있는 기분이 드는 것 같은? 그동안 이 시리즈는 짧게 읽는 재미가 좋아서 사곤 했는데, 2025년의 이 시리즈는 그 짧은 호흡으로 읽게 하는 재미도 있지만, 표지만 봐도 기분 좋아져서 더 펼쳐보고 싶게 한다. 올해는 어떤 표지로 나올지 궁금하고 기대되는데, 잠깐 읽고 덮어둘 게 아니라, 그래도 좀 오래 갖고 있고 싶어지게 하는 요소를, 그게 비록 표지만 예쁜 책으로 남게 되더라도 좀 잘 만들어주었으면 싶다. 책방으로 사람들을 이끌어 책을 사게 하고 싶다는 조경국 저자의 말처럼, 책이라는 게 읽는 것도 좋지만, 일단 사야 읽는 거 아닌가. 그러니 더 팔리는 책이 되게 하려는 애정을 출간된 책으로 보여주기를. 아마 2025의 시리즈는 2026년인 올해에 제대로 읽게 될 것 같다. 늘 그래왔듯이. ㅠㅠ

세계문학을 정리하려고 했던 이유 중의 하나는, 아무리 유명하고 좋은 책이라고 해도 내가 읽지 않고 있다는 거였다. 거기에 좀 짧은 분량에, 재밌게 세계문학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꾸준히 사서 모았던 게 문학동네의 ‘일러스트와 함께 읽는 세계 명작’ 시리즈다. 221*188mm 판형의 가로로 넓은 디자인에 삽화까지 담겨 있어서 좀 편하게 읽힌다. 최근에 출간된 시리즈는 153*224mm 판형의 세로로 긴 일반도서 사이즈인데, 아무래도 이야기의 분량이 좀 많아서 그런 게 아닐까 추측해본다. 아무튼 이 시리즈 한 권씩 읽으면서, 나도 미뤄두었던 세계문학, 고전 읽는 독자가 되었고, 이 책들이 왜 꾸준히 사랑받고 추천되는지 알 것 같다. 그래, 역시 책은 읽어야 맛이지. 아무리 좋은 책, 여기저기서 추천되는 책이라고 해도 내가 확인하지 못하면 그 재미와 의미를 영원히 알 수 없으니까. 이 시리즈도 ‘이 빠진 시리즈 채워 넣는 재미’로 이어질 것 같다. 아직은 읽은 목록보다 안 읽은 목록이 많다. 근데 이 시리즈로 『프랑켄슈타인』 읽어보려고 샀는데, 얼마 전에 넷플릭스에서 2025년 버전의 프랑켄슈타인을 봐버렸네. 재밌게 봤는데, 너무 미루지 않고 책으로 읽어볼 기회를 만들어야겠다. 괴물의 간절함이 아직도 귀에 생생하다. 나에게도 동반자를 만들어줘….

패트릭 멜로즈 소설 5부작은 절대 완독하지 못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지만, 절대 쉽게 정리해서 내보낼 책 목록에도 넣지 못하겠다. 처음 출간된 게 2018년이니까, 출간된 지 8년이 다 되었는데, 그래도 한 번쯤은 꼭 읽고 싶다는 간절함이 더 커서 말이다. 1권 읽다가 말고, 또 몇 페이지 읽다가 멈추고, 어느 장면에서는 잔인해서 그만 덮고. 주인공 패트릭 멜로즈는 어린 시절에 아버지에게 끔찍한 학대와 상처를 받았다. 그 기억은 그의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치고, 그는 그 시절의 악몽을 극복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살아간다. 어린 시절의 학대로 그의 20대는 약물에 중독된 시간으로 보내고, 세월이 흘러 그가 두 아들의 아버지가 되었어도 그의 불안은 멈추지 않는다. 내가 이 아이들에게 좋은 아버지가 될 수 있을까? 아니, 나쁜 아버지가 되면 어떡하지 하는 불안이 끊이지 않는다. 저자의 자전적인 이야기라는 게 더 충격적이었는데, 저자 역시 자신의 불행했던 어린 시절을 털어놓는 건 힘들었다고 하고, 약물 중독에 자살 시도까지 했던 그가 이 책을 써야 했던 이유는 생존의 문제였다. 죽느냐, 아니면 이 책을 쓰느냐.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기 위해 이 책을 쓸 수밖에 없었다고. 다섯 살 때부터 40대에 이르기까지의 극적인 그의 인생을 다룬 이야기가 궁금하면서도, 다시 마음을 다잡고 읽어야 할 것 같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세상에 이런 부모가 있을 수 있는지, 분노하지 않으면서 읽어야 한다는 건 독자에게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하긴, 세상에 드러난 이런 사건들이 흔하게 들려오는 걸 보면, 이게 소설로 머물지 않을 이야기라는 건 이미 증명된 셈이다.
20대가 끝나가는 어느 날에, 지금 떠올려 보면 이런 철없는 말이 또 있을까 싶어질 정도인데, 친구랑 둘이 나누던 대화가 생각난다. 책방을 하자고, 커피도 팔고 간단한 음식도 파는 그런 책 카페를 하자고. 말은 쉬웠다. 우리는 모아둔 돈도 없었고, 대출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사람도 아니었다. 그저 보기 좋아서, 책이 쌓인 공간에 머물 수 있다는 단순한 생각에, 거의 매일 찾던 여러 카페에 손님으로 앉아있었을 뿐인데, 아무 대책도 준비도 없이 막연하게 쏟아낸 그 말이, 이렇게 부끄러울 수가 없다. 각자의 인생을 사느라 이런 말을 다시 떠올리지는 않았지만, 그 이후로 확실히 알았다. 현실을 너무 몰랐던 망언이었다고. 헌책방을 운영하는 조경국 저자는 책방지기에 대한 로망을 1년 차에 바로 깨졌다고 한다. 현장을 경험하기 전에는 다 알 수 없는 일이 책방에서도 똑같이 적용된다는 진리. ‘뭣이 중헌지도 모르고’ 덤벼든 작은 책방으로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으니…. 그래도 저처럼, 또 다른 많은 독자가, 다 읽지도 않을 책을 사고 있다는 건 이미 알고 계실 테니, 힘을 내요, 사장님. ^^
이제 나는 뭘 사야 하느냐면,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이야기를 들려줘요』를 사고 싶은데, 그러려면 앞서 출간된 또 다른 책 『올리브 키터리지』나 『내 이름은 루시바턴』이나 『버지스 형제』도 사야 할 것 같다. 다행히(?) 『에이미와 이저벨』은 갖고 있네.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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