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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자책] 심리정치 : 신자유주의의 통치술 [할인]
  • 한병철
  • 7,000원 (10%380)
  • 2015-03-02
  • : 107

 저자의 전작 <투명사회>를 읽지는 않았으며, 내가 이전에 읽은 책은 <피로사회>이다.

읽으면서 새로운 통찰에 많이 감탄했으며, 자기 자신을 소진하는 성과주체 개념은 인상적이었다.


이번 책에서도 저자의 주장은 일관된 것 같다.

푸코의 신자유주의 분석과 마르크스의 자본 분석을 이렇게 결합할 수도 있구나 생각하면서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푸코 이론에서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았던 자본 문제를 보여주는 것은

꼭 필요한 작업이었다. 푸코 이론에서 자기를 경영하는 경영가-주체와 자본의 무한 증식의 연결은

푸코 이론이 지니지 못했던 규범성을 제공해주는 듯 하다. 한마디로 저항 방향을 명확히 보여준다.


아직 다 읽지도 못한 책에 대해 유감이라 지적한 바는 

오히려 역자를 향한 것이다. 책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푸코의 용어를 한국에서 사용하는 푸코 번역어와

엇갈리게 사용한다는 것이다. 규율 권력의 조련Abrichtung 역시 그 뜻이 크게 변별적 차이를 낳는 것은

아니지만 훈련이라 말하는 것이 더 분명하게 규율 권력의 뜻을 드러낸다고 생각한다.


여기까지는 별 생각이 없었지만, 생정치에 관해서도 불만이 많다. 

푸코의 콜레주 드 프랑스 강의록이 출간된 것은 프랑스에서도 푸코 사후 13년 후인 1997년부터였다.

생명권력이라는 용어는 <성의 역사 1권 : 앎의 의지>에서도 등장하고 있으며, 이를 단순히 생권력이라

번역하는 경우는 대체로 적은 것 같다.


생명정치는 삶정치, 생정치, 생명관리정치 등 다양한 역어와 병행되어 왔다. 현재는 거의 일관되게

생명관리정치(한국에서 출판사 난장에서 나온 1978-79년 강의록 <생명관리정치의 탄생>), 또는 생명정치로

확정되어 가는 분위기이다. 


생정치에 고작 '명'이라는 단어가 빠져서 유감이라기 보다는, 푸코를 인용하면서 기존 푸코 번역관행을

따르지 않은 것이다. 이게 '번역권력'일수도 있겠지만, 혹시나 한병철의 저작을 읽고 푸코의 저작을 읽을

독자들에게 생정치와 생명정치 사이에 차이가 있는 것처럼 보일까 우려된다. 생정치는 生이라는 글자에

생명과 삶을 동시에 함의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지만 생정치라는 역어가 유발하는 효과는 마치 생정치가

생명을 보존하는 정치, 생명의 권리를 존중하는 정치로 오인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생명정치라는 평범한 역어 외에도 생명관리정치가 사용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생명은 관리의 대상으로 

보이는 것이지 휴머니즘의 관점, 인권의 관점에서 존중해야 할 대상이 아니다. 


 독자들이 알아서 당연히 파악할 수 있는 문제에 괜히 열을 낸 듯도 하다.

신자유주의 정치를 다시 심리정치로 파악하는 저자의 관점이 흥미롭기도 하며, 푸코가 신자유주의에서 보이려 했던

경쟁을 시장에 존속시키는 여러 인공적인 노력들과 환경 구성은 왜 배제되었을까라고도 생각해본다. 역으로 주체의

심리나 내면을 탐구하지 않았던 푸코가 놓쳤던 것은 무엇일까? 


 한병철의 장점은 이 시대의 부각되는 사회적 현상을 푸코나 마르크스, 들뢰즈, 니체 등 다양한 사상가들의

주장을 새롭게 배치시키는 것이다. <피로사회>에서 마치 푸코가 규율권력만 이 시대의 주된 권력으로 묘사한 듯 하여

불만이 많았다. 푸코의 저작들은 근대에 등장한 또 다른 정치, 생명정치나 신자유주의에 대한 분석으로 신자유주의적 

주체를 기업가적 주체로 묘사하며, 통치성의 최적화 및 효율화를 목표로 한 정치 형태의 이행을 분석한다. 

<피로사회>에서보다 사회적 분석이 더 부각된 <심리정치>는 푸코의 분석도 더 녹아들어 있기도 하다.

뭐 푸코와 분리시키더라도 그 자체로는 얇은 책이지만 내용은 알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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