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모가 신의주로 떠나지 못한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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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니 고모랑 어찌 해 볼 생각이 있어서 그 사람을 신의주에 못 가게 말린 것이 아니었다.
명성관에서 한달쯤 지난 뒤에, 한달 전에 보았던 몰골하고는 백팔십도 달라진 해골이 따로 없는 몰골이 되어서, 남원역으로 가자고 했다. 신의주로 떠난다는 것이었다. 다시는 조선으로 안 온다는 것이다.
아.. 그 말을 듣자 나는 안 된다고 그랬다. 가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어머니도 있고, 동생도 있고, 그리고 어디 있는지 모르는 언니도 찾고 여동생도 찾아야 하지 않느냐고 그랬다.
그 사람... 나를 가만히 쳐다보더니, "참 이 양반이.. 왜 내 인생을 자꾸 간섭하고 그러요" 한다. "나를 책임질라요, 처자식 있는 사람이 그럴 수 있소?" 그때 나는 아무 말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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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이후, 고모는 단 한 번도 신의주에 가지 않았다. 붙드는 고숙은 책임진다는 말도 한 적이 없다.
그런데 그렇게 두 분은 60년이 넘게 한 집에 살았다.
고숙은 처와 자식을 두고 집을 나왔고, 고모는 그렇게 평생 처녀 호적이면서 자식 하나 얻지 못했지만,
남원 땅의 최고의 금슬 좋은 부부로 살았다.
고숙은 그날 명성관에서 "나를 책임질라요"라는 고모의 말을 가슴에 새기셨는지.
한 맺힌 고모의 원망과 미움이 그대로 서려 있는 죽음이지만, 고모의 엄마의 주검을 자식 손에 편안하게 가실 수 있도록 유교적 절차와 형식을 다하여 정성스럽게 거두게 하였고,
다 죽어가는 고모의 언니 내외를 찾아서, 언니의 남편을 비명횡사하지 않도록 돌보면서 길바닥에서 죽지 않게 하였고. 그 언니는 마지막 생애를 고모와 한집에서 십여 년 살다가
결국은 나랑 한 방에서 주무시다가, 내 옆에서 잠자듯이 평온하게 가시게 하였고.
막내 여동생을 찾아 내서 운봉으로 시집 보내고, 아들 딸 다복하게 많이 나아서 잘 건사하게 하였다. 그 후손들이 아직도 지리산 자락 어디쯤에서 훈장님을 하고 계신다는 말도 있다.
그리고 팔순이 넘으신 고모 내외가 우리 아버지 장례를 온갖 정성을 다해 치러 주셨다.
그렇게 가실 분들은 가신 분들대로 뒤치다꺼리를 다 해 주셨고.
고모의 열도 넘는 조카들의 대소사 행사에 참석하시어 위엄이 넘치는 그래서 더욱 자리가 빛나게 되는 어르신의 면모를 다 보여 주셨다.
고모의 생애에 고숙은, 결코 손해나는 오지랖이 아니었다.
고숙의 생애에 고모는, 결코 손해나는 여인이 아니었다.
두 분의 만남은 곧 연리지이다. 둘로 태어나 하나가 된 나무, 나무님.
고전소설 중에 김시습의 이생규장전이 있다.
남녀의 인연으로는 삼생의 인연이 있단다. 전생, 이생, 후생의 인연. 그 삼생이 다 이루어졌을 때. 두 사람의 사랑이 완성된단다. 그래서 이생은 귀신이 되어 나타난 아내를 현처처럼 돌보았고, 그녀가 명부로 떠나자 그녀를 따라 떠나면서 마지막 후생의 사랑을 완성하려 했단다.
고모와 고숙은 아마도 전생에 자식을 많이 두었나 보다. 나도 그 자식 중에 한 명일 것이고.
배 아파 낳은 자식은 아니지만. 나는 우리 고모의 자식이다. 이렇게 거두고 거둔 자식들이 얼마나 될까. 그래서 아마도 이생에서는 자식이 없었나 보다.
고숙과의 금슬이 그 자리를 대신해 주었을 만큼 고숙의 사랑은 엄청났으니 말이다.
태어나야 할 자식들이 엄마 아빠를 시샘하여 잉태되지 않았으리라.
고모 고숙이여, 후생에서는 둘 만의 아이를 꼭 낳으셔서 후생의 평범하고 소박한 사랑 이루소서.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