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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악의 꽃
  • 샤를 보들레르
  • 9,900원 (10%550)
  • 2004-12-01
  • : 184

서평: 『악의 꽃』 샤를 보들레르 지음, 함유선 옮김 (밝은세상, 2004)


감정의 온도를 번역한 『악의 꽃』의 재탄생—여성의 감각으로 번역된 의식의 진화


샤를 보들레르의 『악의 꽃』은 서구 문학사에서 인간 감정의 극한을 탐사한 기념비적인 시집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함유선 번역의 『악의 꽃』은 이 고전적인 시집을 "다시 태어나게" 한다. 그녀의 언어는 단순한 의미의 옮김이 아니라, 보들레르의 차가운 미학을 생명의 리듬과 감정으로 재창조한 것이다. 이 번역은 보들레르가 구축한 '냉정'의 미학을 '감정의 적정 온도'를 탐색하는 의식의 진화로 변모시켰다.

차가움을 생명의 리듬으로 재배치하다


보들레르의 시는 언제나 냉정하다. 〈아름다움〉에서 "나는 차갑고, 대리석처럼 아름답다"는 선언은 예술가의 고독과 절대적 자의식을 드러낸다. 하지만 함유선의 번역은 이 '차가움'을 다른 온도로 변환하는데, 그녀에게 차가움은 고독의 표현이 아니라, 상처 입은 존재가 스스로를 보호하는 열의 역설, 곧 생존의 온도이다.

"나는 돌의 꿈처럼 아름다워라. 내 젖가슴은 물질처럼 침묵하는 영원한 사랑을 시인에게 불어넣기 위해 빚어진 것."


함유선은 냉정과 열정의 이분법을 해체하고, 감정이 스스로의 생명 리듬을 유지하는 '적정 온도'를 탐색한다. 그 변화는 문체의 미묘한 결에서 드러난다. 〈적(敵)〉에서 보들레르의 절망은 정적인 냉기 대신, "오 고통이여 고통이여! 시간은 생명을 좀먹고 우리가 흘린 피로 자라고 강해지는구나."처럼, '피로 자라'는 살아 있는 유기체로 번역된다. 시간은 소멸이 아닌 성장의 리듬을 포착하는 장(場)이 되는데 이것은 차가움이 아니라, 완전히 식지 않은 '냉각된 생명'의 잔열이다.

보들레르의 차가움이 '거리두기'의 미학이었다면, 함유선은 그 거리를 '감정의 구조'로 변형한다. 〈발코니〉에서 "밤은 두터운 벽처럼 깊어갔네"라는 문장은 감정의 억제가 아니라, 감정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밀도를 높인 공간적 완충지이다. 이 차가운 벽은 감정이 소멸했다는 표시가 아니라, 감정이 살아남기 위해 구축한 '감정의 생명 리듬'을 유지하는 온도 조절의 기술이 된다.

리듬과 촉각의 변형: 언어가 만지는 시


함유선 번역의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은 리듬의 흐름을 절단에서 파동으로 바꾼 점이다. 보들레르의 언어가 '차갑게 절제된 선'이라면, 그녀의 한국어는 '온도 있는 곡선'으로 그린다. 예를 들어, "그대는 번개처럼 나를 스쳤다. 한 줄기 번갯불—곧 이어 어둠!"에서 그녀는 '스침'과 '어둠' 사이에 미세한 여운을 남겨, 리듬을 느리게 하고 촉감을 살려낸다. 문장은 박자를 끊지 않고 심장의 박동처럼 파동으로 이어진다. 이는 곧 욕망의 진동을 의식의 자각으로 끌어올리는 작업과 연결됩니다. 〈춤추는 뱀〉의 “그대의 몸은 막대기 끝에서 춤추는 한 마리 뱀 같아.”은 단순한 유혹의 상징이 아니라, 육체의 에너지를 '감정의 정보'와 '의식의 자각'으로 변환시키는 생명력의 리듬이다. 〈머리타래〉 의 “네 머리카락 속에서 나는 바다를 본다.”는 구절은 관능이 아닌 기억의 파동이다. 머리카락은 단순한 신체가 아니라, 사랑과 상실의 데이터를 저장한 신경의 나선이다. E(에너지) → I(정보) → C(의식). 그녀의 번역은 이 곡선을 따라 움직인다. 욕망은 감정으로, 감정은 자각으로, 그리고 자각은 언어로 순환한다.


나아가, 그녀의 한국어는 촉각적입니다. 〈발코니〉의 ‘밤은 두터운 벽처럼 깊어갔네’ 두터운 벽"은 시각적 비유를 넘어 독자의 피부에 닿는 촉각적 공간이 된다. 보들레르가 이미지를 눈으로 관찰했다면, 함유선은 그것을 피부로 느끼게 한다. 그녀는 시의 리듬을 청각이나 시각이 아닌, 감정의 감각적 기억—신체의 언어—로 옮겨놓았다. 절단된 의미는 진동하는 감정으로, 고정된 시선은 흐르는 리듬으로 변하며, 그녀의 번역은 "언어가 만지는 시"로 진화한다.

죽음의 냄새와 생명의 향기 — 의식의 전환


〈시체〉는 보들레르의 시 중에서도 가장 잔혹하다.“태양은 이 썩은 것 위에 알맞게 익히려는 듯 내려 쪼이며 당신을 핥으며 파먹을 구더기에게 말하오.” 원문은 냉소와 혐오의 정점이다. 그러나 함유선은 이 장면을 ‘순환의 의식’으로 옮긴다. 썩음은 소멸이 아니라, 변형의 과정이다. 죽음은 생명의 또 다른 형태로 익어가는 과정이며, 그 안에서 사랑은 “그 모습과 본질을 간직한 채” 남는다. 이 번역은 단순한 해석이 아니다. 그녀는 죽음의 이미지를 생명과 의식의 연속성 속에 배치한다. 죽음조차 감정의 리듬 속에서 살아 있는 것이다.


여성의 시선, 감정의 윤리학

함유선의 번역은 '여성의 감각'을 통해 감정의 윤리적 재배열을 시도합니다. 〈빨간머리 여자거지에게〉에서 남성의 관음적 거리감이 개입된 보들레르의 시선은 "그대의 옷은 더럽고, 그러나 눈빛은 고귀하다"는 구절을 통해 뒤집힌다. 그녀는 타락 속에서도 존엄을 발견하고, 여인을 '대상'이 아닌 '존재'로 복원합니다. 타자를 응시하지 않고 타자와 공명하는 이 시선은, 만남을 욕망이 아닌 인식의 전류로 번역한다.


결론: 언어가 피어낸 의식의 꽃

보들레르의 『악의 꽃』이 인간의 타락과 지옥을 노래했다면, 함유선의 『악의 꽃』은 그 타락의 리듬 속에서 피어나는 의식의 꽃을 보여준다. 그녀는 죄를 정화하지 않는다. 대신 죄의 어둠을 자각의 빛으로 바꾼다.  이 번역은 '언어의 복제'가 아닌 '언어의 부활'이다. 보들레르가 인간의 타락에서 미를 발견했다면, 함유선은 그 미에서 인간의 진화를 발견한다. 『악의 꽃』은 이제 차갑지만 따뜻하고, 어둡지만 투명한 '의식의 꽃'으로 독자에게 말을 걸어온다. 함유선의 번역은 보들레르의 위대한 유산을 계승하면서도, 그 위에 새로운 생명의 리듬과 윤리적 깊이를 더한 기념비적인 재탄생이라 할 수 있다.


*함유선 번역에서  

‘오 고통이여 고통이여! 시간은 생명을 좀먹고

우리가 흘린 피로 자라고 강해지는구나’     <적>


‘오 인간이여 난 돌의 꿈처럼 아름다워라

내 젖가슴은 물질처럼 침묵하는 영원한 사랑을

시인에게 불어넣기위해 빚어진 것’     <아름다움>


‘그대 어느 깊은 하늘에서 왔는가, 심연에서 솟았는가

오 아름다움이여! 악마같고 숭고한 그대 눈길은

모든 것을 지배하되 아무 책임도 없네’   <아름다움에 바치는 찬가>


‘네 머리카락 속에서 나는 바다를 본다.’    <머리타래>


‘보고 싶어라 무정한 님이여 그리 아름다운 그대 육체에서

너울거리는 천처럼 살결이 반짝이는 것을!

박자 맞추어 걸어가는 그대는 막대기 끝에서 춤추는 한마리 뱀같아’

<춤추는 뱀>


‘태양은 이 썩은 것 위에 알맞게 익히려는 듯 내려 쪼이며

당신을 핥으며 파먹을 구더기에게 말하오

썩어 없어진 사랑이어도 그 모습과 본질은 간직했노라고’  <시체>


‘밤은 두터운 벽처럼 깊어갔네, 내 눈은 어둠속에서 그대 눈동자 알아보았네

그대 숨결을 마셨네, 오 달콤함!  오 독기여’   <발코니>


‘구멍난 네 해진 옷 사이로 가난과 아름다움이 보인다’

“그대의 옷은 더럽고, 그러나 눈빛은 고귀하다.’

<빨간머리 여자거지에게>


‘그대는 번개처럼 나를 스쳤다. 한 줄기 번갯불-

곧 이어 어둠!’      <지나가는 여인에게>


‘나의 사랑 그대는 알몸이었다,

내 마음 알기에 그대의 눈빛은 보석처럼 반짝인다’  <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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