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꽃이 아름답다.
  • 작별하지 않는다
  • 한강
  • 15,120원 (10%840)
  • 2021-09-09
  • : 967,573

어떤 역사적 비극을 써낸다는 것은 무엇일까?

역사적 비극은 과거의 일이다. '역사적'은 수많은 과거의 일 중에 후대에 의해서 의미 지워진 일이다. 쓴다는 것은 어떤 용도로 글로 남긴다는 말이다. 그 용도는 사실적 기록이든 재구성한 소설이든 함축적 운문이든 의미를 부여한 후대에 무엇인가를 전하려는 것이다.

그 무엇은 후대가 가졌던 의미를 강조한 것일 수도 있고, 그 의미가 잘못되었다고 폭로할 수도 있고, 무색에 가깝게 다른 써냄을 위한 참고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 무엇은 후대 행동의 밑거름이나 동인이 될 수 있다. 행동을 야기할 수도 있고, 사유에 침잠하거나 감정에 휩싸일 수 있다는 말이다.

"역사적 비극을 써낸다"를 해체해보았다. 이제 주체를 생각해볼 시간이다.

역사적 일 중에서도 비극을 쓸 때는 '쓰는 이'에 따라 그 쓴 것이 같은 의도라도 다양한 색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다양한 관점에서 '쓰는 이'를 나눌 수 있겠지만, 지금은 그 사건과 쓰는 이의 관계에 대해서 말해본다. 사건의 주역이냐 공모자이냐 피해자이냐 그들과 관계된 사람이냐 동시대의 사람이냐 그들의 후손이냐 그들의 후손과 동시대인이냐로 사건을 기점으로 X축의 반직선을 그어 '관계'의 Y축을 수직으로 질러 놓을 수 있다. 시간을 X축으로 하고 관계를 Y축으로 잡았다. 그 좌표평면에 작가 한강은 어디에 위치해 있을까? 시간은 70여 년이 지났다. 별도의 자료 조사를 해보지 않았지만, 한강 작가와 제주 4.3 사건은 어떤 관계가 있어 보이지 않는다. 비극적 부조리를 가지고 있는 이 나라의 한 국민이라는 교집합 안에 한강 작가도 우리도 있다고 생각한다. 시간과 관계의 좌표평면에서 특별함을 찾을 수 없으니 그 좌표계에 '작가' 임을 발휘할 수 있는 특수성이라는 Z축을 더해볼 수 있다. 특수성은 직업과 밀접하다. 작가, 기자, 학자, 사상가 등을 관계 지어보는 것이다. 그 특수성이라는 Z축은 시간의 X축도 관계의 Y축도 모두 초월할 수 있다. 또는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

그리고 그 특수성은 "역사적 비극을 써낸다"에서 전하려고 하는 것과도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얼마나 증폭할 수 있는지와도 관계될 것이고, 우리는 그것을 '영향력'이라고도 일컫는다.

작가 한강은 2016년 맨부커상 인터내셔널부문을 수상한 우리의 자랑스러운 작가이다. 그래서 한강 작가는 특수성의 Z축의 그 끝단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영향력이 매우 크다는 말이다. 전하려는 그 무엇을 - 우리는 의도라고도 말한다 - 마치 신처럼 마음만 먹으면 원하는 형태로 원하는 범위만큼 전달할 수 있다. 시대를 뛰어넘고 전 세계적인 범위로 그 '전달'을 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쓰는 이' 중 한 명이다는 말이다.

결국.

작가 한강이 <작별하지 않는다>를 써낸 '의도'가 어느 한 작가로서, 어느 독자들로 쉬이 다루기에는 작가의 '펜'의 필압이 굉장히 무겁다. 어디에든 각인시킬 수 있다는 말이고, 그 각인은 한국을 넘어 전 세계의 다양한 관점과 이해관계를 가진 많은 사람이 해석하고 이해하고 또 논 할 수 있기에 중차대한 책임이 따른다.

그래서인지, 흰 천이 바다에 내려앉는 책의 표지를 만지고 바라보고 한 장, 한 장을 넘길 때마다 진지했고, 신중했다. 긴장마저도 했다. 작별하지 않는다는 소재가 자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인류사에 남을 만큼 반인륜적인 학살의 비극적 역사인 제주 4.3 사건이기 때문에 책을 대하는 공기마저 무거웠다. 내 눈은 살얼음판 위를 걷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긴장하며 활자를 쫓았다. <소년이 온다> 를 읽었을 때처럼 어떤 의도를 파악할 기력마저도 모조리 잃고 주체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일까 봐 몹시 두려워 걱정하면서 쫓았다.

흰 눈이 계속 왔다.

친구 인선이 나왔고, 인선의 어머니로부터 소환되는 제주 4.3 사건의 이야기들이 단편적으로 나왔고, 앵무새 아마와 아미가 나왔다. 그리고 흰 눈이 폭설처럼 어둠과 함께 내리는 숲에서 어디인지 분간할 수 없는 것처럼 알 수 없는 인선의 친구인 화자가 나왔다.


어머니처럼 사건을 복기하며 자료를 모집하고 영화를 만들어내는 인선이 주인공이고 그 인선과 작별하고 싶지 않은 화자의 감정을 전하려는 것일까?

인선과 같은 무거움이 가득한 이들로부터 작별하려 했다 - 화자는 인선에게 동참하자고 했던 나무 프로젝트를 중단하려고 했다 - 인선의 사고와 그 사고의 여파로 죽음에 이른 아마로 인해 각성하고 다시 작별하지 않으려고 한 것일까?

숲에서 돌아가기에는 초로부터 얻을 빛이 부족한 그 자리에서 혼과 같은 인선과 함께하다 - 양자역학적 묘사에 잠시 놀랐다 - 혼이 사라지고 마치 이 세상을 떠나려다 다시 돌아온 것처럼 인선의 회복을 암시하는 것은 이제는 죽음을 통해 작별하지 않으려는 것일까?


<작별하지 않는다> 인선이 사고로 서울 병원에 있는 동안 물과 모이를 주지 않으면 죽게 될 앵무새 아마를 살리기 위해 제주로 날아간다. 화자는 폭설이 내려 목숨을 잃을 수도 있을 만큼 위험한 길을 헤쳐나갔지만, 앵무새 아마는 죽고 그 혼과 만난다. 그리고 이승과 저승의 경계에 있는 인선의 혼을 만나며 인선 어머니의 오빠와 동생을 제주 4.3 사건으로 잃은 이야기며 오빠를 찾으려는 과정에서 만난 또 다른 피해자인 인선의 아버지인 남편을 만난 이야기며 그 어머니가 모질고 처절하게 긴 세월 동안 사건의 진상과 유해를 찾으려는 노력을 듣는다.

그런데, <작별하지 않는다>의 화자는 그 모든 이야기를 듣는 '청자'로 그려질 뿐이다. 그래서 '청자'의 '작별하지 않는다'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그리고 그 의미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찾기 힘들다.

그 '작별하지 않는다'는 주체를 인선이나 4.3 사건의 피해자 또는 피해자 후손으로 보기에는 연관성이 책 내에서는 거의 다루어지지 않는 것 같다.

눈으로 훑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단단한 책 표지를 진땀 흘러 넘기며 한 장 한 장 무겁게 나아가던 나는 어느새 눈으로 활자를 흘려보내며 훑어 읽었는지 모른다.


마지막 한 장의 '작가의 말'에서 


"이것이 지극한 사랑에 대한 소설이기를 빈다" p329


을 바라보며 나는 더 혼란스러워하며 처음과는 다르게 책장을 덮는다. 애써 이해하고 싶지는 않다고 말하며.


  • 댓글쓰기
  • 좋아요
  • 공유하기
  • 찜하기
로그인 l PC버전 l 전체 메뉴 l 나의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