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a garland for his head

 

 

 

벌써 11월 말... 다사다난했던 2017년을 돌아보면서 올 한 해 동안 읽은 책들을 복기해보려 한다. 먼저 내가 꼽은 올해의 책은 미셸 파스투로의 《파랑의 역사》다. 개정판으로 나와서 완전 신간이라고 볼 수는 없겠지만 정말 정말 재미있었다. 이 책을 읽기 전에는 색채학이 존재하는지도 몰랐다. 팬톤에서 발표하는 올해의 색상 정도는 알았지만, 색 자체를 두고 고심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미셸 파스투로는 이 책에서 '파랑'이라는 색에 대한 의미, 상징이 시대에 따라 어떻게 바뀌어왔는지를 설명한다. 조금만 소개해본다면, 유럽에서 색에 대한 인식이 생길 무렵 파랑은 천대받는 색이었다. 그들 문화의 근간인 로마(빨강)에 대비되는 야만적인 켈트(파랑)의 색이었기 때문이다. 이때 푸른색을 아주 쓰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비록 존재하지만 이름을 부여받을만큼의 위치는 아니었고, 회화의 배경이나 목욕탕 타일 등에서는 찾아볼 수 있었다. 섬유산업의 발달과 함께 파랑의 위상도 조금씩 달라진다. 기사도 문학에서는 청기사가 등장하고, 프랑스 카페 왕조의 문장에도 파랑이 등장했으며 절정기에는 회화에서 성모의 옷 색깔로 표현되기에 이른다. 흑사병이 창궐하던 시기에는 검소함을 상징하는 검은색에 밀려 인기가 잠깐 사그러드는 듯했다. 그러나 독일 낭만주의 문학(대표적으로 《푸른 꽃》)과 함께 다시금 유행했고, 프랑스 혁명기를 거쳐 산업화 시대에 접어들면서 정상의 자리를 탈환한다. 그렇게 파랑은 우리 문화에서 젊음과 열정, 진보를 상징하는 색이 되었다. 염색공들 간 갈등이 야기된 이유도 재미있었는데 이 역시 종교적인 사고방식 때문이었다. 또 이 시기엔 색상이 진할수록 더 순수하다고 생각했고 분류도 그렇게 했다고 한다. 예를 들어, 진한 빨강과 진한 파랑은 진한 빨강과 연한 빨강보다 더 가깝다고 여겨졌다. 아무래도 기술이 좋지 않다보니, 진한 색을 뽑아내기 힘들어서 그 가치가 높아진 것이다.

 

 

 

 

 

 

다음으로 인상깊었던 책은 엔도 슈사쿠의 《침묵》이다. 마틴 스콜세지의 영화 《사일런스》를 먼저 보고 원작도 찾아 읽게 되었다. 정말 쉽게 읽히는 작품이지만 묵직한 사유와 정신세계가 담겨 있다. 신앙의 의미, 어떤 본질에 대한 내용으로 권력과 문화가 함께 흐른다. 이래저래 생각할 거리가 많았다. 일본은 서양 문화를 널리 받아들였으며 일찍이 예수회 소속의 포르투갈 가톨릭 사제들이 활동 중이었다. 막부의 통치정비에 따른 종교 탄압으로 종교인들은 하나 둘 추방당한다.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신부와 수사들이 고문 끝에 순교했으며 존경받던 신부는 배교했다는 소식이 포르투갈에 전해진다. 젊은 신부 셋은 일본으로 넘어가 사실을 확인하려 한다. 천신만고 끝에 도착한 일본은 예상한 것보다 상황이 더욱 좋지 않다. 신부들은 박해받는 와중 신앙을 지키는 신자들을 보며 충격을 받고, 관이 자신을 특별대우하자 죄책감을 느낀다. 누가 누구를 계몽하는가? 이는 믿음에 관한 문제를 넘어 선교의 방식과 그 목적도 생각해볼 거리를 남긴다. 특히 신부와 이노우에의 대화가 그러하다. 엔도 슈사쿠는 당대 일본을 포장하지도 않고, 오히려 이러한 고통 속에서 고뇌하는 신앙인과 침묵을 지키는 신에 대해 이야기한다. 종교소설이지만 오히려 신앙에 회의를 품게 하며, 동시에 그 신앙에 대해 고찰하게 하는 것이다. 좋은 작품이다. 마틴 스콜세지가 가톨릭 신자라 그런지 영화도 원작에 충실하다. 오리엔탈리즘이 아주 없지는 않지만 당시 바다를 건너던 선교사들의 마음을 생각해보면 이해도 되고... 출연한 일본 배우들도 연기를 잘 한다. 아무래도 이 영화의 흠은 주인공 셋이 아무리 봐도 포르투갈인처럼 생기지 않았다는데 있다. 리암 니슨은 누가 봐도 아이리쉬 아닌가? 앤드류 가필드나 아담 드라이버도 생김새가 도저히 남유럽계가 아니다... 그건 그렇고 영화를 본 지 한참 지났지만 호쿠사이의 우키요에를 떠올리게 하는 장면의 기억은 여전히 강렬하게 남아있다. 영화 첫 장면도 그렇고, 자연물을 이용한 공포통치가 일본 문화 특유의 야만성과 맞물린다. 내가 떠올린 그림은 가나가와 해변의 파도 연작이었다. 영화도, 소설도 모두 추천한다.

 

(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The_Great_Wave_off_Kanagawa#/media/File:Tsunami_by_hokusai_19th_century.jpg)

 

 

 

 

 

 
카뮈 읽기의 일환으로 극 작품도 한 권 보았다. 《칼리굴라.오해》. 〈칼리굴라〉는 철학적인 작품인데 뭐라 감상을 남기기엔 부족함이 있고, 〈오해〉를 짤막하게나마 소개한다. 《이방인》에서 뫼르소가 수감된 후, 침대 아래에서 웬 신문기사를 발견하지 않는가. 여관 주인이 손님을 죽이고 재물을 갈취했는데, 알고보니 아들이었더라. 가족을 놀라게 하려고 아들인 것을 숨기고 왔던 것이더라 하는 이야기를 극화한 것이다. 그런 것을 보면 참 삶이 뭔가 그런 생각도 드는데... 읽기를 미루고 또 미뤘던 《숄로호프 단편집》이 떠올랐다. 《전쟁과 평화》를 비롯한 러시아 문학에 관심을 두면서 《고요한 돈 강》을 알게되었다고, 언젠가 그런 글을 쓴 적이 있다. 우리나라에 번역된 버전은 동서문화사 역이고, 워낙 장편이다보니 도전할 마음이 쉬이 생기지 않았다. 그래서 차선책으로 사둔 것이 단편집이었는데 이 또한 구비만 하고 읽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무엇인지는 까마득한 채로 묵혀두다가, 《로쟈의 러시아 문학강의: 20세기》를 보고서 펼치게 되었다. 굉장히 좋은 해설집이었다. 19세기 러시아 문학보다는 20세기 문학에 더 관심이 있어서 그런지 더 재미있게 읽혔는데, 이 책에서 소개하는 작가들의 글을 읽거나 들어 알고 있었던 것도 큰 몫을 했다. 쟈마틴이나 플라토노프 같은 이들... 아무튼 평소 궁금했던 작품들에 대한 해설과 소개를 읽고 있으려니 어쩐지 이 책을 읽은 것만 같고 그런 것이다. 아무튼 숄로호프는 당대 문학 권력자였는데 정작 작품에서 이념적 노선은 분명하지 않다고 한다. 《고요한 돈 강》 관련 표절 시비도 있고... 그의 작품에서 약간 정형화되는 구석이 있다면, 부자 관계가 돌출된다는 점인데 〈인간의 운명〉이나 〈배냇점〉이 그러하다. 단편은 잘 읽지 않는데도 꽤 마음에 들었던 작품집이었다.

 

 

 

 

 

 

프랑스 문학으로 넘어와서, 《프루스트 효과》를 읽었는데 이 책도 재미있었다. 프루스트 전공자가 학술연구로 발표한 자료들을 엮었기 때문에 문장이 조금 딱딱하긴 하지만 충분히 흥미를 끈다. 먼저 '프루스트 효과'라는 표현부터가 우리가 흔히 아는 그 마들렌 에피소드를 가리키는 것인데, 이 책에서는 프루스트의 영향을 받은 작가들을 소개하면서 왜 프루스트의 작품이 20세기 최고의 소설로 꼽히게 되었는지를 살핀다. 들뢰즈나 바르트처럼 익히 알려진 프루스트 전문가들도 있지만 흥미로웠던 것은 사무엘 베케트와 아니 에르노의 시각이었다. 베케트 하면 떠오르는게 조이스의 딸 루시아의 얘긴데 방금 위키피디아를 찾아보고 놀랬다. 일단 베케트가 제임스 조이스의 조수로 잠깐 일했던 것은 유명하지 않은가. 두 사람이 짧게 데이트한 뒤 머지 않아 루시아가 정신분열증인가 진단을 받는다고 알고 있었다. 그런데 제임스 조이스 전기를 쓴 고든 보우커(James Joyce: A Biography by Gordon Bowker p.400)에 따르면, 사무엘 베케트가 루시아의 지속되는 구애를 거절한 이유가 다름아닌 천재적인 아빠의 대체를 찾는다는 걸 베케트가 눈치챘기 때문이라고 한다. 부녀간의 끈끈한 유대가 어쩌고 하는... 코멘트하기 뭣한 다른 이유도 있는데 루시아 조이스 영문 위키를 참고하시기 바란다. 아무튼 이 시기 베케트는 프랑스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고, 프루스트에 관한 산문집을 하나 쓴다. 《프루스트 효과》에서는 그 산문집, 〈프루스트〉를 소개하고 있다. 베케트는 프루스트 스타일로 글을 썼는데 인용 표시같은게 딱히 없어서 표절이네 어쩌네 하는 이야기가 상당히 흥미로웠다. 아니 에르노의 경우는 계급적 시각에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는데, 에르노가 노동 계급 출신이기 때문이다. 프루스트가 하녀에 대한 언급을 할 때 계급적 구분을 짓는다는 것인데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납득이 되는 풀이였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등장하는 하녀와는 다른, 옥타브 미르보의 《어느 하녀의 일기》를 떠올려보았다. 아니 에르노의 이야기는 프루스트 전문가 앙투안 콩파뇽이 강의를 부탁한데서 언급되는데, 콩파뇽의 책도 출간되었다. 줄리아 크리스테바 등 저명한 학자들이 참여했다.

 

(루시아 조이스 위키: https://en.wikipedia.org/wiki/Lucia_Joyce

 

 

 

 

 

 
페미니즘 관련 책들도 몇 권 읽었다. 대체로 개론서에 그친다는데서 어쩐지 부채의식도 생긴다. 그래도 읽은 책들을 소개하자면, 벨 훅스의《모두를 위한 페미니즘》과 《페미니스트 유토피아》가 있다. 벨 훅스의 책은 정말 좋았다. 페미니즘 운동이 학계에만 머무르면 안 된다는 사실을 밝혀주는데 상당히 공감했다. 학문은 기본적으로 이론을 정리하는 것이고, 그러려면 용어에 대한 정의를 내려야 한다. 그렇게 분석하다보면 사례를 분류하게 되고, 연구는 점점 전문화되어가는데 문외한의 입장에서는 뭔 소리람? 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다양한 분야에서 페미니즘적 사고를 부여하는 시도가 중요한 것 같다. 관심사에서 잊혀지지 않도록 말이다. 벨 훅스의 책에서 백인 중산층 여성들이 자신들이 원하던 바를 성취한 뒤, 계급적 이익을 위해 자매애를 저버리는 배신에 대한 폭로가 인상깊었다. 하지만 이 책에서 언급하는 우리의 주적은 따로 있다. 사회를 다스리는 가부장주의 논리다. 강자의 논리, 힘이 있으면 약자를 지배하고 괴롭혀도 된다는 생각. 그렇게 벨 훅스는 주구장창 가부장주의를 패기 때문에(...) 가부장주의를 떨쳐내야 할 이유에 대해 실감했다. 역시 반복학습이 최고다. 《페미니스트 유토피아》의 경우는 아주 추천할만한 책은 아니었지만 한 번쯤 읽어볼 만 했다. 꿈꾸는 사회에 대한 이야기인데 그걸 페미니즘에 관련해서 쓴 글을 엮은 거다. 인상깊었던 것은 처음에 실린, 리아 페이-베르퀴스트의 '여자가 여행을 할 때'라는 글이었다. 셰릴 스트레이드의 《와일드》를 떠올리게 하는 글. 셰릴 스트레이드가 홀로 PCT 종주를 하면서 가장 두려웠을 때는 자연 속에 고독할 때도, 한계에 부딪치는 신체적 고통이나 침잠하는 기억 속의 정신적 고뇌도 아니었다. 우연히 만난 낯선 남성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때였다. 캣콜링을 비롯하여 우리는 희롱을 희롱이라 여기지 않는 분위기에서 살아간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유희적 행위일 수 있는 놀림거리가 당하는 입장에서 지극한 공포를 자극한다는 점은 아. 무어라 설명할 수 있을까.

 

 

 

 

 

 
터리스 휴스턴의 《왜 여성의 결정은 의심받을까》는 우리 사회에서 너무도 당연해진 편견에 대해 지적한다. 같은 사안에 대한 같은 결정을 두고서 그 주체가 남성이라면 듣지 않을 질문, 조언들을 여성들이 듣는다는 것이다. 리베카 솔닛도 《여자들은 자꾸 같은 질문을 받는다》에서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여성들의 이야기에서 공통적으로 찾아볼 수 있는 점인데, 여성의 목소리에는 권위가 없다. 사실 남성이 타고난(?) 권위에 기대면 살기 편하다. 그냥 옆에 남자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다른 반응을 이끌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성차별을 조장하는 발언이라 할 수 있겠지만 한 번 생각해보자. 특히 여성이 어떤 권리를 되찾거나 주장하려고 할 때, 조언으로 가족 중에 남자를 대동할 것이며 그렇지 못하면 남자인 친구라도 데려가라고 하질 않는가. 아주 일상적인 상황들- 물건을 사러가거나 A/S 신청을 받을 때, 구매의 주체는 여성인데 설명은 남성에게만 하고 있다든가 하는 일들. 아주 예외적인 상황이 아니라 흔하디 흔하다. 터리스 휴스턴은 이런 일상적인 일들이 직무에서도 벌어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여성의 언어는 수동적이거나 회피하는 화법이라는 이야기를 종종 듣는데, 그렇게 사회화되었고 또 그런 반응을 기대받기 때문이다. 직장 상사가 남자일 때는 너무도 자연스러운 권위적인 지시가, 여자 상사일 때는 부정적으로 느껴지고 반발을 부른다. 왜 말을 저렇게 해? 라는 반응. 휴스턴에 따르면 사회는 남성의 실수에 관대하다. 실수보다는 도전 의식에서 열정이 엿보인다며, 진취적인 기상을 독려한다. 여자는 잘해도 꼭 과정에 트집을 잡는다. 왜 그렇게 이기적이냐는 둥, 화합하지 못했다는 둥. 실수했을 땐 저러니까 여자에겐 큰 일을 시키면 안 된다든가 하는 소리가 딸려온다. 터리스 휴스턴은 엘리트 코스를 밟아왔고, 직무에서는 딱히 그런 의식을 하지 못했다. 일단 성차별을 논한다는 것 자체가 거기에 연연하는 느낌이 들고, 또 그런 이야기를 하기엔 좀... 다들 말을 하진 않지만 은연중에 느끼는 바로 그 이유 때문이다.


그랬던 사람이 왜 이런 연구를 하게 됐는가? 터리스 휴스턴은 남편과의 주말 부부를 청산하기 위해 의논한다. 처음엔 남편이 이직을 하고, 휴스턴이 사는 곳으로 오기로 했다. 가족, 친구, 직장 동료들 모두가 축하하고 격려해주었다. 몇 년 후, 휴스턴이 이직을 하기로 한다. 난리가 났다. 직장에서는 관리자 직급인 니가 그러면 무책임하다, 실망이다, 다시 생각해봐라, 어리석은 결정이다 등등. 터리스 휴스턴은 깊은 충격을 받는다. 아니, 왜? 왜 이렇게 다른 반응일까? 그것이 시작이었다. 《왜 여성의 결정은 의심받을까》를 읽으면서 《페미니스트 파이트클럽》도 같이 봤는데, 이 책은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 입이 트이는 페미니즘》과 비슷한 구석이 있다. 정형화된 상황에서의 반응 전략을 가르쳐준다는데서 말이다. 대처법이라고 해서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지만,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의 사고를 바꿔준다는데서는 변화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A 상황에서 A'를 하는 식. 그런데 이런 책을 읽고 있으면 한 번씩 집중이 깨지는게,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참 살기 힘들다... 그보다는 일상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맨터랩터라든가 재기넘치는 표현들이 우스웠다. 킹오파 느낌의 북 트레일러가 재미있다. 여기서도 강조하는 것은 여성들의 연대다. 라 솔리다리테! 그래서 클럽 이름이 파이트클럽이다. 영화에서 따 온 거 맞다. 한가지 뜬금없는 고백을 하자면 나는 평화학자 정희진의 책을 모으듯이 사고는 있는데 잘 읽지는 못하고 있다. 《페미니즘의 도전》을 비롯하여 《낯선 시선》에 이르기까지 구입은 하는데 정작 서문을 펼치면 멈추고, 중반부까지 읽다가 멈추고 하는 것이다.

 

 

 

 

 

 

우리 문학 이야기로 넘어와서, 《82년생 김지영》이 30만부를 넘겼다고 한다. 오랜만에 알라딘 서재로 들어오니, 알라딘에서도 이 책을 읽는 행사를 하고 있다. 모 방송국에서 다큐멘터리도 만들었는데... 미루는 습관이 어디 가겠는가. 나는 이 책을 사두기만 했지 아직 읽지 않았다. 같이 산 책이 김혜진 작가의 《딸에 대하여》, 최정화와 구병모 작가의 이름을 확인하고 산 것이 《현남 오빠에게》. 언제쯤 읽을 수 있을까? 늦추고 미루고 하는 이유는 약간 궤를 달리하는게, 장강명 작가의 소설들이 화두에 올랐던 때 그 작품을 바라보던 마음과 비슷하다. 이미 인지하고 있는 현실을 굳이 확인하고 싶지 않아서다. 외면하지 않아야 한다고 의식하면서. 막상 읽어보면 생각했던 것만큼 고통스럽지 않을지도 모르는데, 책장에 넣어두고 바라만 보는 것이다. 그런 것 치고는 외국인들이 쓴 글을 잘 읽는 걸 보면 그 또한 내가 살고 있는 세계와 약간은 선을 긋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반성을 했다. 조만간 읽어야겠지... 차별의 역사에 대하여, 영화 《히든 피겨스》 를 좀 늦게 보았는데 씨네21, 김혜리 기자의 한줄평에 공감했다. "너무 매끄럽고 기분좋은 나머지, 차별과의 싸움이 쉬워 보이는 착시현상도". 유쾌하다기엔 무언가 찜찜한... 그런 분위기. 로자 팍스의 저항운동이 시작되어 번지는 시기, 6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다. 근본적인 해결은 있을 수도 없으니 기대도 하진 않았지만 뭔가 그렇다는 이야기다. 작품 내에 등장하는 컬러드라는 표현을 보면서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어떤 배우가 입에 올려 구설수를 일으켰던 컬러드 퍼슨은 프랑스에서는 오히려 PC한 표현이다. Personne de couleur. 그 이야기를 듣고 다들 눈이 휘둥그레졌는데 여기에 미국인이 불쾌함을 표시했다. 프랑스인은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Les noirs 라고 할 순 없다면서... 디폴트는 무색인이냐며 웃퍼했던 기억이 난다. PC 운동을 시작했던 프랑스부터가 이 모양(?)이다. 영화는 좋다. 페이퍼 제목은 옥타비아 스펜서의 눈빛에서 따온 거다. 어쩜 그렇게 반짝반짝 반질반질 빛나는 눈동자를 가졌을까. 영리한 눈빛. 타라지 핸슨 연기도 좋고, 키얼스틴 던스트는 완전히 남부 억양이 착 붙었다. 미드 《파고》에서 얼마나 놀랐던지. 

 

 

 

 

 

그런 의미에서 인종에 관련한 신간도서도 추천한다.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와 《배반》이다. 보다 클래식한 취향이라면 전자를, 비급 정서 특유의 재기발랄함을 사랑하는 분이라면 후자를 권한다. 《배반》의 줄거리를 생각하니... 백인도, 흑인도 아닌 다른 분류에 들어가는 인종으로서 좀 착잡한 마음이다. 우리를 대표하는 문학이나 표현에는 무엇이 있을까?  흔히들 이야기하는 동양인 같은 거 말고. 서경식 선생님은 '분류의 폭력'을 말씀하셨는데, 그런 분류에 들어가지도 못하는 건 또 다른 폭력일까 그런 생각을 해 보았다. 뭐 굳이 분류되지도 않았는데 분류되기를 바라는 것도 우습지 않은가. 이게 무슨 탈아시아 어쩌고 하는 논린가 싶기도 하고. 더 이야기를 하면 말만 길어지고 해골만 복잡하리라. 범죄, 추리소설도 몇 작품 읽었는데 딱히 추천할만한 책은 없다. 감명깊게 읽은 《고리키 파크》는 리뷰를 썼고... 청소년용으로 분류되는 판타지 소설을 다 봤는데(우에하시 나호코의 수호자 시리즈) 거기에 대해서도 페이퍼를 쓴 적이 있고... 레시피북 이야기로 넘어가서, 올해는 요리책을 많이 사진 않았는데 그 중에서 재미있게 본 (물론 사진) 책 두 권이다. 그냥저냥 볼 만하다. 《레몬 레시피 북》은 일본에서 아주 인기있던 책이라 하는데 그만큼의 가치가 있다.  《또띠아》는 그냥 랩샌드위치 배리에이션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 책 표지는 문학작품이랑 나란히 줄 세워두기가 뭐해서(?) 아래로 뺐다.

 

(고리키 파크 리뷰: http://blog.aladin.co.kr/769383179/9384132)

 

 

 

 

 

 

이 외에도 이런저런 책들을 많이 봤는데 아무래도 가장 많이 읽은 것이 로맨스 소설이다. 취향에 맞는 책을 찾기가 정말 힘들다. 로맨스 소설을 보기 시작한 것은 작년 이맘 때. 예전 할리퀸 스타일이랑은 비슷한 듯 꽤 다른 구석이 있다. 일단 키워드가 중요하다. 대체로 서사보다는 캐릭터 빨(?)로 밀고 나간다. 유행하는 스타일도 있고... 나는 판타지 쪽을 주로 읽는 편인데 현대물에 이입하는 것이 너무도 힘들기 때문이다. 차라리 완전 판타지를 읽고 말지, 정말 말도 안 돼죠. 로맨스 판타지 소설들은 보통 등작체계가 등장하고 내명부(...)가 나오는, 동서양 뽕짝이 많다. 얘기가 나와서 하는 말이지만 앙드레 모루아의 《프랑스사》를 읽다가 김이 샜던 것이 호칭 때문이었다. 루이 14세던가 15세의 정부를 후궁이라고 했기 때문인데, 그쪽은 기본적으로 일부일처이므로 정부는 있어도 후궁은 없다. 미스트레스를 한국어로 옮기면서 벌어진 실수라 할 수 있겠다... 그것과 별개로 저 책은 읽을만하다. 아무튼 로판을 보면서 기사가 등장하는 서양 황제의 황후, 황비, 귀비 등등이 등장할 때면 나도 모르게 시선이 흐려지고 만다. 반대로 경칭을 너무 세분화하면 읽는 재미가 좀 떨어진다. 이것도 어떤 면에서는 필력의 문제인데, 설정을 적절히 글 안에 녹여내는 것- 가벼움과 진지함 사이에서 균형을 잘 맞추는 것이 관건이 되겠다. 재밌는 것은 윤문이 때론 감상을 방해한다는 것이다. 문장이 전달하는 내용보다 문장 자체에 치중하는 느낌이 들어서다. 작품들이 어느 정도 정형화된 구조를 따르고 있기에, 그 기대를 저버려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연재로 조금씩 끊어 읽을 때와 출간되어 전체를 한번에 읽을 때의 느낌도 다르다. 추천할 책은 서양 판타지도 아니고, 미문 때문에 흐름이 끊기지도 않는다. 이미 잘 알려진 작품이다.

 

 

 

 

 

굳이 장르를 분류하자면 타임슬립물, SF라고 할 수 있을까? 《타임 트래블러》라는 제목처럼, 주인공이 과거여행을 하는데... 이 작품의 장애물은 여주인공이다. 로맨스 소설의 주인공으로서 이런 표현으로 소개하기가 미안하지만... 한때의 유행어를 빌리면 주접스럽다... 미안해요... 그런데 정말 주접스럽다... 과거 여행의 폐해(?)인지 관념자체가 현대인같지 않은 구석이 있는데 조금 덧붙이자면 약간은 막무가내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 예시를 들기는 좀 그렇고 첫 만남에서 남자주인공이 정말 질색팔색을 하는데 독자도 똑같이 몸서리치게 된다. 참고로 남자주인공은 굉장히 결백하고 까탈스러운 스타일. 솔직히 첫인상으로 치면 얘도 좀 밥맛이다. 로맨스 장르에서는 주인공 커플이 연애를 하면서 티격태격대는 것이 소소한 재미를 주는데 이 작품은 그런 일상적인 이야기보다는 시간여행이라는 설정을 잘 이용하여 서사를 꾸려나간다. 적절한 복선과 함께 캐릭터들을 다양한 환경에 노출시키면서 다면성을 드러낸다. 소설의 마지막에 갈 때쯤이면 이미 여주인공의 팬이 되어 눈물 콧물 다 빼고 엉엉 울고 있다. 여주인공의 단점으로 부각되는 모든 것이 시간여행이라는 특수성에서는 장점으로 발휘되고... 남자주인공이랑 맺어지다고 생각하면 너무 너무 아까운 생각이 드는 것이다. 전통과 애국에 대한 메시지도 있기 때문에 스크린으로 옮겨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시간 여행하니까 생각나는 것이 영화로도 만들어진 《시간여행자의 아내》라는 소설인데 이 작품 때문에 낭만성이 다 깨지지 않았던가. 알몸으로 어딘지도 모를 장소로 떨어지는 시간여행자들... 이 소설은 그렇지 않아 다행이다. 로맨스 소설에 대해서도 이런 저런 이야기 할 거리가 많은데 오랜만에 글을 길게 쓰려니 힘이 들어서...

 

 

 

 

마지막 이야기로는 반가운 소식이다. 열린책들에서 연말에 《수용소 군도》 세트 특별판을 낸다고 한다. 굿굿 베리굿. 혹시라도 놓칠까 봐 솔제니친을 관심작가로 설정해두었다. 오늘의 페이퍼 끝.

 

(특별판 출간: https://twitter.com/openbooks21/status/9306639597529333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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