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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garland for his head
  • 한 톨의 밀알
  • 응구기 와 시옹오
  • 12,600원 (10%700)
  • 2016-10-04
  • : 624
거의 완벽한 소설.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이 조응하며 어떤 희망을 남기는, 과거와 현재의 갈등을 오롯이 담은 그런 소설. 미래에 대한 낙관적인 희망을 비추었던 것에 비해 현재는 여전히 과거의 망령에 붙들려 있는 케냐의 정치와 사회적 상황을 가늠하게 하는, 고전 소설 분위기를 품고 있는 작품... 이 소설을 읽고 난 만족감이 어느 정도이냐 하면, 응구기 와 티옹오의 다른 소설들이 궁금하지 않을 정도이다. 거장의 세계를 엿본 듯한 아니 맛본 듯한 그 만족감이 기묘하게도, 다른 작품들에 대한 기대감을 제거해버린다고 할까? 아프리카 문학, 제 3세계 문학으로 분류되겠지만 고전이라 불리는 어떤 작품과 견주어도 뒤떨어지지 않을 작품이다.

1952년 시작된 무장봉기 마우마우 운동으로 1959년까지 비상사태가 선언된 케냐. 식민당국에 의해 체포되어 수용소 생활을 했던 인물들이 고향으로 돌아온 1963년을 배경으로 한다. 독립, 나라(부족)의 존망 앞에서 각자는 결정을 내린다. 그 결정은 곧 누군가를 배신하는 것이었고 원하든 원치 않았든 오롯이 자신의 책임으로 돌아온다. 저항 운동의 상징인 키히카는 연인을, 무고는 양심을, 기코뇨는 동지들을, 카란자는 조국을, 뭄비는 배우자를  배반한다. 이러한 배반은 소명 때문에 혹은 사랑 때문에, 흥분에 따른 순간의 충동 때문이었고 그 결과는 역사의 흐름 속 개인의 생에도 영향을 끼친다. 우리는 과연 그들을 배반자라 손가락질 할 수 있을 것인가?

키히카는 말한다. ‘노예한테 삶이란 게 있을까.’ 기코뇨는 얘기한다. ‘나 자신의 자유를 살 수 있다면 케냐 전체라도 백인에게 팔아넘겼을 것입니다.’ 독립의 결실을 맛보는 자들은 독립을 위해 애쓴 사람들이 아니었다는 것, 식민 통치는 주체만 바뀌었을 뿐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는 것은 배경을 달리한 비슷한 역사를 가진 나라들에도 여전히 적용되는 이야기이다. 프랑스의 동화 정책을 생각하는 톰슨은 어떠한가. 옥스포드 출신의 역사학자인 그는 자신을 아프리카의 ‘프로스페로’처럼 여긴다. 뒤떨어진 문명을 도덕적으로 갱생하여, 사회와 문화를 재교육함으로써 그들을 해방시켜주겠다는 오만한 생각. 당시 지배층 대부분을 지배하는 생각이었을 터이다.

자치 대장으로서, 식민 당국의 앞잡이었던 카란자는 자신을 백인 힘의 일부로 여겼다. 여인들을 욕보였으며, 형제들의 피로 몽둥이가 흠뻑 젖었다. 카란자는 왜 배반했던가? 그것은 사랑 때문이었지만, 배반의 과정과 결과를 자신이 즐겼음은 부인할 수 없는 일이다. 린드 박사는 비상사태 동안, 집에서 일하던 요리사와 남자들에게 윤간당하고 키우던 개도 잔인하게 죽는다. 이러한 장면은 존 쿳시의 『추락』을 떠올리게 한다. 남아공 독립 이후, 시골에 정착한 루시 역시 흑인 남성들에 윤간을 당하고 개도 죽는다. 루시는 이를 이 나라에 머무르는 대가처럼 생각하여 받아들이고, 린드 박사 역시 새로운 개를 키우며 케냐를 떠날 생각이 없다.

식민 통치를 했던 인종과, 식민 통치를 받았던 인종의 시각은 다르다. 『추락』과 『한 톨의 밀알』의 시각 차는 거기에서 기인한다. 서로를 두려워하는 것은 동일하지만... 『한 톨의 밀알』에서 본국으로 송환될 톰슨은 아주 가차없는 인물이었으나, 독립을 앞둔 케냐인들의 열망에 두려움을 품는다. 어쩌다 위대한 제국이 이렇게 되었지? 못생긴 백인 노처녀, 린드 박사를 본 순간부터 증오했다는 코이나는 주인을 짓밟았지만 여전히 건재한 그녀를 보며 불안함을 느낀다. 마치 그들의 땅에 늘러붙은 제국을 상징하는 것만 같기 때문이다. 흑인 여성에 대한 폭력은 집단적으로 서술되지만 백인 여성에 대한 폭력은 개인적이며 상징적이다. 이마저도...

키히카는 스코틀랜드 교회 학교에서 여성의 할례가 야만적이라는 선생에게 주장한다. 그런 말은 성경에 없으며 잘못되지 않았다고. 모계사회였던 케냐가 부계사회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남성들은 ‘임신’으로 여성들을 땅에 묶어둔다. 숭배하던 여성을 타락했다 점찍으면서 말이다. 그리고 작품의 마지막에서 배부른 여성은 새로운 탄생과 희망이라는 상징을 남긴다. 여성 개인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신격화야말로 억압일 터이지만... 이러한 장면들은 독립국가들이 전통을 되살리는 과정에서 다시 돌아봐야할 자취들로, 기코뇨의 시선으로 전개되는 장면들과 함께 새로운 여지들을 남긴다.

키히카라는 저항 정신을, 조국 케냐를 배반한 이는 누구인가? 지난 과거를 대표하는 인물로서 벌을 받아야 할 배반자를 찾는 것. 이 작품을 관통하는 질문은 양심 선언, 어떤 숭고한 희생과 용기로 막을 내린다. 장거리 경주를 응원하던 열망, 사람들로 가득 찬 들판은 텅 비었으며 양심 선언을 한 인물의 행방은 묘연해진다. 사람들은 더 이상 그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리고 현실로 돌아와, 케냐에 대한 사랑을 상징하던 조모 케냐타. 그는 물러간 식민 통치를 이어받아 케냐인들을 억압한다. 이러한 역사의 아이러니 속에 응구기 와 티옹오는 ‘하람베’, 화해와 상생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길지는 않지만 놀라울 정도로 꽉 차 있는 작품이다. 직접적인 묘사는 피하면서도 충분히 그 고통과 절망이 묘사되고 있으며 캐릭터들이 제시되고 이야기가 전개되는 장면들은 클래식하다. 다소 낯선 이름들에 익숙해지면 이제껏 읽어 온 작품들을, 우리의 역사를 떠올리게 된다. 역자 해설을 참고하면, 이 작품은 조지프 콘래드의 『서양인의 눈으로』를 상호텍스트로 활용한 작품이라 한다. D. H. 로런스의 영향을 받았고, 응구기가 영어로 쓴 마지막 작품들 중 하나이다. 이름을 제임스 응구기에서 기쿠유 식인 응구기 와 티옹오로 바꾼 후로는 기쿠유 부족언어로만 글을 쓰고 있다고. 이 다음에는 포스트 식민시대를 대표한다는 작품, 『피의 꽃잎들』을 읽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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