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훈의 <메이지 유신을 설계한 최후의 사무라이들>은 일본 근대의 시작인 메이지 유신을 조망하는 안내서다. 저자가 이전에 쓴 개설서 <메이지 유신은 어떻게 가능했는가>가 체제와 대내외적 정세에 대해 거리를 두고 쓰여졌다면, 이번에는 19세기 중반 메이지 유신의 주역 요시다 쇼인, 사카모토 료마,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의 삶을 파고들어 서술해내고 있다. 이들은 모두 하급 사무라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그렇지만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같은 전국시대 사무라이들과 달랐다. ‘그들은 왜 칼 대신 책을 들었나’라는 부제가 드러내듯, 도쿠가와 막부 250년 동안 유례 없는 평화가 이어지면서, 신분 상승이 막힌 사무라이들은 주자학, 난학 등의 학습을 이어갔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요시다 쇼인이다. 일찍이 쇼인은 쇄국 일본 안에서 선구적으로 해군 양성, 대외팽창론, 정한론을 주장했다. 독서광인 그가 학문을 가르치던 ‘송하촌숙’은 훗날 메이지 내각을 그대로 옮겨왔다고 평가될 만큼, 새로운 세상을 꿈꾸던 인재들의 요람이었다. 당시 정국은 막부가 서양 세력과 연이은 굴욕적 조약을 맺으면서, 막부에 적대적인 번들(주로 조슈번, 사쓰마번)을 중심으로 '존왕양이(천황을 중심으로 서양 오랑캐들을 무찌르자)'가 대두했다. 아이자와 야스시가 지은 존왕양이의 바이블 <신론>은 “필사에 필사를 거쳐 이미 전국적으로 독자를 확보하고 있었다.”(60p) 동서고금을 통틀어 체제를 바꾸려는 것은 언제나 불만을 가진 세력이다. 그런 점에서 백여 년 동안 학문을 이어온 하급 사무라이 계급들은 교육, 정보, 조직에 있어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한편 의문이 드는 지점이 있었다. 일본이 쇄국을 벗어나야 한다면서, 왜 이들은 복고주의처럼 보이는 ‘존왕양이’를 주장한 것일까? 요시다 쇼인, 사카모토 료마,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의 입장은 그리 단순하지 않았다. ‘존왕’에 있어선 의견의 여지가 없지만, 극단 세력과 결을 같이하는 ‘양이’가 아닌, 일종의 ‘양이개혁론’에 가까웠다. 서양의 것을 무조건 배척하는 게 아니라, 그들의 문명과 기술을 배워 넘어서자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그러기 위해선, 270여 개의 번(복합국가)에서 벗어나, 서양 국가들처럼 단일한 ‘국민국가 체제’로 나아가야 했다. 천황은 목적을 이루기 위한 도구였다. 당시 소속 국가와 마찬가지였던 번을 탈퇴한 뒤, 신분제약 없는 ‘해원대(사설 해군, 무역 결사)’를 창설한 료마의 행보에서 드러나듯, 일찍이 난학을 통해 일본 안에서 국제적으로 사고했던 것이다.
단단한 벽으로 둘러 쌓인 시대를 바꾸려면 광인이 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래서였을까? 막말 ‘존왕양이’를 외치던 유신 지사들은 스스로를 광인이라 여겼다고 한다. 250여 년간 전쟁이 없던 세상에서 강력한 위기론을 주장했고, 감히 ‘탈번’을 감행했으며, 증기선 하나 없는 나라에서 해외 팽창론, 정한론을 꿈꿀 정도였으니 말이다. 요시다 쇼인은 지배체제에 실망하여 ‘초망굴기’를 부르짖다 사형당했고, 사카모토 료마는 '삿쵸(조슈, 사쓰마)동맹'과 쇼군 요시노부의 '대정봉환(천황에게 권력을 이양)'을 극적으로 이뤄냈지만 암살당했다. ‘라스트 사무라이’ 사이고 다카모리는 구체제의 잔재로 남겨진 사무라이들과 함께 산화했고, ‘철혈재상’으로 유신 정부의 기틀을 닦은 오쿠보 도시미치 역시 암살로 삶을 마감했다. 어쩌면 이들에게 독서는 전국시대 총칼보다 더 위험한 ‘무기’였을지 모르겠다. 목숨과 맞바꾼 메이지 유신으로의 전환은 성공적이었지만, 그때 남겨진 광기는 1930년대 쇼와 군국주의 일본의 씨앗이 되었다.
"본 서평은 네이버 부흥 카페 서평 이벤트에 응하여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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