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반딧불의 잔존
  •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
  • 한윤형
  • 13,500원 (10%750)
  • 2013-04-15
  • : 1,163

알라딘 구매기록을 보니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2016년 6월에 구입했다. 청년 문제를 공부해야겠다는 당위로 선택한 것이지만, 여러 곡절이 있어 제대로 다가가지 못했다. 그래서 가볍게 훑어보다, 2019년 1월쯤 서가를 정리하면서 집 근처 '아름다운 가게'에 기증했다. 일이주에 한 번씩 어떤 책이 들어왔는지 구경가곤 하는데, 그때마다 이 책은 이천원의 가격에도 팔리지 않은 채 남겨져 있었다. 결국 9개월 전에 기증한 책을 내 손으로 다시 찾아왔다. 조국 사태를 겪으며 세대 문제를 공부해야겠다는 갈급한 마음이 들었고, 그제서야 이 책을 황급히 떠올리게 된 것이다.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2016년 6월에 구입했다. 청년 문제를 공부해야겠다는 당위로 선택한 것이지만, 여러 곡절이 있어 제대로 다가가지 못했다. 그래서 가볍게 훑어보다, 2019년 1월쯤 서가를 정리하면서 집 근처 '아름다운 가게'에 기증했다. 일이주에 한 번씩 어떤 책이 들어왔는지 구경가곤 하는데, 그때마다 이 책은 이천원의 가격에도 팔리지 않은 채 남겨져 있었다. 결국 9개월 전에 기증한 책을 내 손으로 다시 찾아왔다. 조국 사태를 겪으며 세대 문제를 공부해야겠다는 갈급한 마음이 들었고, 그제서야 이 책을 황급히 떠올리게 된 것이다.

한윤형의 글은 누구든 독해할 수 있을 정도로 쉬운 문체로 구성되어 있다. 또래인 노정태나 좀 더 어린 박가분이 전방위적으로 독서하며 정치철학 용어를 구사하는 것과 달리, 한윤형의 저작들에선 철학적 관념이 짙은 글을 찾기 어렵다. 문장이 쉽고 독서 영역이 상대적으로 한정되어 있다고 사유와 논리가 뒤쳐지는 건 아니다. 오히려 저자 자신이 무엇을 잘할 수 있는지(요약, 분석, 논쟁) 제대로 파악하고 있으며, 포괄적인 독자를 염두에 뒀기에 의식과 문장 역시 거기에 최적화 된 듯하다.

" '지금 여기'의 문제를 호출할 수 없다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도 필요가 없다. 인터넷에서 아무 철학자의 이름이나 검색해보라. 아무 학자 이름이나 주워대면서 제 지식의 풍성함을 자랑하는 그런 '인문 오덕'들이 한국 사회에 절실히 필요하다고 볼 수는 없지 않은가."(113)

그에게 지식과 교양은 우리의 생각과 고민을 해결할 방향에 대해 조언해주는 도구이다. 그 시선으로 자의식 과잉에 빠진 사람들에게서 '우리 세대의 보편성'을 읽어내기도 한다. 배배 꼬인 채 서로를 '다르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실은 너무도 닮았다는 지적이다. 한편 그것은 파편화된 잉여적 존재로서 자의식 없이 견뎌낼 수 없는 세대의 고통이기도 하다. 이런 관점은 무작정 청년들의 독서, 교양을 문제 삼으며 계몽하려 드는 지식인들과 구별되는 지점이다. 또 하나 그의 기억에서 흥미로웠던 건 세기말 지식인들이 당시 젊은이를 두고 '인물과 사상'같은 잡지나 보고 있다며 비판했다는 것이다. 그 논지는 더 한탄스럽게 변형되어, 요즘 청년들은 책도 보지 않는다고 발화되는 중이다.

반복되는 세대론의 함정은 계속되고 있다. 한때 속물적이고 탈정치화 된 젊은이를 비판하는 "20대 개새끼론"이 유행했는데, 그 시기 2008년도 광우병 촛불 집회에 참여한 10대 여고생들을 두고, '새로운 세대'가 나왔다며 기성 세대들은 열광했다. 계산해보니 그 10대들은 나와 같은 90년대생들이고, 이제 20대가 중.후반이 되어 사회에 진출하고 있다. 내 세대 감각으로 돌아보건대 '새로움'은 커녕 살인적인 경쟁과 우울은 한윤형이 체감하던 때보다 더 어두워진 것 같다. '다른 것'이 싹트지 못할 만큼 경제구조가 닫힌 곳에서 잉여화된 청년 문제는 되풀이 될 수밖에 없다. 그 구조가 변하지 않는 한 다음 20대 역시 마찬가지리라 예상된다. 그러나 여기저기서 깨어 있는 10대를 극찬하는 반응들이 보인다. 그들은 5년 후에도 그 기대를 계속 유지할 수 있을까? 그때 가서 또 다른 10대들에 대해 열광할까?

기성 진보는 청년들을 두고 보수화와 정치적 무관심을 지적하지만, 청년들은 오래전 진보든 보수든 자신들을 대변해주지 않으리란 걸 깨달았다. 이들의 정치적 무관심은 '무지'에 의해서가 아닌, 뼈저린 앎과 경험에서 빚어진 것이다. 최근의 조국 사태 역시 그런 흐름을 보여준 것 같다. 586세대 중산계층이 사활을 걸고 서초동 '조국 수호' 집회에 나간 것에 비하면, 청년들은 여기에 관심조차 가지지 못하거나 외면했다. 세대간의 온도차는 갈수록 격화되고 있다. 놀라운 건 여전히 청년 세대를 문제 삼은 보수화론이 주요 매체에 떠돌고, 전형적인 비난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이 출간된지 6년이나 지났지만, 청년 문제는 진전된 것이 없어보였다.

자기 문제의 의제화마저 기성세대에게 의지해야 했던 청년들은 이제, 어떻게 자신의 문제를 가지고 싸워나갈 수 있을까? 저자는 과거의 대학생들이 타자를 서사화하며 운동에 동참했던 것과 달리, 오늘날엔 "자기 자신의 삶을 '서사화'할 때에 세상도 사회도 깨달을 수 있다"(274)고 말한다. 그 방식은 저자가 일상의 삶에서 청년문제, 지역문제, 경제문제의 시대상을 읽어낸 것과 다르지 않은 것일 테다. 누군가는 웹툰으로, 또 누군가는 소설로 각자의 삶을 서사화하고, 쳇바퀴처럼 반복되어 왔던 세대론의 함정과 싸워가야 한다. 기성 세대와 제도가 청년을 대변해주지 않을지라도, 대다수가 비정규직이 되고 궁지에 몰릴 수밖에 없다면 맞서야 한다. 연대가 가능했을 때 청년운동은 가장 큰 당사자 운동이 될 수 있지만, 포기한다면 각자 자신의 방에서 외롭게 투쟁해야 할 것이다. 저자의 마지막 말을 들어보자.

"전혀 다른 세상을 살게 될 우리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더 이상 부모 세대와 선배 세대를 원망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들의 생각과 별개로 세상은 움직일 것이고, 결국 그 세상을 살아갈 이들은 우리들이기 때문이다. 청춘을 위한 나라가 없다면, 다른 나라를 만들어낼 가능성도 책무도 결국 이 세대에게 떨어진 것이 아니겠는가."(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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