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담 』을 발견했을 때 꽤 신선한 기분이었다. 워터프루프 북이라는 컨셉은 선뜻 와닿지 않았지만, ‘장르’인데다 ‘미니픽션’이라는 소위 순문학적이지 않은 꼬리표가 두 개나 붙어 있는데도 필진이 쟁쟁했기 때문이다. 김희선, 이유리, 임선우, 김엄지, 이장욱 소설가의 글을 하나의 작품집에서 만날 줄은 몰랐다. 게다가 취향에 따라서는 문지혁 작가의 글 역시 기대하는 사람이 많았을 것이다. 이 책은 그런 의미에서 리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선은 한국 문학판에서 앤솔로지가 가지는 의미에서부터 시작해보면 좋겠다. 앤솔로지의 사전적 의미는 전집, 선집이다. 요즘에는 적당히 뭔가를 모아놓으면 앤솔로지라고 부르는 경향이 있다. 한국문학에서는 조금 더 특수하게 하나의 컨셉으로 여러 작가가 모여 글을 쓰는 것을 주로 앤솔로지라고 한다. 다만 이런 정의는 꽤나 허울뿐인 것이었는데, 작가들이 최소한의 컨샙만을 간신히 지킨 채 자기 문학을 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괴담』의 경우 괴담이라는 장르성이 강렬했던 탓이었을까, 비록 작품 사이의 편차가 작았던 것은 아니지만 모두 괴담을 쓰려했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그것이 상품으로서의 책의 가치에 기여하는 바가 크기 때문이다. 제프 베조스가 아마존을 통해 직접 보여주었듯, 책은 가장 적은 정보만으로도 구매자가 자기가 무얼 사는지 가장 확실하게 알 수 있는 상품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안의 내용물에 관해서는 (그러니까 상품을 통해 얻게 될 효용의 관점에서) 가장 모호하다. 상품성이 높은 책은 어쩌면 표지나 디자인이 전달하는 컨셉이 그 책의 내용물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을 때이다.
『괴담』은 워터프루프 북이다. 한국말로 방수책. PVC에 넣어서 팔기에 허울뿐인 것인줄 알았는데, 표지 뒷장을 보니 이런 말이 적혀 있었다. “워터프루프북은 본격 생활 방수 책으로, 스쿠버 수첩이나 방수 지도에 쓰이는 ‘미네랄 페이퍼’로 제작되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반신반의 하면서 책에 물을 조금씩 떨어뜨려 보았는데 정말로 젖지 않았다. 작정하고 물을 들이부어도 책은 멀쩡했다. 그러나 화장실에 두고 짬짬히 읽거나 여름 해수욕장에서 읽으라는 제작 의도가 아주 경쾌하게 전달되었다. 괴담하면 역시 여름, 그리고 미니픽션하면 짬 시간이다. 디자인적으로 이 책은 완벽에 가까운 것이다. 게다가 강렬하면서도 귀여운 표지와 80쪽 정도밖에 되지 않는 아담한 두께마저도 책에 매력을 더한다.
다만 이런 컨셉에 비해 전체 작품 퀄리티에는 의문 부호가 붙기는 한다. 정말 좋은 작품이 있는가하면 이게 괴담이 맞나 싶은 것도 몇 개 있었다. 하지만 책 전체가 가지는 매력에 비하면 어쩌면 그건 사소한 문제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 책은 책-상품으로서 가치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작품에 대한, 특히 미니픽션에 대한 평을 하지 않는 것은 미니픽션 문예지 선뜻으로서의 직무유기일 것이다. 이하, 작품에 관한 짧은 평을 붙인다.
<이것은 괴담이 아니다> - 역시 표제작에는 이유가 있다.
현실과 허구를 연결하여 뒤트는 흥미로운 메타픽션. 텍스트나 현실에 대한 메타가 아니라 글을 읽는 독자와 직접적으로 연결한다는 점이 크게 와닿았다. 좋은 컨셉 소설. 다만 독자 배려가 과해서 그런가 쓸데없이 더 설명하는 측면이 있다... 특히 마지막 한 문단은 아예 빼는 게 옳다.
<민영이> - 밍밍하다.
쌓이는 서스펜스가 없어서 반전이 반전 같지가 않다. 결국 이야기에서 의미있게 쌓였다가 전복되는 정황이 적다. 이는 서술자의 평서술에만 의존했기 때문이다. 서술자가 뭔가 착각을 하거나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 같은 정황이 보이더라도 전체적인 이야기 - 다른 인물의 말과 행동을 통해 사건이 전개되고 있으면 ‘확실해보이는 사실’들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런 ‘확실해 보이는 사실’이 마지막에 뒤집히는 것에서 반전의 맛이 온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는 앞에 충실히 깔아두었어야 할 ‘확실해 보이는 사실’의 밀도 심각하게 얇다.
<따개비> - 갓유리님 찬양해.
사실 참신하다기보단 전통적. 이미지가 진부하기 때문에 따개비가 상처에서 자랄 거라는 건 쉽게 추측이 가능하다. 다만 마지막 선택이 말 그래도 이유리 작가님답다. 기묘하기 짝이 없는 그 따뜻함은 김애란 이후 한국문학이 보여주는 휴머니즘의 새로운 지평이 아닐까. 여하튼 이런 이유리 특유의 따스함이 있고, 글을 끌어가는 힘도 좋았다. 다만 괴담 특유의 참신성 부족이 아쉽다.
<벽> - 참신함으로만 따지면 1등인지도.
이미지 발상력은 훌륭하다. 벽 = 이의 연결은 쉽게 상상하기 어렵지만 설득력이 있다. 다만 그게 이라면 입이 어떻게 벌어져 있고 그 사이 땅은... 하는 의문은 든다. 배경이 아예 더 한적한 나라, 적어도 일본 외곽이면 좋았을 듯. 그래도 참신성에 점수를 준다.
<벚나무...> - 프로파간다에 줄 수 있는 점수는 0점 뿐입니다. 제발 발전을 좀 하세요;;
비윤리를 공포와 연결시키려는 과도한 비약. 그러니까 저런 자들이 아직도 떵떵거리면서 잘 산다는 게 포인트인데, 그렇다면 오히려 더 기묘한 일이 일어나지 않아야 하지 않나 싶다. 책상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지만 사실 책상이란 그냥 내력이나 이력일 뿐이고, 그래서 책상과 연결되어 있는 조금 기이한 이야기는 결국 별 것 아닌 고난으로 치부된다. 근데 과연 이게 공포인가? 비윤리자들이 세상에 있는 것을 공포스러워하는 요즘 세태가 나는 오히려 무섭다
<푸른 연못> - 뒤에서 2등.
공포는 공포스럽고 기괴한 이미지로부터 온다. 말과 구조로만 공포를 설명할 수는 없다. 공포의 본질은 이해하지 못함이라는 측면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푸른 연못은 너무 그 구조에만 천척하여 공포를 잃었다.
<얼음과 달> - 개인적으로 최악이었다.
어거지다. 이렇게 작위적으로 이야기 두 개 깔아두고 이게 실재로 일어났습니다 짜잔하는 식의 전개는 너무 뻔하다. 이런 걸 하려면 장면에 강하게 몰입시켜서 장면의 힘으로 몰아쳐야 하는데, 이야기 두 개를 섞는 바람에 그것도 안 됐다. 어설픈 퓨전음식 먹는 기분.
<다른 음주> - 진짜 무서운 괴담은 가장 현실적인 거라고 했던가... 자차가 있었으면 더 무서웠을지도.
특유의 스피드감이랄까, 상횡 몰고 나가는 건 좋았다. 짧은 분량 안에서 할 말도 다 했다. 그러나 마지막 결론은 뜬금포다. 공백을 주는 방식으로 이런 건 너무 나쁘다. 외부 맥락의 의존성이 너무 커서 한 번에 안 온다.
<재회> - 안나 카레니나도 앞과 뒤로만 성립하지는 않는다.
장면이 주는 말초적 쾌감이랄까, 그런 건 있다. 그러나 이게 괴이한 이야기인 걸까...
<여름 나라> - 민영이와 함께 밍밍함 2번 타자.
온실 속 화초가 가질 법한 예비적 두려움. 하지만 이건 너무 개인적인 게 아닐까 싶다.
<변신> - 역시 이분은 자기 멋대로 할 줄 알았어.
힘, 스타일! 괴담으로서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문장의 힘이 엄청나다. 김엄지는 오늘도 김엄지다.
<당신의 등 뒤에서> - 이것이 짬바임을 보여준 대선배님.
뻔한 소재, 뻔한 이야기지만 그걸 뻔하게 쓰지 않았다. 게임에 함정이 있다는 거까지야 흔한데, 그 이후에도 다시금 게임을 반복하는 구도. 그들이 말하지 않는 것. 거기에서 오는 묵직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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