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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inomia_A님의 서재
  • 2020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
  • 김금희 외
  • 9,000원 (10%500)
  • 2020-09-28
  • : 2,370

정녕 이 소설집의 소설들이 현대 한국문학의 '감수성 혁명'이자 폭발적인 젊음이라고 할 법한 게 맞나? 개인적으로는 동의하기 어렵다. 특히 대상은 '페퍼로니'가 아니라 <바다와 캥거루와 낙원의 밤>이었어야 한다.


우리는 페퍼로니에서 왔어(4/10)
-> 페퍼로니와 우리의 정체에 대해 소설은 설득을 포기한다.

<우리는 페퍼로니에서 왔어>는 족보작업에서 시작해서 포스트 세월호에서 끝난다. 그 과정의 한 가운데에 작가는 시골 강변에서 페퍼로니 피자와 맥주를 함께 마실 수 있는 젊은 사람들을 배치해 새로운 유형의 관계성과 사랑을 포착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 ‘우리’에 페퍼로니라는 이름을 붙이고자 시도한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아무것도 보여주지 못하는 막연한 이미지로 끝나버릴 뿐 페퍼로니는 소설 전체에 있어서 고작 ‘토핑’ 정도일 뿐이다. 우리 시대의 소위 새로운 감수성이 그 짭쪼름한 외국산 토핑이라는 데 나는 동의하기 어렵다.

## 우리는 왜 얼마 동안 어디에(3/10)
-> 이미지와 하고 싶은 말만 많은 지엽주의적인 소설. 서사는 완성되지 못했다.

얕기 짝이 없는 ‘깨달음’을 소설적 진실이랍시고 내세우는 허접함. 결국 마지막까지도 서사를 제대로 용접하지 못해서 인물을 억지로 말하게 함으로써 결말을 접붙인다. 유감스럽다고 하는 수밖에 없는 소설이다. 굉장히 많은 디테일이 들어가 있는데, 글쎄 디테일로 융단폭격을 가하듯이 뉴욕에 대해 설명하는 것에서 도대체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코로나 시대에 해외여행을 가지 못하는 것에 대한 대리만족인가? 이 소설은 유려한 문체로 쓰였지만 이야기로서 실패했다. 결말을 다들 갑작스럽게 느꼈을 텐데 그것은 이 소설이 서사에서 완전히 실패했기 때문이다. 꼭 모든 소설에 서사가 필수적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애초에 소설의 큰 줄기를 이주일이라는 기간 동안 두 여성의 동거로 잡은 이상 무언가 화학작용이 일어났어야만 한다. 그것을 알기 때문에 작가는 갑자기 인스타 사진 같은 마무리를 황급히 지어버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결말을 냈다고 완성적인 소설이 되는 건 아니다. 고작 SNS는 현실의 극단적인 과장이며 우리는 어떤 차별과 이해불가능성의 구도 속에서 함께 노을이나 보는 게 최선이라는 게 이 시대의 감수성이라고 할만 한가?


## 실버들 천만사(4/10)
-> 엄마와 딸의 유쾌한 야자타임.

엄마와 딸이 서로를 ~씨라고 부르는 방식과 대화를 주축으로 소설을 구성하는 방법, 무엇보다도 엄마의 이야기지만 신파로 흐르지 않은 것이 이 소설 최대의 강점이다. 그러나 그게 전부다. 이 소설은 특유의 유쾌함과 따뜻함을 보여주고 있지만 그것이 마음을 흔들 정도의 심도를 형성하는 데는 실패한다. 대사가 주과 되면서도 다른 소설과 비슷한 분량이다보니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밀도 차이 때문이기도 하고, 코로나19와 얽힌 현재 상황에서 그 ‘야자타임’이 새롭게 읽힐 여지가 더 승화된 차원에서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게 결정적이다. 퍼텐셜은 좋았지만 아쉬운 소설.

## 바다와 캥거루와 낙원의 밤(6/10)
-> 한국판 플로리다 프로젝트

이 소설의 과단성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한국 단편은 그 망할 거리두기에 집착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소설은 기본적으로 용감하다. 인물이 행동하는 것을 한국 소설에서는 오랜만에 봤다는 느낌마저 든다. 전체적인 의미망이 단조롭기는 하지만 소설을 이끌어가는 주인공의 감정선에 설득력이 있고, 서사의 밀도가 높다. 마지막에 ‘낙원 요양원’에 정말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는 정말 놀랐고 좋았다. 이 소설이 젏은 작가의 작품이었다면 감히 한국 문학의 기수라는 말을 썼을 지도 모르겠다.

## 내게 내가 나일 그때(5/10)
-> 또 하나의 최은미표 섬짓한 소설.

최은미에 관해 좋게 평하는 사람은 그녀를 한국의 이언 맥큐언이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R-19의 상황과 특유의 섬짓함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는 이언 맥큐언이기에는 너무 거리두기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고 그녀의 빌드업 방식은 독특하지만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투박함일 수 있다. 향토성이 짙게 묻어나는 나름의 시골 스릴러라고 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렇다면 이건 현대적으로 조금 더 잘 쓴 장화홍련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가?

## 들소(3/10)
-> 이 소설에 들소가 필요한 이유를 찾을 수 없다.

어린 아이를 화자로 내세웠지만 그 효과라고 할만 한 것이 미미하다. 그냥 좀 더 자유로운 시점의 모르모트 관찰자 정도. 하지만 그런 것치고는 사유도 생각도 너무 잘해서 너무 부자연스럽다. 말하고자 하는 것이 거의 없다. 그러니까 너무 빠르게 슬픔을 배워버린 어린 아이가 느끼는 블루한 감정이 이 소설의 요체이다. 그래서 우리는 들소를 설명할 수 있다. 이 아이가 유일하게  피부로 느끼는 감정, 압박감의 요체, 그것이 들소이다. 그러나 들소는 와닿지 않는다. 이미 이 아이는 애초에 아이가 아니며 충분히 사유하고 있는 아이의 탈을 쓴 모르모트에 불과하다. 들소가 인형을 들이박는다고 슬퍼하기에 우리는 너무 현대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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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을 사랑하는 우리는 선뜻입니다.
선뜻 인스타그램 : https://www.instagram.com/sunddeu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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