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속>
새로운 형태의 창작을 유려한 이미지로 표현했다. 작품은 다양한 인생의 경로를 거쳐온 습작생들과 소설가 선생님이 상호영향을 주고 받으며 작품이 빚어지는 걸 표현했다. 확실히 책 속의 두 밑줄을 통해 글을 쓰지 못하는 작가가 구원을 찾는 이미지는 퍽 감동적이라 하겠다.
소설수업이 본격적으로 유행한 게 정확히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작가의 죽음이라든지 저작권 스캔들 같은 요소들과 엮어서 생각해보면 유의미한 함의의 발견이라 생각된다.
다만 그러한 이미지의 발굴과 잘 읽히는 문체 이외에 이 소설이 성취한 게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쉽게 답하기 어렵겠다.
공동 창작의 승화는 당신에게 얼마나 새로웠는지?
<정상인>
소위 ‘플라타너스’ 식의 운동권의 소시민화 담론 이후로 한층 더 발전한 의식을 보여주는 게 흥미로웠다. 여전히 답을 찾지는 못하지만 (불행히도 사회주의와 운동권은 쇄퇘하고 있으므로) 이 소설은 그 속에서 흡사 “굿바이 레닌” 식의 멜랑꼴리와 따뜻함(우정)을 추출해 낸다. 이 소설이 그리고 있는 그 우정과 유대가, 우울과 어둠을 견디기 위해 두꺼운 텍스트로 돌진하는 청춘의 모습이, 이미 부서지고 없어진 그것들이 그리워서 조금 울컥했다.
다만 그것이 잃어버린 것에 대한 그리움으로 끝나는 건 조금 약한 결말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시위 현장을 보면서 모종의 계승 의식을 표현하는 엔딩을 설정했지만 결국 서사만을 가지고 보면 허무한 결말이지 않나 생각한다. 그들에게서 조금 더 적극적인 가능성을 발견해 냈다면 더욱 의미가 크지 않았을까.
<해마와 편도체>
노와 소의 만남은 클리셰다. 성장기의 아이가 노인을 만나 위로를 받고 결국 그 노인의 죽음과 함께 성숙하게 된다는 이야기. 이 소설은 그 틀을 충실히 따른다. 그러나 하나 중대한 차이가 있다면 이 소설 특유의 시니컬함일 것이다. 보통 아이가 시니컬한 것을 그 아이의 상처로 생각하고 어른은 따뜻하게 품어주는 형태로 설정되기 마련인데, 이 소설에선 둘 다 아주 독설가이다. 그런 캐릭터의 설정이 무척 매력적이었다. 그리고 일이 전개되는 방식, 중고 거래를 통해 만나고, 광화문을 산책하는 것이 설득력이 있어서 생각해보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는 걸 잊고 읽었다.
다만 해마와 편도체를 제목으로 달고 있으며 뇌에 관한 언급들이 소설 중간중간 나옴에도 그것이 소설에서 수행하는 역할이 적은 것은 명백한 약점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