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가지 확실한 건 켄 리우가 절대 시시한 작가는 아니라는 사실이다.
켄 리우의
소설은 절대 예상 가능한 방향으로 끝없이 들어가며 아주 미묘하게 가공된 표현의 차이를 맛보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그렇게 미묘하게
맛을 내고, 공백과 거리를 통해 별 것 없는 이야기를 있어보이게 만드는 건 사실 예전 소설의 방식이다. 카버나 줌파 라히리 같은
미니멀리스트의 방식. 그게 아직도 한국 단편에서는 주류를 이루고 있는데, 켄 리우를 보고 배울 것이 많다고 생각된다.
켄의
단편은 매섭게 선명하고 직설적이다. 알쏭달쏭한 의미를 찾기 위해 먹기 어려운 과일을 깔 때처럼 낑낑대지 않아도 된다. 그의
소설은 항상 핵심을 잘 보이는 곳에 전시하고 다른 미사여구나 군더더기 없이 바로 그 핵심에 관해 이야기한다. 이성과 과학,
분석이나 제도가 삶에서 만들어내는 부조리와 아이러니가 바로 그것이다. 과학과 논리로 뒷받침되는 소설은 현대 세계와 다를 바가
없고, 그 안의 인물들은 무섭게 현실적으로 과학과 논리 뒤에서 인간 삶의 문제를 끄집어 낸다.
이런 방식의 가장 큰 장점은
미사여구가 극단적으로 적기 때문에 주제에 직접적으로 기여하는 ‘살아있는’ 부분이 많아지고, 단편소설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반전의
반전의 반전’을 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의 소설은 앞으로 어떻게 될지 뻔히 보인다 싶으면 그 뻔히 본 지점까지 단숨에
달려가서는 한참을 더 달리며 주제를 심화시킨다. 각 소설을 보면 한 편 안에 들어가 있는 문제의식의 심도에 놀라게 된다. 이게
정말 한 단편의 심도라고?
하지만 그렇다고 켄 리우가 완벽한 작가라는 뜻은 아니다. 우리는 직접적으로 그를 테드 창과 비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테드 창의 단편 중에서도 걸작으로 뽑는 건 <지옥은 신의 부재>와 <네 인생의
이야기>인데, 그 둘에서 받은 깊은 울림을 리우의 단편에서 찾아보기는 다소 어려웠다. 어쩌면 그건스타일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굳이 나누자면 테드 창은 좀 더 정통 소설 쪽에 가까운 방식으로 소설을 쓴다. 주제가 좀 더 차분하게 내려앉아 있고 가장
결정적인 지점을 찾아 정확히 찔러온다. 반면 켄 리우는 조금 더 장르적인 작가다. 그가 실제로 정통 소설의 미학에 가치를 느끼는지
그렇지 못하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적어도 그의 소설은 테드 창에 비해 전개에 온 힘을 쏟는 것으로 보인다. 그 때문에 확실히
소설은 다이나믹하고, 아마도 스스로의 아이덴티티라고 생각하는 듯한 오리엔탈한(혹은 중국적인?) 소재들이 거부감 없이 훌륭하게
우러나온다. 그러나 아직은 그의 소설 중에서 정말 깊은 울림을 받아 하루 종일 그 속에서 허우적거리게 하는 것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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