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장원 작가는 꾸준히 어떤 거리감을 쓰고 있다. 등단작에 붙은 심사평은 이 작품에 적용해도 거의 완전히 일치한다.
“당선작인 ‘해가 지기 전에’는 작가 스스로가 소설의 흐름을 적절히 제어하면서 차분하고 치밀하게 써내려간 수작이다… 그것을 적절히 처치할 방법이 없는 사람들이 해결을 미룬 채 작은 기쁨에 골몰하는 모습이 대비되며 이 시대의 서글픈 초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성공적으로 연출해 냈다.” — 202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소설부문 심사평 중
제목에서도 확연히 드러나듯이 이 소설은 자리를 받지 못한 사람에 관해 썼다. 노영은 아픈 오빠만을 챙기는 부모의 우선순위에서 완전히 밀려났다. 요양원에 혼자 힘으로 입원한 그녀의 엄마는 그 지경이 되어서도 꿋꿋이 노영에게 관심이 없다. 그러니까 노영은 오빠를 원망했을 것이며 엄마에게는 사랑받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해서 슬펐겠다. 호주 유학 중 만난 줄리아와의 일화도 비슷한 느낌으로 정리될 수 있다. 모성에게 또다시 배신당한 것. 그러나 이번에 노영은 모성의 약점을 정확히 알고 있고, 복수심 가득한 암살자처럼 죽은 아들의 일기장을 훔쳐나온다. 그리고 소설의 현재에서 노영은 나에게 부탁해 엄마와 부루마블 게임을 시킨다. 노영이 슬그머니 빠졌지만 엄마는 그녀를 찾지 않는다. 그녀는 그런 사실을 이제는 선글라스를 끼듯이, 제스처를 취하듯이 담담하고 기계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렇게 쓰고보면 정말로 수작의 느낌이 들지만 사실 이 소설에 높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겠다. 작가 특유의 거리감각 때문이다. 위에서 정리한 것처럼 이 소설은 소설적인 정동을 갖추고 있는 것은 맞으나 실제로 위와 같이 작동하는 부분은 굉장히 적다. 서술의 밀도가 낮다는 말이다. 그게 꼭 문제인 것은 아니지만 간명하게 물 흐르듯 전반적인 서술이 심도를 전혀 형성하지 못한다는 건 문제가 있다. 예를 들어 “귀신”. 노영의 목소리가 플랫폼에서 들렸다는 나의 짧은 일화는 고작 노영이 스스로를 “귀신”이라고 발언하게 만드는 데 쓰이고 끝이다. 그런데 이 “귀신”은 소설의 심도에 전혀 기여하지 않는다. 오빠와의 과거를 보며 우리는 이미 다 알고 있는 걸 굳이 정리해주는 것 뿐이다. “귀신”뿐 아니라 다양한 소재와 문장이 그렇게 의미없이 흘러 사라진다.
이 소설의 목적성에 관해 생각해볼 필요도 있다. 소설은 노영의 마음에 관해 썼다. 그녀가 어떻게 집에서 “귀신”이 되었고, “귀신”처럼 복수했으며, “귀신”처럼 성불에 다가서는 지에 관하여. 따라서 노영의 감정변화가 이 소설의 핵이어야만 한다. 그런데 우리는 (시간이 흘렀다는 명확한 사실을 제외하면) 노영이 어떻게 엄마에 대하여 용서 혹은 담담함 혹은 어떤 태도(이것을 정확하게 쓰지 못하는 이유는 소설에 제시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에 이르게 되었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엄마와 그녀 사이의 문제적 관계에 관해서는 쉽게 파악할 수 있다. 그것은 클리셰이기 때문에. 그러나 그 귀결은 오리무중이다. 아득하고 붕 뜬 이미지만이 남았다. 나와 노영의 (현재)관계가 노영과 어머니의 관계의 미래를 암시하는 것만 같은 과거회상이 삽입되며 소설은 끝난다. 퍽 감상적인 장면이지만 그런 장면을 넣을 게 아니라 노영의 마음에 관해 써야 했던 것이 아닐까 한다. 말하자면 이 소설에는 “어떻게”가 빠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