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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inomia_A님의 서재
  • 창작과 비평 188호 - 2020.여름
  • 창작과비평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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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6-01
  • : 273

페퍼로니에는 뿌리가 없다. 애당초 동물로 만들어진 것이며 이탈리아가 원조인 음식이 우리나라에서 어떤 본을 찾을 수 있을 리가 없다. <우리는 페퍼로니에서 왔어>라는 제목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소설 중에서도 나오지만 그건 “결국 아무 데서도 오지 않았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페퍼로니피자는 강선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으로, 그녀에게 어디서 왔냐고 묻는 한국 애들에게 돌려주는 대답이다.
문제의 페퍼로니 발언은 나와 강선, 오성이 뭐랄까 조화로운 시간을 보내는 중에 발생한다. 하지만 그 조화의 바탕에는 광주의 고택, 유서깊은 집안의 족보정리를 하러 나와 오성이 왔다는 맥락이 있다. 그리고 강선은 그 유서깊은 집안의 딸이다. 따라서 그녀가 뿌리없는 페퍼로니에서 왔다는 발언은 인구통계학적 관점에서 볼 때 온당치 못하다. 그녀는 뿌리가 확실하며 바로 나와 오성의 힘으로 더더욱 확실해지고 있으니까. 그러나 그녀 개인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은 뿌리가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확실한 건 어쩌면 내가 페퍼로니피자를 좋아한다는 사실 뿐인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페퍼로니는 훗날 아르바이트가 끝나고 오성이 바그다드에 갔을 때도 다시 한 번 반복된다. 한국군이 이라크 파병을 결정했기 때문에 국제 구호 단체에서 한국인은 빠져야만 했다. 돌아가는 길에 한 꼬마가 오성의 담배를 훔친다. 꼬마를 쫓던 오성은 어디서 왔냐는 꼬마의 질문에 대면하게 된다. 오성은 페퍼로니에서 왔다고 대답한다. 그건 한국과 자신을 구별하는 발언이다.
그러니까 페퍼로니에는 많은 게 압축되어 있는 것이다. 미국 생활에 대한 강선의 그리움, 스스로 이방인이라고 느끼는 감정, 스스로를 전통과 구별코자하는 태도, 천변에서의 나른한 태도. 총체적으로는 젊음의 상태라고 할 수 있겠다. 재미있게도 그런 페퍼로니는 소설에서 한 번도 우리라는 주어에 붙어서 발언되지 않는다. 페퍼로니에서 왔다고 발언하는 주체들은 모두 ‘나’다. 우리는 없다는 젊은 여교수의 발언과 오버랩 되는 지점이다. 치즈처럼 하나로 녹아 뭉그러지지 않고 개별적으로 피자 위에 올라가 있는 페퍼로니들처럼 하나의 페퍼로니에서는 한 명의 사람만이 올 수 있다. 전체적으로는 피자 위에 있지만 모두 짜고 시큼한 페퍼로니일 뿐인 젊음은 보이지 않는 피자 도우 위에서 살아가며 몸부림치고 있다.
소설에 심도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축에서 볼 때 이 소설은 정통하며 완성도가 높다고 평할 수 있을 것 같다. 풍부한 맥락과 이미지들이 잘 구워진 피자처럼 훌륭하게 만들어져 나왔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결말의 처리에서 드러나는데, 그건 엄마의 분량이 소설에서 너무 적다는 점이 아닐까 한다. “한동안 나를 쥐고 있던 죽음의 세계”라는 말을 마주했을 때는 순간적으로 조금 당황스러웠던 것이다. 말하지 않아도 괜찮은 걸 짧게 생략하고 넘어간 것은 좋은 일이었지만 결말에서 모든 맥락을 조화시키려면 엄마에 관한 이야기가 중간중간 더 삽입되어 충실한 연결점을 확보해야 하는 것이 아니었나 싶기는 하다. 그럼에도 이건 사소한 약점일 뿐이다. 고택과 족보처럼 중후한 언어로 페퍼로니를 얘기하는 매력은 다른 곳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흥미로운 미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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