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20년 7월 초엔 박원순 서울시장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이 있었다.
망자는 말이 없고 숱한 의혹들을 남긴채 떠났기 때문에 아직도 현재 진행형인 사건이라고 볼 수 있겠다.그리고 박 시장의 죽음 이후에 벌어진 정치적인 공방에 나도 지치고 시민들도 지쳤는데 그 중에서 내가 주목한 것은 정의당 두 의원의 조문 불참 글로 비롯된 일이었다.
정의당의 두 국회의원(류호정, 장혜영)이 SNS를 통해 진상규명과 2차가해 방지를 강조하며 조문을 가지 않겠다는 글을 남겼는데 이를 보도 하는 다수의 기사에서 다분히 편향적인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몇몇의 기사에서 나타난 썸네일은 이 사안과 전혀 관계가 없는 류호정의원이 거울보는 사진으로 되어있다던가 하는 것이다. 나이 어린 이미지와 여성성의 편견의 이미지를 부각시키는 느낌은 나만 느끼는 것은 아닐테다. 당연하게도 이런 기사의 댓글들은 나이 어린 여성에 대한 비난 댓글이 다수를 이뤘다. 그 당시 조문을 불참한 의원들은 많았다. 그 쪽이 훨씬 정치적 영향력이 큰 사람들이었지만 같은 잣대로 보기보다 정의당의 두 의원의 경우 태도나 예의의 차원에서 해석했다.
김종인·안철수 대표의 조문불참은 정치적 판단 영역으로 전제하고 보도하지만 류호정·장혜영 의원의 조문불참은 그들 개인의 예의와 태도의 문제로 보는 차이다. 강제추행 등으로 복역중인 안희정 전 충남지사가 공적관계로 만난 비서를 사적관계(애정관계)로 이해한 점, 안 전 지사를 옹호했던 논리인 ‘어떻게 불륜으로 그만큼 처벌하느냐’는 것 등은 모두 남녀관계를 사적관계로 이해하는데 익숙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 장슬기, 「박원순 사건에서 '여성' 정치인을 향한 이중시선」, 미디어오늘, 2020.07.14일자.
일반적으로 어떤 '남성'이 말한다고 해서 '남성'으로 따옴표해서 해석하지 않지만 어떤 '여성'의 발언의 경우엔 '여성'이라는 따옴표에 갇혀서 해석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이런 경우를 보더라도 '남성' '여성'은 계급이 맞는 것 같다.
모니크 위티그도 『모니크 위티그의 스트레이트 마인드』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성 범주는 여성에게 딱 붙어 있기 때문에, 여성은 범주 밖에 있는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여성은 오직 성, 그 성이다. 그리고 성이 여성의 마름, 몸, 행동, 제스처를 만든다. 심지어 살인과 구타도 성적이다. 정말로, 성 범주는 여성을 꽉 옭아매고 있다.
(p. 53)
위티그의 말대로 여성에겐 한 사람이라기 보다 '여성'이란 것이 딱 붙어서 해석된다. '여자'치고 잘했다던지..스포츠에서 볼 수 있는 여제(女帝)라는 표현도 그렇고 지금은 잘 안쓰는 여류작가, 여배우[일본에선 배우가 아닌 여(배)우(女優, 죠유)라 써야 여자배우인것으로 해석한다.]등등을 봐도 그렇듯이 말이다.
위의 사례에서 보듯 안철수 전 의원도 조문을 불참을 하겠다고 말했지만 이 것은 '안철수'의 불참이지 '남성'의원의 불참이라고 보지 않는다. 언제나 한 '남성'은 한 '일반'으로 해석되는데 이 책에서도 이렇게 말했다.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추상적 형태는 소위 남성적인 젠더를 의미한다. 남성 계급은 보편적인 것을 자기 자신으로 전유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남성이 보편적인 것이 될 능력을 갖고 태어나지 않았고, 여성이 특수한 부분으로 환원된 채 태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이해해야만 한다. 보편적인 것은 지속적으로 매순간 남성에 의해 전유되어 왔고, 전유되고 있다. 이것은 마법처럼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한 계급이 다른 계급에 대해 저지르는 범죄적 행위다. 이것은 개념들, 철학, 정치학의 층위에서 수행되는 행위다.
(p. 176)
보편적인 것과 일반적인 의미를 '남성'이라는 계급이 점유하고 있는 이상 '여성'은 일반 혹은 보편 이외의 의미가 될 수 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위티그는 남성이라는 계급을 없애야된다고 주장했다.
우리 싸움의 목표는 제노사이드적인 것을 통해서가 아니라 정치적인 투쟁을 통해서 계급으로서 남성을 억제하는 것이다. '남성'계급이 사라진다면, 계급으로서 '여성' 역시 사라질 것이다.
(…)
'여성'은 우리 각자가 아니라 '여성'(착취 관계의 산물)을 부정하는 정치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형태다. '여성'은 우리는 헷갈리게 하고 '여성들'의 현실을 숨긴다. 우리가 계급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계급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가장 강력하게 유혹적인 측면을 포함해서 '여성'신화를 없애야 한다.
(p. 67-68)
남성이라는 계급이 있기 때문에 '여성'이라는 계급이 있기에 위티그는 정치적인 투쟁을 통해 계급타파를 실현해야 왜곡되어 있는 이 현실을 바꿀 수 있다고 보았다. 이 남성-여성이라는 성범주를 넘어서기 위해서 위티그는 '레즈비언'을 말했다.
내가 알기로 레즈비언은 성 범주(여성과 남성)를 넘어서는 유일한 개념이다. 왜냐하면 지시된 주체(레즈비언)는 경제적으로나 정치적 혹은 이데올로기적으로 여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성을 만드는 것은 남성에 대한 특정한 사회적 관계, 우리가 이전에 노예 상태라고 불렀던 관계, 경제적 의무뿐만 아니라 개인적이고 물리적 의무를 의미하는 관계("강요된 거주지", 가내 강제 노역, 부부 관계의 의무, 제한 없는 아이의 생산 등), 레즈비언들이 이성애자가 되거나 이성애자로 남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탈출한 관게다.
(p. 74-75)
이 위티그의 '레즈비어니즘'은 당시의 페미니스트들에게도 충격을 주었다고 하는데 30-40년이 지나 '남성'인 내가 읽어도 이 새로운 시선에 놀라웠다. 아직도 이런 주장은 '급진적'이라고 분류되어 소수적 관점일지라도 이런 주장에 귀를 기울어야 하는 이유는 미래에 언젠가 이런 관점들이 지금보다 더 진지하게 논의해야될 순간을 맞이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지금은 '급진적'이었지만 나중엔 이 글보다 더 급진적인 관점들이 나타나 이글이 '보편적'이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아직도 안 읽은 다양한 관점들의 페미니즘 책이 너무 많다. 나도 앞으로 다가올 새로운 미래를 당황하지 않고 맞이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이제껏 해왔던 행동들과 생각들을 반성해보기 위해 지금 페미니즘 책을 읽는다. 이 책은 전혀 두껍지도 않고 판형도 작은 책인데 비해 위티그의 철학적인 표현과 단어가 많이 쓰여져 있기 때문에 쉬운 책은 아니다. 그럼에도 위티그가 주장한 '유물론적 레즈비어니즘'은 이 책을 통해 머리 속에 이렇게 각인이 되었다.
참고
미디어 오늘, 박원순 사건에서 '여성' 정치인을 향한 이중시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