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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그렇듯.

예전에 경제학 배운다고 노동경제학쪽에 관심을 가졌던 적이 있었다. 

노동경제학에서 중요한 관심주제중 하나는 임금격찬데 그 중 '성별에 따른 임금격차'는 설명하지 않아도 일반사람들도 존재하다는 걸 다 안다. 왜 생길까는 지금도 여러가지로 경제학계에선 연구하고 있지만 완벽한 대안은 만들어내지 못하는 것 같다. 몇몇 중엔 남성과 여성의 몸의 차이, 즉 신체에서 나오는 선천적인 차이로 인해 남성은 뭔가 육체 노동영역(1,2차 전통적인 산업노동)에 종사하게 되고 여성은 보조적인 역할 예를 들면 돌봄이라던지 가사영역, 서비스영역에 종사하는 비중이 높다보니 격차가 날 수 밖에 없다는 해석을 하기도 했다. 즉, 이부분이 경제학에서는 설명할 수 있는 격차라고 불리는 부분인데 하지만 경제학은 왜 성별 분업이 이루어졌는지 신체적 특징때문에 그렇다고 했지만 완벽하게 설명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때 당시 나는 여성에게도 노동시장에서 공평한 기회를 주어 좋은 일자리에 많이 유입이되게끔하고 정치영역에도 여성이 많이 진출해서 여성 친화적인 정책을 많이 만들면 괜찮아지지 않을까 생각을 했었다.











   




정부에 압력을 가해 여성에게 좀 더 많은 사회 복지 혜택을 주도록 하는 것을 통해, 혹은 노동시장에서, 특히 좋은 일자리에서 여성에게 평등한 기회를 요구하는 것을 통해, 혹은 여성이 정치나 정책 결정 과정에 더 많이 참여하는 것을 통해 여성해방을 이룰 수 있다고 기대했던 페미니스트는 모두 기대가 산산이 무너져 내리는 경험을 한다. 그들은 평등과 자유에 대한 기본적으로 민주주의적인 권리도, 여성과 관련해서는, 여건이 좋을 때만 보장되는 권리라는 것을 깨닫는다. 이런 권리는 보편성을 특징으로 한다고는 하지만, 자본이 축적을 우선으로 내세우면서 유보시키겠다고 하면 유보되고 만다.

(p. 69~70)


위의 이런생각이 얼마나 순진했냐면 이 책에서도 나오지만 이전에도 분명 이런 생각했었고 잠시 이뤄진 적도 있었지만 결국 여건 좋을 때 선심성으로 내놓았고 그마저도 다시 퇴보한 적이 많았다는 역사적 사실이 있었다. 

왜 매번 이런 결과로 이어질까? 그것은 남성에 의한 '착취'라는 근본적인 고리를 끊어내지 못한 것이다


우리가 남녀관계를 말할 때 착취를 말하지 않는다면, 억압과 종속에 대한 우리의 이야기는 공중에 붕 뜬 것이 될 것이다. 얻는 것이 없다면 왜 남성이 여성에 대해 억압적이겠는가? 착취와 관계되지 않는 억압 혹은 종속은, 그렇다면 순전히 문화적 혹은 이데올로기적 문제가 된다. 어느 정도는 타고난 남성의 공격적이고 새디스트적 경향 등을 언급하지 않고는, 그 근원을 알아낼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착취가 생물학적 혹은 심리적인 것이 아니라 역사적 범주라고한다면, 그 기초에 남녀관계가 자리하고 있다. 이는 가부장적 부족과 사회에 의해 역사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따라서 달라 코스타와 마찬가지로, 나는 여성의 착취에 세 가지 의미가 있다고 본다. 여성은(경제적으로만이 아니라, 인간적으로서도) 남성에게 착취당한다. 그리고 자본에 의해 가정주부로 착취당한다. 만약 여성이 임금 노동자라면 [자본에 의해] 임금노동자로서도 착취를 당한다. 그러나 이 착취조차도 다른 두 가지의 연결되어 있는 착취 형태에 의해 규정되고, 강화된다. 

(p.107)


저자인 마리아 미즈는 남녀관계를 착취를 빼놓고 설명할 수 없다고 하였으며 이는 생물학적인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만들어 진 것이라고 하였다. 달라코스타를 인용한 부분을 읽다가 비슷한 주장을 다른 책에서 본 기억이 나는데... 아! 찾아보니 작년에 읽었던 『캘리번과 마녀』에서 였다.
















달라 코스타의 말에 따르면 임금노동자의 착취, 즉 "임금 노예제"는 여성의 가정 내 무임노동이라는 기둥 위에 세워졌고, 이 무임노동이 임금 노예제의 생산성의 비결이다(1972:31). 따라서 자본주의 사회의 여성과 남성의 권력 차이는 가사노동이 자본주의적 축적과 무관하기 때문도 아니고, 문화적 기획이 영원히 존속하기 때문도 아니다. 특히 여성의 삶을 지배했던 엄격한 규칙들을 고려하면, 가사노동이 자본주의적 축적과 무관하다고 할 수 없다. 오히려 남녀간의 권력차는 특정 사회적 생산체제의 결과로 이해해야한다.

(캘리번과 마녀, p. 21)


『캘리번과 마녀』의 서문에도 적혀있듯이 특히 자본주의적 축적에서 이러한 여성의 무급 '가사노동'이 필수적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한 달전에 읽었던 『보이지 않는 가슴』에서도 비슷하게 말하길 보이지 않는 무급의 가사, 돌봄 노동으로 인해 자본주의경제가 돌아갈 수 있다고 했다. 

















결국, 역사적으로 볼 때 남녀관계는 남성의 여성'착취'를 빼놓고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 나의 순진한 생각과 다르게 여성에게 평등하게 기회를 준다거나 여성이 정치적 힘을 가진다고해서 근본적인 해결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그럼 어떻게? 우선 '착취' 역사를 좀 더 정리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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