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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레카의 사진처럼 읽는 서재
  • 소심한 사진의 쓸모
  • 정기훈
  • 15,300원 (10%850)
  • 2019-11-20
  • : 179

시를 쓴다고 다 시인이 아니듯이, 나도 사진을 찍어도 사진가는 아니다. 그런데, 누가 정립하고 할 것도 없이 굳이 지칭하자면 사진 찍기를 애호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고 정의 내리고 싶다. 내가 찍는 대부분의 사진에서 사람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사람이 들어간 사진을 제대로 찍기가 무척 난감하고 어려워서이기도 하다. 의도적으로 피하고 애써 프레임 속에 사람을 넣기를 주저한다. 사람이 들어간 사진은 사람이 없는 사진보다 꽤 어렵다고 생각한다. 사람이 들어간 사진은 사람의 직간접적인 스토리가 들어갈 수밖에 없기도 하고, 또 사람의 관계와 일과 존재와 그 삶의 방식과 태도 등 여러 가지 스토리가 사진의 파사드에 들어가야 하는데 이걸 두려워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왜 두려움에 대한 회피일까. 그래서 시처럼 차라리 사람을 뺀 사물의 은유를 통해서 사람이 없어도 사람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훨씬 다가서기가 수월하다고 판단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또한, 직접 부딪혀서 도출할 이야기에는 사람의 살고 죽는 무수한 문제가 사진에 들어가는데 전면적인 대면이 두렵기도 하다. 문제를 회피하고 그 문제에 답을 정확히 낼 자신도 없다.

 

이 책에는 많은 사람이 등장한다. 그 많은 사람들의 주제가 이른바 노동문제에 포커스가 맞춰져 있다. 이 책에 나오는 사진을 찍은 작가가 노동 신문사의 기자 출신이었으니 어쩌면 직업적 일환이기도 하고 직업으로써 카메라를 들고 취재라는 과정 속에서 녹아든 사람들의 이야기를 나타내기도 한다. 직업가이자 사진가로서의 그의 사진은 어쩌면 아주 열심히 일한 표정을 사진에서 읽을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사진작가는 노동문제에 대해 해결하겠다는 답을 내리지는 않는다. 먹고사는 문제의 난제를 부각을 시키는 일이 작가가 할 일이다. 보도를 통해서 사진을 담는 목적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사는 문제의 답을 도출하고 해결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그 문제에 대하여 공감대를 얻고, 문제의 본질을 확산시키고 개인의 문제가 결코 개인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구성원들 간에 먹고사는 문제이자 각자가 근로를 하든 노동을 하든 자본주의 사회에서 반드시 무엇엔가 자신의 정서를 팔든 몸을 팔든 시간을 팔아서 급부로 받은 자본을 통해서 사는 방식에서 얼마나 공정함과 사회적인 부조화에 대한 이야기를 사진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노동에 대하여 각자의 이해를 넓히고 이에 따라 선거에서 법적이며 제도적인 접근의 답을 원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는 대부분의 난제가 각자의 처지와 형편에 따라 이해가 상충될 때이다. 그래, 이해의 충돌. 공통의 협의는 보편성을 띠지만 개별적이고 파편적 이해의 관계는 상당히 충돌하는 문제들이다. 건물주가 있으면 임차인이 있고 집주인이 있으면 임차인이 있고 기업의 오너가 있으면 종업원이 있고 판매자가 있으면 소비자가 있듯이 내가 어떤 상황에 처하느냐에 따라 이해의 폭은 늘 갈리기 마련이다. 여기에서 기업주와 노동자의 관계를 사진은 통절하게 보여주고 있는 이해의 반목된 현장의 사진이라는 점이다. 흔히 사진가의 시선은 공정해야 한다고 하지만, 결코 공정하지는 않다. 삶과 업의 주관의 가치가 프레임에 담기기 마련이다. 다분히 사진은 소속과 관계와 위치와 현상에 대한 작용점이다. 그렇다고 해서 어느 사진가 중에서 기업가의 입장에서 취재하고 사진을 담은 작가는 거의 없다. 어쩌면 대기업에 하청 납품하는 사장님도 기업가이지만 그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사진은? 글쎄 잘 보이지도 않는다. 아니면 대기업가의 사장님의 사진도 만나기 아주~ 어렵다. 길거리에서 만나는 노동자의 파업은 많아 그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도 기업가의 목소리는 같은 비중으로 다루는 것도 없다. 의아하긴 마찬가지다.

 

이 책 제목이 소심한 사진의 쓸모라고 했는데, 하지만 여기의 사진들은 결코 소심하지도 않고, 특히 사진의 쓸모에 대해서는 여기 사진은 어디 신문에 기고된 사진이기에 그 목적에 걸맞는 쓸모가 다 있다. 신문에 사진이 빠지면 안 되듯이 말이다. 현장에 직접 나간 갈등의 순간, 눈물과 불공정함과 부조리한 삶의 아픔에 대해 취재라는 형식으로 침투된 작가는 결코 소심하지 않다. 앞서 서두에서 밝혔듯이 나 정도는 돼야 소심하다 할 수 있고 내가 찍는 사진의 쓸모는 대체 이해조차 할 수없는 난해한 추상화처럼 일그러져 있는 현상을 찍고 있으니 더더욱 쓸모는 없다. 그럴지도 모르겠다. 나는 사진과 직업을 철저히 분리하며 사진을 찍었다. 직업이 직업이니 만큼 나도 현장에 나가서 카메라 들고 현장을 누비며 회사의 현장 사진을 사진 작품처럼 얼마든지 담을 수 있다. 그러나 난 현장에 나가서 사진을 찍고 싶지 않다. 회사 내 건설현장의 스토리야 찾으면 얼마든지 발견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물론 이 현장에서 일하는 인부들이나 현장의 관계자 전부 다 업무적으로 안다 해서 난 그들에게 카메라로 사진을 잡고 싶은 마음은 없다. 이른바 다큐멘터리 사진은 자신의 업과 직접 관계한 곳에서는 다른 누구보다도 접근이 허락되어 있거나 가까이 접근이 용이하다마는 나는 현장에 나갈 때는 카메라를 의도적으로 가지고 가지 않는다. 자신의 업을 이용해서 자신의 사진 작업을 취하고 싶은 마음도 없다. 하려면 한도 끝도 없는 사진들일 것이 뻔하기도 하고 카메라를 의도적으로 너무 가까이 들이대는 것도 어쩌면 일종이 간섭이 될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나는 사진 기자도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고 하기야 작업 현장에는 관계자가 아니면 아무나 출입도 할 수 없으니까 얼마나 신분상 쉽게 업무차라는 핑계를 대기에도 적절하다. 그러나 나는 카메라 들고 설치는 것은 작업자들에게 예의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너무 깊숙히 개입된 사진을 나는 담을 수가 없다. 소심과 쓸모에 대한 사진은 나에겐 참 어려운 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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