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도 나는 집으로 간다』 - 80의 노장 시인이 슬럼프에 빠진 2023년 한 해 동안 쓴 시들. 다작의 노시인은 교사로 오랫동안 몸담았다. 청록파 시인 박목월의 제자이기도 하다. 꾸준히 작품활동을 해온 시인은 대기만성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광화문 글판에 시(풀꽃)가 올라가면서 대중적인 시인으로 등극했다. 그때가 67세였다.
■ 이번 시집은 시인의 나이가 나이인 만큼 삶과 죽음, 인생을 정리하고자 하는 마음가짐 등 생의 마무리 단계에 관한 내용이 많다. 시는 읽을 때마다 느낌이 달라 그때그때 감동을 주는 부분이 다르다. 한번 읽는다고 완독했다고 생각지 말아야 한다. 찻잎 우려내듯이 반복해서 읽어야 내 시가 되는 것이다.
■ 노시인의 인생을 달관한 교훈들이 시에 빼곡하게 녹아있다. 생활밀착형 시다. 읽으면서 연신 고개가 끄덕여지는 것이다. 정작 젊었을 때 깨달았으면 좋은 일들을 시인도 우리도 시인은 시를 쓰면서 우리는 시를 감상하며 느끼는 것이다. 로또 번호를 미리 알지 못하는 것처럼 그때는 복덩이였는데 모르고 지나간 것들에 대한 교훈, 후세들아! 선배들의 전철을 밟지 마라! 시인은 외친다.
■ 시인의 삶을 보면서 한 가지 일을 꾸준히 잘 해내는 것은 매우 어렵지만 중요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그렇게 하다 보면 세상이 알아주는 타이밍이 분명히 있을 것이라는 믿음도 생겼다. 시인의 최고 히트작 풀꽃과 이 시집 첫 완독에서 나를 흔든 시를 몇 수 옮겨 적는다.
■「풀꽃 - 나태주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책 속에서 인상 깊은 문장 인용]
■ 화분 식물
잘 자라지 않는다.
쉽게 시든다.
거름 부족이거나
햇빛 부족이 아니라
물 과잉이 원인이다.
오늘날 우리들 삶이 그렇다. (31p)
■ 「흐느낌」 후반부
가늘게 떨면서
흐느끼는 벼들이 익어가는
가을 들판을 바라보며
한 번인들 흐느껴 보았는지
올가을엔 정말로
흐느껴 볼 일이다. (107p)
■ 그냥
나는 네가 보고 싶어
보고 싶어
그냥 보고 싶어.
나는 네 목소리가
듣고 싶어
그냥 듣고 싶어
뭐하니?
지금, 뭐 하고 있니?
누구랑 있니?
묻고 싶어
그냥 묻고 싶어
나도 잘 있다고
숨 잘 쉬면서
잘 있다고
말해주고 싶어
그냥 말해주고 싶어 (143p)
■ 연말 인사
인생에서 마침표는 곤란해
느낌표나 물음표도 불편해
쉼표나 말줄임표 정도가 좋아
그렇게 하지 않아도
언젠가는 마침표가
찍히는 게 인생이니까. (155p)
■ 「일보다 사람이」 후반부
일보다 사람이 어렵다.
어제 누군가한테 들은 말 (170p)
■ 정신 좀 차려라
가령 둘이 만나
5만 원 내고
식사를 했다고 할 때
그 사람 위에 5만 원
모두 썼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어불성설, 망발이다
왜 그 사람 위에
5만 원 썼다, 그러는가
우선 5만 원 가운데
2만 5천 원은 내 밥값으로 나간 돈이고
다만 2만 5천 원만 그 사람 위에 쓴 것이다.
더구나 나 혼자 밥을 먹었다면 어쩔 뻔했나
그 사람 위에 쓴 2만 5천 원은
내가 자칫 혼자 밥을 먹을 뻔했는데
그 외로움과 쓸쓸함을 덜어준 값이다
그렇다면 나는 한푼도 그 사람 위해
돈을 쓴 게 아니라 오로지
나를 위해 돈을 쓴 것일 뿐이다.
정신 좀 차려라. (173p)
■ 문득
밖에 누구 왔소?
창문 열면 아무도 없고
다만 바람 소리
나뭇잎 소리
가을이 문득
나 보고 싶어
잠시 와서
서성이다 갔나 보다. (220p)
■ 그래
안 돼
안 돼요
안 된다니까
안 된다는 말을 하도
많이 하고 살아서
안 된다는 말을
하도 많이 듣고 살아서
나이 들어 이제는
무엇이든지
그래 그래 그래
안 되는 일도
그래 그래 그래
그러다 보니
안 되는 일도
되는 일이 되는 때가 있다. (229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