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살아가는데 있어 규율은 필요하다. 그에 못지않게 인간에 대한 가여운 마음, 배려하는 마음 또한 있어야할 것이다. 신을 섬기고, 믿음을 가진 이들을 이끌어야하는 신부에게는 그것들의 조화가 더더욱 중요하지 않을까 싶은데,홀리 크로스 교구에 새로 부임한 에일노스 신부는 그렇지 못했다. 정해진 규율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것은 용납하지 못했던 에일노스 신부에 대한 교구민들의 원성은 높아져갔다. 수도원 원장은 중재를 하려고 했지만, 에일노스 신부는 자신의 신념을 꺾지 않았다. 성탄절 아침 저수지에서 시체로 발견되었지만, 교구민 그 누구도 그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았고, 오히려 반기는 분위기였다. 정황상 타살로 보였고, 캐드펠 수사는 수사를 해나가기 시작했다. 그것이 하나의 축이라면 다른 하나는 황후파인 젊은 남자를 찾아내는 것이었다. 그것은 행정관으로 있는 휴 베링어의 몫이었다.
수도원 앞 대로에 내려앉아 사소한 작은 죄를 찾아내고 그 죄인들을 파멸로 몰아가는, 썩은 고기를 찾아다니는 갈까마귀 같았다고. p93
캐드펠 수사가 에일노스 신부를 두고 한 말이었다. 사소한 작은 죄는 관대한 마음으로 융통성을 발휘해 줬다면 많은 이들을 파멸로 몰아가지 않았을테고, 자신을 구원하는 길이 되었을텐데. 에일노스 신부는 마지막 순간 '난 올바른 일을 하도록 애썼을 뿐인데, 난 아무런 잘못도 없는데'라고 생각했을까? 방관자로서 누군가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면 그 사람은 도덕적이든, 법적이든 책임을 져야하는걸까? 뿌린대로 거둔다는 말이 있지만, 한 인간의 죽음 앞에서는 그 말은 섬뜩하게 들려온다.
그러나 완벽을 향한 추구조차도 다른 이들의 권리와 요구를 침해한다면 죄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의 보상을 얻는 데 급급해서 다른 사람을 보지 못하고 그를 외로움과 절망 속에 버려두는 것보다는, 그를 일으키느라고 옆길로 벗어남으로써 조금 실패하는 편이 더 낫습니다. 혼자서 거침없이 나아가는 것보다는, 절뚝거리고 잘못을 저지르면서도 비틀거리는 다른 이들을 붙들어주려 애쓰는 것이 더 낫습니다.-p265
똑같이 자신의 신념대로 움직였지만 니니언의 삶은 달랐다. 그들의 차이는 신념보다는 타인에 대한 사랑의 문제라고 해야할까? 소설의 시간적 배경은 1142년 잉글랜드 군주자리를 두고 스티븐왕과 모드 황후가 내전을 벌이고 있는 상황이다. 공간적배경이 되는 슈롭셔주는 스티븐왕의 진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숨어든 황후파의 젊은이를 찾아내는 것이 행정관 휴 베링어의 몫이었고, 그 젊은이가 니니언이었다. 그를 둘러싼 캐드펠과 휴 베링어의 입장을 보면 이성적이면서도 감성적이다. 11권(11권을 건너뛰고 12권을 읽었다.)을 읽고 내가 이 소설을 좋아하는 이유가 뭘까 생각해봤다. 첫째는 당연히 캐드펠 수사가 사람을 믿음으로 대하는 방식, 뛰어난 관찰과 통찰로 사건을 해결해내는 것, 둘째는 서로를 존중하면서도 자신의 본분을 잃지않는 캐드펠과 휴 베링어의 케미, 마지막으로는 캐드펠이 정원사, 약제사로서 허브밭을 가꾸는 모습이다. 아름다운 허브향이 전해져오는것같은 순간들이 좋다. 왠지 이 시리즈를 읽는 시간들은 힐링이 되는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