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초급 한국어>가 전하는 감정선이 너무 좋아서 연달아 읽게 되었다. 중급이면 수준이 놓아지는 법인데, 그래서일까? 더 맘에 드는 글이었다. 미국에서 돌아와 한국에 정착하게 된 문지혁은 헤어졌던 연인 은혜와 결혼을 했다. 아이가 생기지 않아 힘들었던 시간을 지나 어렵게 아이도 얻었다. 정식 등단은 아니었지만 두 권의 책을 낸 작가도 되었다. 지인의 소개로 강원도에 있는 대학에 글쓰기 강의를 맡고 있었다.
<초급 한국어>에서는 한국어 강의를 하는 장면들이 교차되었다면, 중급에서는 글쓰기 수업이 등장했다. 강의실에서 글쓰기 강의를 듣고 있는 기분이다. 글을 쓰기 위해서는 문학 작품들을 분석해보는 것도 당연한 일일터라 문학 작품들에 대한 강의가 너무 재미있었다. 글쓰기 수업은 듣기에 힘들겠지만, 저런 문학 작품을 다루는 수업이라면 얼마든지 들을 수 있겠다는 맘이 들 정도로. 안톤 체호프의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에 대한 강의는 자기가 처한 입장에 따라서 주인공의 삶에 공감하기도, 돌을 던지기도 할 수 있음을, 내 경험이 문학 작품을 읽는 커다란 열쇠가 될 수 있음을 한 번 더 생각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소설이라는 실험실에서 우리에게 허락된 것과 허락되지 않은 것은 어떻게 구분해야 할까요? 소설의 인물들은 옳고 바르고 정의로운 인간이 아니라, 실패하고 어긋나고 부서진 인간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애초에 소설이란 윤리로 비윤리를 심판하는 재판정이 아니라, 비윤리를 통해 윤리를 비춰보는 거울이자 그 둘이 싸우고 경쟁하는 경기장이 아닐까요?
-p94~95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을 비롯해 롤랑 바르트의 <애도 일기>,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소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카프카의 <변신>에 대한 강의와 커트 보니것의 소설 <제 5도살장> 에 등장하는 기도문을 읽는 동안 그 소설들이 머릿 속에 떠다녔다. 소설을 읽고 있는데 문학강의를 듣고 있는 기분이라니, 이렇게 좋을 수가. 기도문도 여러 번 읽고 있었다.
하나님,우리에게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평온함과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꾸는 용기와
언제나 이 둘을 분별하는 지혜를 허락하소서 - p 122
문학과 가족. 가족은 결국 실질적인 삶의 모습을, 문학은 삶을 담고 비추는 거울임을. 묘하게 대비시키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자신과 아내라는 점이 결혼으로 선을 이루고, 아이가 태어남으로써 삼각형이 만들어졌다. 그 가족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 것인가? 그들의 일상과 아빠와 엄마 지혁이 만들어낸 삼각형의 삶은 가족이라는 이름의 삶의 모습을 돌아보게 했다. <초급 한국어>에서부터 엄마에 대해서는 양가적인 감정이 느껴졌었다.
엄마는 사라진 게 아니었다. 죽은 것도 아니었다. 엄마는 내 안에 있었다. 바로 저기, 조금 전에 옆으로 누워 찍은 사진 속에 있었다. 에스자로 휘어져 있어야 할 곳에서도 꼿꼿히 서있는, 어둠 속에서도 하얗게 빛나고 있는, 똑바르고 반듯해서 아픈, 엄마. 내 가장 깊은 곳,나의 기둥, 나의 백본(back bone).
끊임없이 등장하는 엄마에 대한 기억들.하나로 정의되지 않는 그 감정들이 왠지 지혁을 쓸쓸하게 만드는 요소가 아닐까 싶었다. 딸 은채와의 시간들은 가족이라는 공동체에 대한 삶에 대해 자꾸 돌아보게 했는데, 아이들을 다 키운 입장에서 예전의 감성을 깨우는 소중한 시간들이 되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문장이 하나 있었다. [ '비어 있음'이란 있음의 가장 쓰라린 형식이다. ] 는 문장을 자꾸 곱씹게 된다.
책을 다 읽고 다시 펼쳐보았다. 어디를 펼쳐도 왠지 정이 가는 문장들이다. 차분히 가라앉는 이 느낌. 소설의 여운이 상당히 길것같다. 언어가 만들어 낸 문학의 세계. 그 무한한 깊이를 느끼게 하는 힘이 있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