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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기록
  • 지킬 박사와 하이드 (반양장)
  •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 9,000원 (10%500)
  • 2008-05-26
  • : 2,710

지난 주말에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를 보고 왔다. 큰 아이가 중학생이었을즈음 내한 공연으로 본 적이 있지만 내용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홍광호가 부르는 confrontation이 정말 기대가 되었는데, 역시나 노래는 따라올 사람이 없을 정도로 환상적이었다. 하지만, 극 자체는 조금 지루했고, 배우들의 연기도 조금씩은 어긋나는 느낌도 있었다.  너무나도 익숙해서 다 알고 있는 듯한 소설 <지킬 앤 하이드>를 뮤지컬 본 김에 읽어봤다. 딸이 책과 뮤지컬은 완전히 다른 내용이라고 했는데, 정말 그랬다. 

뮤지컬에서는 지킬이 하이드라는 인격체를 만들게 된 이유가 아버지 때문이었다. 정신질환으로 자신을  잃어가는 아버지를 보면서 사람의 정신에서 선과 악을 분리할 수 있는 치료제 연구를 시작했다. 이사회의 반대로 임상실험을 할 수 없게 된 지킬은 스스로 실험대상이 되었고, 악으로 가득 찬 하이드가 탄생했다. 이사회 임원들을 살해하는 등 하이드는 점점 강해졌고, 하이드를 통제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른 지킬은 결국 자살이라는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했다.  약혼녀 엠마, 술집에서 만난 화류계 여자 루시라는 인물들도 등장시켜 지킬의 사랑, 고뇌와 함께 비극을 극대화 시키는 역할을 했다. 

소설은 전혀 달랐다. 등장인물도, 하이드를 탄생시킨 배경도. 단지 자신의 쾌락을 위해서였다. 지킬이 죽은 후 친구에게 남긴 지킬의 고백으로 사건의 전말을 알 수 있었다. 경제적인 풍요, 훌륭한 신체, 다른 이들의 존경, 무엇 하나 모자람 이 없었지만 쾌락을 탐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었던 지킬이었다.

내가 뿌리 깊이 이중적이라 해서 위선적인가 하면 그건 전혀 아니다. 나의 두 가지 모습 모두 진실한 것이었다. 자제심을 버리고 부끄러운 일에 뛰어드는 나 역시, 환한 태양 아래 지식의 증진 혹은 슬픔과 고통의 경감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나와 다르지 않은 내 자신이었다. -p106

나는 생각했다. 만약 각각의 본성을 별개의 개체에 담을 수 있다면 , 참을 수 없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롭게 사는 일이 가능해지지 않을까? 부조리한 존재는 그의 고결한 쌍둥이의 열망과 자책으로부터 해방되어 그만의 길을 가고, 정의로운 존재는 흔들림 없이 확고하게 높은 곳을 향한 그의 길만 가면 될 것이다. 그는 선행을 하는 가운데 기쁨을 느낄 것이며, 더 이상 이질적인 악마가 행하는 불명예 탓에 괴로워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들 모순되는 한 쌍이 함께 묶였다는 것은, 고뇌하는 의식이라는 자궁 속에 이렇게 극과 극인 쌍둥이가 계속 갈등하며 함께 지내야한다는 것은 인류가 받은 저주였다. -p107

실험에 성공하고 두 인격으로서 살게된 지킬은 하이드가 저지른 참혹한 짓들을 알게 되었고, 점점 하이드의 영향력이 커져가는 것을 느끼며 지킬은 괴로워했다. 인간에게는 악함보다는 선함이 더 강한 것 아닐까싶었다. 아니면, 역으로 하이드가 강해지고 있었다는 것은 악이 선보다 우위에 있다는 뜻이었을까? 우리가 악인이라고 못박은 사람에게 선함은 없을까? 착한 사람이라고 칭송하는 이에게 악함은 전혀 없는걸까? 선과 악을 이분법적으로 나누기는 힘들것 같다. 

소설에서 와 닿는 두 가지가 있었다. 당연 첫 번째는 지킬의 고백을 통한 인간의 심리를 들여다보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작가의 런던의 풍경들을 묘사하는 장면이었다. 런던 뒷골목의 스산함이 그대로 느껴지는 문장들이 좋았다. 단편도 두 편 수록되어 있었는데, <시체 도둑>은 메리 셸리의 '프랑켄 슈타인' 한 장면을 , <오랄라>는 브램 스토커의 '드라큘라'를 떠올리게 했다. 쾌락과 영생을 추구하는 인간의 욕망을 드러내는 이야기들이 공포와 맥을 같이하고 있다는 것이 묘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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