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시절, 친구 하나는 자기는 조선일보만 본다고 했다. 다른 신문들이 가볍게 입을 놀리며 방정을 떨어도, 조선일보는 진중하게 자기 자리를 지키며 섣부른 판단을 하지 않는다는 거다. 그래서 오보 비율도 적고, 품격있는 신문이라는 게 녀석의 주장이었다. 사실, 친구의 주장일리 없었다. 당연히 그것은 조선일보를 보는 녀석 아버지의 입장이었으리라. 그런데, 글쎄, 조선일보가 그랬던가? 내가 고등학교를 다닐 무렵은 문민정부가 막 들어서던 시점이었다. 92년 12월 11일, 초원복국집 사건이 벌어졌다. 박근혜 정부에서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고 있는 것으로 지목되는 당시 법무부장관 김기춘이 지역감정을 조장하라며 부산지역 주요 기관장들을 모아 연, 명백한 선거법 위반모임이었다. 모임의 내용이 폭로되자 심지어 노태우 정권마저 그 모임에 참석한 부산시장을 해임하고 부산지방경찰청장과 안기부지부장, 기무부대장을 직위해제시켰다. 그런데, 조선일보는 ‘김영삼 구하기에 앞장을 섰다’. “보수 언론 가운데 특히 조선일보가 김영삼 구하기에 앞장을 섰다. 그 신문은 초원복국집 사건이 명백한 선거법 위반이라는 사실을 외면한 채 국민당이 ‘도청’을 한 사실이 더 심각한 범죄라는 논조를 펼쳤다”(372페이지) 이거, 뭔가 최근 같은 드라마를 본 것처럼 유사한 장면이 막 떠오르고 그렇지 않은가?
김영삼이 대통령이 된 이후에는 어땠던가? 김영삼이 정치적으로 갈지자 행보를 보이며 논란이 될만한 멍청한 말들을 쏟아내느라 지금은 신망을 잃었지만, 처음 대통령이 됐을 때의 그는 그렇지 않았다. 1993년 8월, 그가 깜짝쇼로 단행한 금융실명제는 한국의 경제체질 개선에 한 몫을 단단히 한 쾌거였다. 그런데, 그를 대통령으로 만든 일등공신인 조선일보는 어땠더라? 같은 해 8월 22일자 김대중 칼럼을 보자. “새 정권은 재산 공개로 정치인들을 부도덕한 집단으로 전락시키고 말았다.(...) 관료 역시 재산 공개와 사정으로 얻어맞고 ‘고통 분담’으로 실질적인 손해를 입고 있는데다 관리로서의 인센티브마저 잃어가고 있다.(...) 기업인은 이번 실명제로 지리멸렬 상태이다.(...) 특히 중소기업인들은 실명제라는 ‘핵폭탄’을 맞고 어떤 배신감마저 느낀다고 할 정도이다”(377쪽) 20년의 세월이 지났다지만, 여전히 그 장렬한 코믹함은 잃지 않았다. ‘관리로서의 인센티브’ 운운하는 대목은 김대중 씨가 개그에도 욕심이 있었다는 사실을 방증하는 것 아닐까?
한국언론의 역사를 기술한 책을 놓고, 너무 한 언론사에만 지나치게 지면을 할애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지만, 사실 ‘일등신문’만을 난타할 일은 아니다. 식민지 시대부터 군사독재와 민주정부에 이르기까지 짧지 않은 세월동안, 언론이 보여준 교언영색, 지록위마, 표리부동, 호가호위, 권모술수, 양두구육, 어불성설, 일구이언, 후안무치한 행태들을 떠올리면 이 책에서 보여준 언론의 역사를 하나하나 곱씹으며 잊을 수가 없다. 그럼에도 현장에서 양심과 언론의 자유를 위해 뛰고 있는 언론인들을 보면 잠시의 희망을 갖는다. 물론, 이내 그들이 처해있는 객관적인 상황을 떠올리고 암담해지는 경우가 부지기수지만.
대학 1학년 교양국어 시간. 강사는 우리에게 한겨레신문과 조선일보를 비교해서 읽어보라고 했다. 한 사건을 두고 두 개의 매체가 어떻게 보도하는지를 살피면 언론의 공정성이라는 것이 얼마나 우스운 것인지 알게된다고 했던 것 같다. 또, 객관적인 글쓰기라는 것이 얼마나 가 닿기 어려운 것인지 보여줄 거라고도 했다. 과연, 두 매체는 같은 사안을 이야기하는 데도 전혀 다른 말들을 쏟아냈다. 언론이 못 믿을 구석이 있다는 거, 조선일보가 친구가 말한 것처럼 품격있는 매체가 아니라는 걸 이때 적나라하게 깨달았다.
권불십년이라 했건만, 선출되지 않은 권력 언론은 50년, 아니 100년의 역사를 두고 한국사회에 강력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우리가 이 책을 허술히 넘기지 않고 또렷하게 기억해두어야 할 이유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