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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호님의 서재
  • 심야식당 1
  • 아베 야로
  • 7,650원 (10%420)
  • 2008-09-29
  • : 3,043

<심야식당> 표지에는 “밤 12시 기묘한 요리집이 문을 연다”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얼핏 ‘인육만두’나 ‘손가락 튀김’같은 괴기스런 요리들을 내어놓고는 손님들을 회쳐버리는 엽기적인 식당을 떠올릴 법도 하다. 안심하시라, 이 책에는 그런 무시무시한 이야기들은 없다. 게다가 작가가 직접 ‘영웅도 귀여운 아가씨도 나오지 않는다’며 엄포(?)를 놓는다. 그러나 선남선녀가 등장하지 않는다 해서 실망할 필요는 없다. 대신 인생의 다양한 맛들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식당의 운영원칙은 간단하다. 밤 12시에 문을 열어 아침 7시까지 운영한다는 것. 메뉴는 돼지고기된장국정식 하나. 나머지는 손님들이 원하는 음식을 그때그때 있는 재료에 따라 만들어 준다. 어지간한 자신감이 아니고서는 원하는 요리를 주문하라, 는 배포를 부리기 어려울 것 같지만, 사실 이 식당에서 내놓는 음식들 이래봤자 빨간 비엔나 소세지에 냉국, 카레라이스, 달걀샌드위치, 삶은 달걀, 버터라이스 등 대부분 집에서 해 먹을 수 있는 간단한 것들이다. 이야기를 끌어가는 이는 심상치 않은 얼굴의 칼자국으로 보건대 무언가 말할 수 없는 사연을 숨겨놓았을 것 같은, 솜씨 좋고 사람 좋은 식당 주인이다.

나이 마흔에 만화가로 데뷔한 작가 아베 야로는 한 인터뷰에서 “음식에 대해 만화에서 지식을 과시하는 게 싫다”고 밝힌 바 있다. 그의 말처럼 <심야식당>에는 심오한 음식의 세계나 천상의 맛 따위는 나오지 않는다. 대신, 한밤중 헛헛한 속을 달래줄 뜨끈한 국물 같은 이야기들이 찰랑찰랑 고여있다.

매회 에피소드들이 옴니버스 식으로 펼쳐지는 구성은 담백하고 깔끔한 이야기의 맛을 보여준다. 음식을 매개로 만나고 헤어지는 이들의 각양각색 이야기들은 인생의 맛을 음식으로 치환해 오밀조밀하게 보여준다. 그 중에는 밤새 노래방에서 노래를 부르다 고양이 맘마(뜨거운 밥에 가츠오부시를 얹고 간장을 뿌려 먹는 밥)를 주문하는 팔리지 않는 엔카 가수도 있고, 시합에 이길 때마다 카츠돈(‘카츠’는 일본말로 ‘이기다’라는 뜻도 있다)을 시켜먹는 복서도 있다. 험악한 외모에 어울리잖게 항상 문어모양으로 볶은 빨간 비엔나 소세지를 시켜먹는 야쿠자도 있고, 통째로 절인 오이를 호쾌하게 씹어먹는 여자 프로레슬링 선수도 있다. 그러고 보면 인생의 복잡한 맛은 음식을 닮아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것은 달콤한 꿈이기도 했다가 씁쓰레한 뒷맛을 남기기도 하고, 아삭아삭 씹히는 감칠맛이기도 했다가 아플 정도로 매운맛을 보여주기도 하지 않던가.

배고팠던 시절, 내게도 단골식당이 있었다. 꼭 배가 고파서 간 것만은 아니었다,고 하기엔 허겁지겁 부지런히도 먹어대던 그 때. 아들처럼 대해주신 것은 아니지만, 배고픈 자취생의 마음을 헤아려주시던 주인아주머니는 느지막한 아침이나 한밤중에서야 홀로 찾아드는 ‘불량 손님’에게 자주 당신의 아들 이야기를 해주셨던가. 아직도 게 다리 한쪽이 들어간 된장찌개의 구수함과 혼자 먹는 밥상에 몇 번을 덜어오던 묵은지의 깊은 맛은 쉽게 잊히지 않는다.

먹을 만한 밥집 하나 찾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재작년이었던가 희망제작소에서 주최한 불만합창단 콘테스트에서 한 팀이 부른 불만합창에는 ‘동네에 쓸 만한 식당하나 없다’는 하소연이 들어있었다. 정말이지, 저렇게 소소한 이야기를 만들고 관계를 맺어주는 식당이 있다면야 매일 밤이라도 찾아가겠다는 생각이 든다. <심야식당> 등장인물들의 이야기를 음미하다 보면, 음식에 담긴 추억들을 나눌 때 사람은 가장 행복한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든다. 다만 한 가지, 안 그래도 식욕이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심야에 이 작품을 보는 건 불어나는 체중을 감당 못하게 될 위험이 있으니 주의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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