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 단체에서 함께 일하던 선배는 몇 년 전 ‘발렌타인데이를 망쳐놓겠다’며 친구들과 함께 도심에서 모종의 ‘액션’을 감행했다. 혹시 이 글을 읽는 이 중에도 그 선배를 마주친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마침 토요일이었던 발렌타인데이, 대낮에 불콰해진 얼굴과 비틀거리는 몸짓으로 알콜 기운을 풀풀 풍겨가며 연인들로 인산인해를 이룬 종로 일대를 배회하던 서너 명의 주정뱅이들을 말이다.
웬 찌질한 짓이냐고? 그저 ‘없는 이’들의 투정일 뿐이라고? 맞다, 지인들 사이에서 두고두고 회자되며 지탄을 받은 ‘발렌타인데이 습격’은 솔로남들의 불타는 질투와 신세한탄이 승화된 객기가 빚어낸 한편의 해프닝일 뿐이었다. 그러나 수백 명이 동시에 '진상'을 부리며 같은 장면을 연출한다면?
<가난뱅이의 역습>에서 ‘발렌타인데이 습격’ 사건과 유사한 에피소드를 발견했다. 일명 ‘크리스마스 분쇄 찌개집회! 롯폰기힐스’다. 대형쇼핑몰이 들어선 시내 중심가에 ‘롯폰기힐스를 불바다로!’라는 전단을 뿌리고는 찌개를 끓여먹는 어처구니없는 집회다. 크리스마스 당일 반짝반짝 빛나야 할 거리경관이 대거 출동한 수백 명의 경찰과 때 아닌 소란을 즐기는 군중들로 마비가 되다시피 한 걸 보며 ‘임무완수’라는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크리스마스에 편승한 상업주의, 적들의 으리으리한 이벤트는 분쇄되었다!
이 책, 물건이다. 어떻게 저항해 볼 도리 없이 유쾌하다. 책을 읽는 동안 지하철 등에서 폭소를 터뜨려 주위의 눈총을 받은 게 한 두 번이 아니다. 뭐가 그리 재밌냐고? 백문이 불여일견. 당연히 읽어봐야 그 즐거움을 느낄 수 있겠으나, 아직까지 가난뱅이들의 포복절도할 역습을 만나지 못한 가여운 당신을 위해 맛보기로 간략하게만 알려주겠다. 준비, 됐나?
올 한해, 경제위기에 대한 온갖 얘기들이 사정없이 귀를 때렸다. 서브프라임모기지부터 월가, 코스피, 실물경제, 금값, 부동산... 근데, 그게 뭐? 부자들의 위기, 자본주의 작동방식의 위기를 왜 우리가 골머리 썩히며 걱정해야 하나. 물론, 사정이 그렇게 호락호락 하지만은 않다. ‘몰락’의 속도는 그 구성원들 특히 ‘하류인생’들에 가혹한 조건을 양산해내기 마련이니까.
그러나 그것과 애초에 다른 삶의 방식을 선택한다면 어떨까. 월급쟁이로 평생을 산다? 생각만 해도 숨통이 죄어오는 것 같다. 어째어째 은행대출을 받아 아파트를 구입하고는 10년이고 20년이고 집값 갚느라 허리가 부러진다? 맙소사, 단단한 밧줄로 목이 졸리는 기분이다. ‘가난뱅이는 가난뱅이답게 살자’는게 마쓰모토 하지메의 이야기다. 가난뱅이답게 닥치고 고난을 감내하고 사는 게 필요하단 얘기냐고? 그럴 리가 있나. 우리를 가난뱅이로 몰아넣는 세상의 존재를 인식하고 세상이 시키는 대로 살지 말란 얘기다.
마쓰모토 하지메는 ‘사회를 위해 고생이 되더라도 노력한다 -> 세상이 나아진다 -> 떡고물을 얻어먹는다’라는 말은 부자들이 듣기 좋으라고 내뱉는 거짓부렁, 뻥이라고 일축한다. 대신 ‘하고 싶은 일을 한다 ->좀 곤란한 일에 부딪힌다 ->몸부림친다 ->어떻게든 된다(무슨 수든 쓴다)’야 말로 인간답고 즐거운 일이라고 제안한다. ‘제대로 살아보라’는 시시껄렁한 말일랑 듣지 말고 멋대로 씩씩하게, 시끌벅적한 한판을 벌이자는 거다.
마쓰모토 하지메는 싼 집을 구하는 기술, 밥값 절약 기술, 저렴한 옷을 구하는 방법 등으로 운을 뗀다. 노숙 작전이나 걸식 작전을 거쳐 다다미를 우려먹었다는 이야기까지 도달하면 터져나오는 웃음을 주체할 길 없다. 그야말로 포복절도, 요절복통 노하우들이 빼곡하다. 가난뱅이들의 실전 처세술이라 해도 모자람 없겠다.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는 대학에서 반강제적으로 쫓겨난 후 도쿄 외곽의 고엔지라는 곳에 ‘아마추어의 반란’이라는 재활용 가게를 만든다. 결국, 재테크 책 아니냐고? 당연히 돈 좀 아껴서 큰 차 사고, 30평대 아파트가 로망인 당신을 위한 게 아니다. 가난이라는 부조리한 조건을 무기삼아 세상의 불합리에 맞서잔 얘기다.
세상의 불합리? 맞서자? 대강 이 말만 듣고 혹시 ‘일본 좌빨 아냐?’라며 고개부터 흔드는 당신. 빨간 머리띠 두르고 팔뚝질하는 장면부터 떠오르는 당신. 당신의 지리한 인생에 유감을 표한다. 가난뱅이의 역습에는 그렇게 고리타분한 저항 따윈 없다. 운동의 온갖 매뉴얼들은 잊어라. 유쾌하게 즐겁게,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사는 데 가장 큰 적이 역시 자본주의 시스템이라면 ‘저항의 엄숙주의’ 역시 그 못지않은 적이다.
그가 벌인 반란의 목록만 봐도 보면 그런 걱정일랑 싸악 잊혀진다. 난로 투쟁, 찌개 투쟁, 술 투쟁, 갈고등어 암치 투쟁, 페인트탄 투척까지. 대학의 상업화를 막기 위해 그가 결성한 조직의 이름은 ‘호세대학의 궁상스러움을 지키는 모임’이다. 아무 제약 없이 거리에서 발언과 행사가 가능하단 이유로 선거에 출마해 무도회ㆍ토크쇼ㆍ콘서트 등 온갖 이벤트와 흥겨운 소란을 빚어내고, 3인 데모, 내 자전거 돌려줘 데모, 월세공짜를 위한 데모, 공포의 바람맞히기 데모 따위를 조직한다. 여기까지 오면 두손 두발 다 들지 않을 재간이 없다.
얘기를 들어봐도 역시 찌질하다고? 루저들의 투정에 불과한 것 아니냐고? 이거 왜 이러시나. 세상이 점점 재미없어지고 있다는 걸 당신은 몰랐단 말인가. ‘자본으로 대동단결’한 세상은 지리하고 무미건조한 사막 같은 골짜기다. 거리로 나가면 온통 돈으로 발라놓은 공간들이 점령군 행세를 하고 있다. 대학이 취업학원으로 정체성을 교체한 것은 이미 오래된 일. 이 지옥 같은 쳇바퀴는 아래로는 밤늦게까지 학원에서 뺑뺑이를 도는 초등학교 아이들의 끔찍한 현실에서부터 카드값과 대출이자에 짓눌리는 중년 가장에까지 거대한 구조물을 형성하고 있는 거 아닌가.
이 노예선에서 일탈하자는 게 <가난뱅이의 역습>이 보여주는 세계다. 얼마든지 다르게 살 수 있다는 것, 하고 싶은 일-재밌는 일을 하면서 살아보자는 것이 마츠모토 하지메의 제안이다. 이 책은 그가 스테레오타입화된 삶에 던지는 페인트 세례다. 가난뱅이가 다르게 사는 것, 가난뱅이가 가난뱅이의 정체성을 인식하고 그것을 무기삼아 유쾌하고 즐겁게 사는 방식을 터득하는 것 자체가 그에게는 저항이자 반란이다.
올해 운 좋게도 마쓰모토 하지메와 그의 동료들이 활동하고 있는 고엔지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프리터들이 결성한 노동조합 관계자, 불심검문을 밥 먹듯 하는 경찰과 실랑이를 벌이고 골탕먹이는 것을 취미로 하는 사람, 에로만화를 그리면서도 자신을 좌파라 소개하는 만화가 등등 정말 재밌는 사람들이 잔뜩 있었다. <가난뱅이의 역습>을 올 한해를 관통하는 책으로 주저 없이 추천하며, 한국에도 유쾌한 공간과 사람들의 반란이 점점 더 늘어나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