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짜라의 책방
  • 그 변기의 역학
  • 설재인
  • 13,500원 (10%750)
  • 2024-06-30
  • : 609


1.그 변기의 역학-설재인


2025년 첫 서평을 써봅니다. 2024년 12월달에 한편을 쓰긴 했지만, 너무 오랜만에 쓰는 것이라 여전히 쓸 때마다 어떻게 쓸지 잘 모르겠네요. 이 책의 서평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떻게 써야 할까. 아 파트를 나누어서 써보려고 합니다.


1. 에세이편: 변기에서 역류하는 물에 대한 공감


2025년 첫날부터 변기 이야기를 하는 게 부적합해 보이지만(^^;;) 책이 책이라서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 변기의 역학>의 주인공인 성아정은 40이 다 된 나이에 별다른 재산도 없고, 직업도 불규칙한 상태에서 작가라는 꿈을 좇는 인물입니다. 당연히 부모님이나 여동생에게도 인정받지 못하죠. 그렇게 불안정하고 자기 자신을 신뢰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살던 아정은 우연히 청년전세임대지원사업에 당첨되어 서울 한 복판의 빌라로 이사를 가게 됩니다. 주변인들의 부러움을 사면서. 하지만 기쁨과 즐거움은 한 순간이었습니다. 갑자기 집의 변기에서 물이 사라지고 악취가 올라오는 '봉수파괴'라는 현상을 겪으면서 아정의 삶은 괴로움으로 가득하게 됩니다. 멀쩡한 집에 이사왔는데 이건 무엇인가? 즐거운 나의 집이라는 건 환상에 불과한 것인가? 이 현상이 위층 집의 배관문제와 엮여 있다는 걸 알게 되면서 고민은 더 깊어지죠. 지금까지 남한테 나쁜 말 한 번 제대로 못한 삶을 살아왔기 때문이었습니다. 고민은 집에서 변기에 앉아 있다 역류하는 물이 엉덩이에 닿으면서 최악의 절정으로 향하게 됩니다.


이 부분까지 읽고 깊은 공감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일단 저도 변기에서 물이 역류하는 경험을 해봤기 때문입니다. 물론 아정이랑 다르게 앉아 있을 때 물이 역류한 건 아닙니다. 저는 서 있는 상태에서 변기의 버튼을 눌렀는데 물이 역류한 경험이었습니다. 그때 넘치는 물 앞에서 얼마나 절망감이 밀려오던지. 아정만큼은 아니지만 저에게도 변기 물 역류는 최악의 경험이었습니다. 삶의 밑바닥에 내려간 듯한 느낌으로. 


2.분석편: 가족의 타자성

가족은 피가 이어진 혈육이 맞습니다. 하지만 또한 어떤 의미에서는 나 자신이 아닌 타인이기도 합니다. 가족과 나 사이의 관계에는, 완벽한 동일성과는 다르면서도 완벽한 타자성과 다른, 타자성과 동일성 사이의 모순적이고 혼란스런 모습이 가득합니다. 우리에게 그 혼란은 피가 이어진 혈육이라는 관계의 힘으로도 막을 수 없는 면이 있습니다. 그걸 가장 잘 보여주는 소설이 카프카의 <변신>입니다. <변신>의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는 어느 날 갑자기 벌레가 됩니다. 가족들은 당황한 상태에서 벌레가 된 잠자를 돌보지만, 시간이 지나 잠자가 자신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음이 명확해지자 잠자를 죽음으로 내몰게 됩니다. 가족의 서늘한 타자성을 너무나 잘 드러내는 것이죠.


한국식 서사에서 자주 나오는 가족 로망스나 가족주의 신화는 <변신>과는 반대지점에 위치합니다. 이 때의 가족 로망스나 가족주의 신화는 어떤 일이 있어도 가족을 지키거나 가족의 환상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가족이 삶의 마지막 보루이자 일상의 안온한 평온함이 유지되는 장소로 나타난다는 말입니다. 물론 반대로 가족 로맨스나 가족주의 신화를 해체하는 서사들도 있습니다. <그 변기의 역학>은 해체서사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공감 1000%의 변기 역류 일 이후에 이 책의 서사는 가족 이야기를 중심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봉수파괴의 원인이 된 윗집 남자를 만나서 그의 이야기를 듣게 된 아정은, 남자를 따라서 취직하게 됩니다. 그가 하던 자기 자신의 어머니의 몸을 깎는 일을 하는 같이 하면서. 저는 이 부분에서 놀랐습니다. 아니 이야기가 이렇게 극단적으로 흘러간다고. 네, 설재인 작가는 가족의 타자성을 극대화하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끌고갑니다. 거부감이 들 정도로.


위에서도 적었지만 가족은 나가 아닙니다. 부모님과 나 사이가 혈육으로 이어져 있다고 해도 부모님은 나가 아니기에 나를 백프로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습니다. 부모님이 육체적 폭력을 행사했거나 정신적이고 정서적인 폭력을 지속적으로 해왔다면 그 사이는 더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아정과 아정의 어머니 사이에는 서로를 완벽하게 사랑할 수 없는 오래된 가족 서사가 있습니다. 폭력을 행사하는 아버지와 그 울분을 딸에게 풀었던 어머니, 나이 들어서도 믿지 못하고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는 어머니. 딸인 아정은 윗집 남자를 따라서 자신의 어머니의 육체를 깎으면서 어머니를 서서히 소멸의 길로 몰아넣고, 자신은 그걸로 돈을 법니다. 


윗집 남자와의 인연을 통해 어머니를 소멸로 몰아가면서, 아정은 마르크스의 <자본론>의 세계로 들어갑니다. 가족주의 신화 속에서 '사랑'이라는 무형의 가치 때문에 시장에서 통용되는 교환가치로 측정되지 않던 어머니와 딸의 관계는, 시장에서 교환가치로 측정되는 길로 들어섰다는 말입니다. 교환되고 측정되지 않는 사물이 아닌 어머니가, 돈으로 측정되고 시장에서 교환되는 사물이 된 것입니다. 사람이 아닌 오직 돈을 위해 존재하는 사물로. 


책을 읽다가 내가 느낀 거부감은 거기에서 옵니다. 눈뜨고 살아가며 관계 맺는 어머니라는 사람이, 육체가 깎이고 깎이며 소멸의 길로 들어서는 수량화되고 가격이 매겨지는 극단의 사물로 다가온다는 점에서. 이 냉정한 자본주의의 현실화 앞에서 어머니라는 가족은 완벽하게 타자로 다가옵니다. 하지만 이게 현실이 아니라고 완벽하게 말할 수 있을까요? 이런 건 존재하지 않는다고 당당하게 반박할 수 있을까요? 반박과 부정이 힘든 면이 있기 때문에 <그 변기의 역학>은 거부감 들고, 불편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읽은 설재인 작가의 작품과는 다른 느낌으로. 


  • 댓글쓰기
  • 좋아요
  • 공유하기
  • 찜하기
로그인 l PC버전 l 전체 메뉴 l 나의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