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한 자유는 사랑일 거라고, <아침의 피아노>
철학자 김진영의 마지막 산문집이자 유고집 <아침의 피아노>를 읽었다. 제목을 듣고 가장 먼저 떠오른 사람은 바흐 해석에 명망이 높은 피아니스트, 안드라스 쉬프였다. 쉬프는 매일 아침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를 연주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는 연주한다는 인터뷰 기사를 본 적이 있다. 그는 2017년 영국의 클래식 음악 축제 BBC 프롬스에서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 곡집 1권을, 2018년에는 2권을 인터미션 없이 연주했다. 연주시간은 2시간 30분가량이었다. 나는 처음 제목을 들었을 때부터 저자가 들은 ‘아침의 피아노’가 어쩐지 바흐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 책을 기다리면서 내가 이 책을 읽고 싶은 이유가 몇 개 월 전 세상을 떠난 친구들이 어디로 갔는지 알고 싶기 때문이라는 것을 인지했다. 나는 그 친구들이 투병 중이었다는 사실도 몰랐으므로, 어디까지나 내 입장에서만 보면, 친구들은 갑자기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셈이었다. 저자가 암 선고를 받은 이후 임종 사흘 전까지 쓴 일기를 엮었다는 소개에, 얼마간 유치하고 얼마간 적나라하고 얼마간 절박한 마음으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초반부는 굉장히 조마조마했다. 이미 결말을 알아버린 소설을 읽는 느낌이었다. 그의 갈망과 의지가 읽혔다. 이미 죽은 사람이 생전에 평화로웠기를 바라는 것만큼 쓸모없는 일이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어느 순간 내가 기도하는 마음으로 읽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바로 다음 페이지의 일기에서 이런 구절을 발견하고 적잖이 놀랐다. “언젠가 어딘가에 적었던 말. 간절할 때 마음속에서 혼자 또는 누군가에게 중얼거리는 말들. 그게 다 기도란다—기도하는 법을 배운다. 나를 위해서, 또 타자들을 위해서….” (208쪽)
시인 이문재는 <오래된 기도>라는 시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나의 죽음은 언제나 나의 삶과 동행하고 있다는/평범한 진리를 인정하기만 해도/기도하는 것이다” 나는 저자가 “자신의 삶과 죽음이 동행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인정”하도록 도와달라고 기도했을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책에서도 여러 번 이야기하듯 저자는 본인의 “정신적인 것은 스스로를 증명해야(29쪽)” 하기 때문에 더 살고 싶다고 썼다. 그래서 어떻게 “나를 지킬 수 있을까”(21쪽) 고민하고, “부드러움을 잃으면 안 된다”(58쪽)고 다짐하고, “휘청거리는 몸을 꼿꼿하게 세우고 직립보행을 하려고 애썼다(248쪽).” “살아오면서 늘 정갈함을 잃지 않으려고 애썼(39쪽)”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가 또 한 가지 바란 것은 육체와의 동행이었다. “나는 지금까지 육체적 싸움을 해본 적이 없다(36쪽).” “나는 이제야말로 나의 몸을 사랑하고 믿을 때가 되었음을 안다(127쪽, 유르스나르의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회상록> 재인용).”고 쓴다. 놀랍게도 그는 그로부터 약 9개월 후, 그러니까 세상을 뜨기 두어 달 전 이런 글을 남긴다. “자유란 무엇인가. 그건 몸과 함께 조용히 머무는 행복이다(230쪽).” 그리고 며칠 뒤 “어머니의 몸속을, 그 몸 안의 어떤 갱도를 통과하고 싶은 절박한 충동(233쪽)”을 느낀다. 그의 몸은 죽어 이 세상에 없지만 나는 그가 육체적 싸움에서 이겼다고 믿는다. 그는 마침내 정신과 육체의 동행에서 비롯된 자유를 얻었다.
그의 일기가 그것을 증명한다. 후반으로 갈수록 짤막한 문장에 리듬감이 실린다. 어떤 구절을 읽고 멈추는 시간은 반대로 길어졌다. 책을 배 위에 올려놓고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다가 잠이 들기도 했다. “사랑의 마음을 잃지 말 것. 그걸 늘 가슴에 꼭 간직할 것(268쪽)”이라고 적힌 페이지에서 나는 멈춰 사진을 찍었다. 한참 바라보았다. 그의 글은 시가 되었다.
임종 직전의 2018년 8월의 글은 간결하다. 간결하다 못해 단어 하나하나만 나열되어 있는 날도 있다. 그제야 여백에 시선이 갔다. 그 여백의 시간 속에서 길어 올린 몇 글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죽기 사흘 전의 마지막 일기는 이렇게 끝난다. “내 마음은 편안하다.” 그는 죽으면서 삶으로 스스로에게 자신을 증명해내는 데 성공했다. 첫 산문집이자 유고작이 된 이 기록은 그가 바랐던 대로 타인에게 의미가 되었다.
몇 시간 전 잠실에서 열린 안드라스 쉬프의 피아노 리사이틀에 다녀왔다. 그는 멘델스존, 브람스, 바흐를 연주했다. 매일 아침 연주한다는 평균율 클라비어는 아니었지만, 그의 바흐 연주를 직접 들은 것만으로도 어떤 영광을 몸으로 겪은 듯했다. 무대에 선 자유로운 영혼은 많이 보았지만, 나는 바흐를 연주하는 쉬프처럼 정갈하고 순수하며 자유로운 영혼은 처음 보았다. 인간으로 태어나 그렇게 자유로울 수 있다면, 아니, 인간으로 태어났다면 그렇게 자유로워야 하지 않을까.
쉬프는 오늘 앙코르로 무려 여섯 곡을 연주했다. 첫 앙코르 곡은 바흐의 이탈리안 콘체르토, 중간에는 피아노 조금 쳤다는 사람은 누구나 다 아는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 K.545 1악장이었다. 그의 손가락 끝에서 그 유명한 “도미솔 시도레도” 하며 사랑스러운 선율이 시작되자 관객들이 즐겁게 웃었다. 앙코르를 거듭할수록 박수갈채는 점점 더 커졌고 그는 진심으로 관객들을 향해 여러 번 고개 숙여 인사한 뒤 무대에서 퇴장했다. 백발 피아니스트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내 짐작은 근거 없는 확신으로 바뀌었다. 철학자 김진영이 아침에 듣곤 했던 피아노 음악은 바흐였을 것이라고. 지극한 자유는 사랑일 거라고.
덧. 친구들이 어디로 갔는지는 책을 끝까지 읽었어도 전혀 짐작할 수가 없다. 이 세상보다 자유로운 세상이기를 기도할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