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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의 서재
  • 맨 끝줄 소년
  • 후안 마요르가
  • 14,800원 (740)
  • 2019-07-15
  • : 8,657

넷**스에서 <맨 끝줄 소년>이라는 드라마를 보기 시작했다가 원작을 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책을 주문해서 읽었다. 드라마의 문법이 극단적이고 자극적이라는 생각을 했다. 희곡을 먼저 읽어보라고 막내에게 건네주었다. 딸은 불친절한 희곡이라고, 지문이 없이 갑자기 끼어드는 대사 때문에 흐름이 끊겼다고 하면서 책을 돌려주었다. 지문이 없는 것은 무대 배치나 동선과 동작 같은 연출을 연출자의 해석에 맡기고 창작할 여지를 주려는 의도라고 생각한다. 바로 직전 읽었던 밀란 쿤데라의 『자크와 그의 주인』 역시 이런 여백이 많은 작품이다. 그 희곡을 읽어서 그런지, 나의 경우 형식에는 너그럽고 긍정적이었다.

 

내용은 조금 불편한 작품이다. 특별한 사건이 없음에도 긴장하고, 노골적인 악의가 없음에도 위험하고 불안한 느낌을 받는다. 그럼에도 피할 수 없는 인간의 내면을 해부하는 날카로운 메시지가 있다. 인간의 불행의 근원은 욕망일까? 나의 결핍과 타인이 가진 것에 대한 욕망이 자라나고 파괴적이 되어가는 과정과 그 힘에 대해 생각했다. 한편 욕망의 은밀함에도 불구하고 발각될 수밖에 없는 그 보편적 본질을 갖고 있다. 그 성질을 누군가 이용하려 한다면 거기서 자유롭기 쉽지 않다.

 

맨 끝줄은 익명성과 은밀함을 즐기는 자리라는 것을 암시한다. 자신을 감추고 타인을 관찰하고 감시할 수 있는 위치다. 맨 끝줄이 은닉성을 갖고 있다면 그것은 클라우디오의 위치를 가리키기도 하지만 독자로서의 헤르만의 위치를 지시하기도 한다. 클라우디오와 헤르만은 스승과 제자라는 관계에 계약이 덧붙여진다. 그리고 둘 사이에 권력관계가 형성된다. 헤르만이 클라우디오가 써오는 글을 읽고 지도해주는 행위는 마치 소년의 자위 행위를 보면서 자신의 욕구를 만족시키는 탐욕스런 어른의 관음증이라고 해야 할까? 아무튼 그런 불쾌한 느낌을 갖게한다. 질문들이 생겨나서 멈춰서 질문의 본질을 생각해야 했다.

 

고등학교 문학교사 헤르만은 학생들에게 주말 동안 무엇을 했는지를 쓰는 숙제를 내 주고, 제출한 학생들의 작문을 읽다가 그의 관심을 끄는 글을 발견한다. 클라우디오 가르시아 의 ‘지난 주말’이라는 글이다. 그가 친구 라파엘의 집에 가서 그들을 바라본 일종의 관찰 글이다. 도덕적 문제가 있음을 느끼지만 클라우디오의 글쓰기에 끌리고, 그의 시선에 포착된 라파의 집과 가족에 대한 글에 호기심을 누르지 못한다. 헤르만은 클라우디오에게 글쓰기 수업을 제안하고, 라파의 가정을 관찰한 글을 ‘계속’해서 써오게 하고 읽고 지도한다.

 

클라우디오는 하교 길에 라파를 기다리는 부모들을 보고 관심을 갖기 시작했었다. 라파의 집이 보이는 건너편 벤치에 앉아서 종종 그들을 바라보았고, 라파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했고, 수학공부를 도와주겠다며 그의 집에 가게 되었다.

“왜 라파지? 내가 왜 라파를 택했지? 왜냐하면 라파는 나와 정반대 지점에 있기 때문이다. ……저 집은 어떨까? 평범한 집은 어떨까?(18p)”,

클라우디오는 자신이 갖지 못한 것에 대한 욕망의 시선으로 라파와 가족을 관찰했다. 자신이 갖지 못한 중산층의 향기를 풍기는 가족과 집, 안락함과 평화를 동경했다. 자신의 결핍을 채우려는 관음증적 시선은 모성과 성애의 경계를 넘는 시선으로, 그리고 통제하고 허구를 창조하는 권력의 시선으로 발전한다. 클라우디오 자신의 내면에 깊숙이 숨겨져 있는 욕망과 그가 들여다본 가족의 은밀한 욕망은 허구로 창작해서 덧붙인다. 그렇게 그의 글은 현실과 허구의 경계, 그리고 윤리적 경계를 넘나든다.

 

클라우디오의 글을 지도하면서 헤르만은 자신의 관음증적 욕망을 채우고, 자신이 갖지 못한 작가로서의 재능에 대리만족하고 있는 듯 보인다. 그 역시 욕망과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교사로서 심각한 범죄를 저지른다. 그의 욕망은 자신이 갖지 못한 재능을 가진 제자의 글을 보는 기쁨인가, 아니면 다른 사람의 삶을 엿보는 쾌락을 향한 것인가? 은밀하게 커져가던 욕망은 이 모든 것이 혼재되어 걷잡을 수 없는 상태로 발전한다. 헤르만은 클라우디오의 글을 비평하고 글이 나아갈 방향, 윤리성에 대한 의문을 제시하면서 지도한다. 행간에 담겨있는 의도와 주제를 묻고 가르치는 헤르만에게서 클라우디오의 글에 자신의 의도를 담고자하는 욕망을 엿보게 된다. 그렇게 헤르만은 클라우디오의 글쓰기의 방향을 이끌고 있는 듯 보이지만, 정작 클라우디오는 헤르만과 그의 부인 후아나의 갈등과 욕망을 꿰뚫어보고 글로서 그들을 조종하고 권력을 행사한다. 헤르만이 저질렀던 범죄은 클라우디오에 의해 폭로되고 헤르만은 모든 것을 상실한다. 헤르만이 한 것처럼 인간은 은밀하게 숨어있는 욕망에 작은 자극만 주어도 그것은 깨어나 그를 지배하는 것을 보게 된다.

 

읽어가면서 계속 생겨났던 질문들은 헤르만 선생이 아이들에게 빌려주는 『마의산』 , 『생도 퇴를레스의 혼란』 같은 소설들을 이 아이들은 이해할까? 헤르만은 문학에 대한 자만심이 지나친 사람일까? 클라우디오의 글이 픽션이라면 괜찮은데, 타인을 관찰해서 그대로 글로 옮긴 것이라면 불편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클라우디오의 글이 픽션으로서는 좋은 글인가?

 

그는 작가로서 책을 내고 등단했던 사람이다. 헤르만은 그 소설을 실패한 작품으로 받아들인다. 실패한 작가로서 고등학교 문학을 가르치는 헤르만은 재능을 가진 클라우디오에 대해 매력을 느꼈다. 그리고 그를 가르치는 것으로 만족감을 얻으려는 태도도 엿보인다. 여기에는 잠깐의 암시가 있었던 것처럼 소크라테스와 알키비아데스를 떠올리게 하는 감정도 떠올리게 한다. 그가 어려운 소설들을 권하는 것은 가르치는 자의 권위를 세우려는지도 모르겠다. 클라우디오 앞에서 복잡한 심리 상태에 놓이는 헤르만의 모습을 보게 된다.

 

작가는 자신의 삶 혹은 타인의 삶에서 얻어지는 것들을 통해 글을 쓴다. 거기에는 현실과 허구가 서로 짜여져 독자에게는 창조된 세계로 다가간다. 그렇지만 독자가 글에서 작가와 작가 주변의 삶을 상상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럼에도 그 글은 허구로서 읽혀진다. 만약 그것이 오로지 관찰된 사실적 묘사라면 독자인 나는 윤리성을 떠올리게 될 것이고 책을 덮을 것이다. 다른 사람의 일상을 관찰하기 위해 문학을 읽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작가가 창조해낸 글의 행간에서 욕망ㆍ고독ㆍ불안을 읽고도 사랑이라는 메시지를 발견하는 것, 열정ㆍ쾌락을 읽고도 허무를 발견하는 것이 읽는 행위가 생성하는 의미이다. 픽션이라 할지라도 이것을 줄 수 있는 글과 그렇지 못한 글이 있다.

 

원작을 영화나 드라마로 해석하는 데에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든다. 여러 가지 질문과 답을 찾는 다양한 생각이 이어지도록 하는 작품이 있는가 하면, 전형적인 문법으로 심지어 원작을 훼손하는 작품들도 있다. 이 <맨 끝줄 소년>의 넷**스 드라마는 그런면에서 위험하다. 반면 프랑스 영화 <In The House>는 원작 그대로를 살리고 적절한 이미지로 의미들을 생성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오랜만에 끝까지 감상한 영화다.

 

인간의 욕망과 그 욕망을 통제하는 권력, 작가의 윤리, 독자의 시선, 해석의 문제에 대해 생각하게 된 독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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