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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니어들 모임에서 독서토론을 진행해본 적이 없어 조금 걱정이 되었다. 분명 난이도가 저마다 각각일 테고 기준을 어디에 두고 준비를 해야 할지 난감했다. 복지관 담당자는 현장에서 함께 읽도록 한 권을 여러 번에 나눠서 할 것을 주문했다. 큰 글자 책을 무료로 나눠주고 함께 읽기에 적당한 문학을 골라달라고 했다. 분량, 큰 글자 책이 상위 기준이 되어 버렸다.

『노인과 바다』로 정하고 나는 나 나름대로 헤밍웨이에 대해 알아보았다. 분량을 정해서 1시간 반 동안, 읽고 한 두가지 정도의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어야 하기에 다른 이야기를 하긴 힘들겠지만, 강의든 독서 모임이든 텍스트가 정해진 후 작가와 다른 작품들과 배경이 될 만한 책들을 읽고 소개하는 게 오랜 습관이 되어서 자연스럽게 연결 독서를 했다. 이 기회에 헤밍웨이를 좀 더 깊이 있게 들여다보자는 생각도 있었다.

헤밍웨이

헤밍웨이는 1차, 2차 세계대전, 그리스-터키 전쟁, 스페인 내전, 중일전쟁에 참전했었다. 20여개의 나라를 옮겨 다녔다. 그의 젊은 시절은 파리에서 지냈다. 그는 파리에서 사랑을 하고 가정도 갖고 예술가들과 교류하고 관계를 맺었다. 그가 인정한 작가로는 제임스 조이스나 에즈라 파운드였다. 조이스는 “그가 비난하지 않은 몇 안 되는 예술가 중 하나”였다고 한다. 또한 에즈라 파운드와는 말년까지 애정을 유지했다고 한다. 거트루드 스타인이나 피츠제럴드와의 교제는 존경의 대상보다는 친구나 경쟁자로서였던 듯하다. 스콧과 어니스트의 각별했던 우정이 갈등과 결별로 가게 된 이유들에 대해서 작가들은 여러 가지를 댄다. 그들의 부모, 성품, 글쓰기, 작가로서의 자존심과 경쟁심 등등. 이유는 많다. 난 그 이유와 상관없이 인간은 얼마나 상처입기 쉬운 자들인가에 대해 생각했다.

 

헤밍웨이에게 파리의 생활은 가난했다. 그리고 관계의 아픔도 겪었다. 그러나 그의 삶에서 가장 빛났던 순간이라는 느낌이 든다. 글을 써서 생활은 조금씩 나아질 희망이 있었고, 사랑을 하고 결혼을 했고, 많은 예술가들과의 교류를 통해 작가로서 감수성을 자극 받을 수 있었던 시절이었다고 생각한다.

 

그의 가정환경은 불우했다. 아버지는 권총자살을 했고, 어니스트는 그 이유가 어머니에게 있다고 생각했다. 그 역시 우울증을 앓았고, 요양생활도 했고 죽기 전에는 그 증상이 심했었다고 한다. 그가 자살한 이유를 미국 정보국의 심한 압박에서도 찾지만 부모로부터 사랑의 결핍으로 인한 마음의 질병으로 보는 자들이 많다. 헤밍웨이는 한 장소에 붙박인 삶을 살지 않았다. 한 여성에게 머물지도 않았다. 그는 네 명의 여성과 결혼과 이혼을 반복했고 애인들도 적지 않았다. 여성주의자들의 비판의 대상이 되는 그의 편력은 그의 가정사와 모친에 대한 증오심도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쿠바와 카리브해를 사랑했던 그에게 연민을 느끼게 되는 지점이다.

 

1952년 『노인과 바다』를 발표하고 1953년 퓰리처상과 1954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병이 깊어진 그는 1961년에 생을 마감한다. 죽기 3년 전 쓴 『깨끗하고 밝은 곳』(A clean, well-lighted place)은 짙은 허무주의를 느끼게 한다. 오래 전 우연히 이 단편의 영문판 서두 몇 줄을 읽다가 멈출 수 없어 끝까지 읽어버렸었다. 아름답고 버릴 것 없는 간결한 문장들이 그리는 인간의 깊은 고독과 실존의 상실에 전율하게 된다. “Many must have it(insimnia)!”로 끝나는 문장은 가슴이 울렁일 정도로 존재의 깊은 고독을 전한다. 이런 nihilism은 『무기여 잘 있어라』(1929)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1940)에도 그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그가 노벨상을 받고 얼마 안되어 심한 우울증으로 스스로 생을 마감한 것에서 나는 더욱 그의 허무에 공감하게 되었다. 알콜 중독이었던 그가 요양을 하고 금주를 시도했던 것을 보면 삶에의 의지가 있었던 것으로 보임에도 아이러니하게도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는 허무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빙산 이론

헤밍웨이는 자신의 창작 방법을 빙산 이론Iceberg Theory이라고 불렀다. 말하기보다는 생략함으로써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 줄 수 있다고 생각한 그는 자신의 빙산이론에 대하여

 

“글을 쓰는 데에도 역시 여러 가지 비결이 있다. 글을 쓰다가 어떤 부분을 생략할 때, 그 순간에는 어떻게 보일지 모르지만, 생략해서 잃어버리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생략된 부분은 언제나 남아 있는 부분을 더욱 강력하게 해준다.(『파리는 언제나 축제』 292p)”

라고 말했다.

 

노인과 바다 역시 많은 부분이 입말체의 대화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가 바다에 홀로 있을 때도 혼잣말을 하던지 물고기나 새와 혹은 죽은 물고기의 사체와도 이야기하는 장면들의 대화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헤밍웨이는 작품 속 상징은 없으며 있는 그대로 사실대로 쓰려고 했다고 말했다. “이야기 속의 모든 것-소년, 바다, 청새치, 상어-을 진짜처럼 만들려고 애썼고, 그 각각이 여러 가지를 의미하기를 바랐으며, 이는 애초에 상징으로 디자인 된 것도, 계획된 것이 아니”라고 했다.(헤밍웨이의 말) 또한 그는 한 편지에서

 

“이건 제 평생을 바쳐 쓴 글입니다.<노인과 바다> 쉽고 편안하게 읽히는 짧은 글처럼 보이지만 눈에 보이는 세상의 모든 면이 담겨져 있고, 동시에 한 인간의 정신세계도 담았지요. 지금으로서는 내 능력으로 쓸 수 있는 가장 훌륭한 글입니다.(찰스 스크리브너에게. 1940. 『서간 선집』 p.503-504)”

라고 했다. 그러므로 중요한 의미를 읽어내야 하는 것은 독자의 몫인 것이다. 드러난 빙산은 가라앉아 있는 부분을 읽어내도록 이끈다.

 

노인과 바다

노인은 84일 동안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했다. 그의 배의 돛은- 여기 저기 밀가루 부대로 기워져 있는- 마치 영원한 패배를 상징하는 깃발처럼 보였다는 표현 뒤에 깡마르고 주름이 깊게 잡혀 있는 검은 반점으로 덮여있는 얼굴에 대한 묘사가 이어진다. 돛은 노인의 얼굴이다. 오랫동안 고기를 잡지 못한 노인의 배의 돛은 패배를 상징하는 것처럼 보인다. 만일 여전히 만선으로 돌아오고 있었다면 여기저기 기워진 돛이 눈에 띄지도 않았거나 오히려 영광의 상처처럼 여겨졌을지도 모른다.

 

실패의 상징처럼 느껴지는 것이 있는지에 대해 질문했다. 처음 내 집 마련하고 살면서 자녀를 키우고, 출가시키고 홀로 남은 집, 여기저기 낡고 고장 나고 색이 바랜 집일 수도 있겠다. 남들은 더 크고 새로운 집으로 이사하고 떠났는데, 퇴직하고 노년이 되어 여전히 그 집에 살고 있는 사람이 느낄 법한 감정이라고 생각했다. 여러번 밑창을 갈고 꿰맨 자국이 있는 구두의 이미지도 떠올랐다.

 

회원 중 한 분이 아기들도 자신의 얼굴을 보고 좋아하지 않고 오라고 해도 오지 않는다고, “주름지고 늙은 얼굴을 누가 좋아하겠어, 어쩌다 거울을 보면 나도 내가 귀신같은데!”라고 말씀하셨다. 그렇지 않다고 어디 주름이 있다고 그러시냐고 거짓말을 할 수도 없고, 위로랍시고 입에 발린 말을 할 수도 없었다. 나는 사진작가들이 주름이 깊게 패고 검버섯이 여기저기 생긴 노인들의 얼굴을 찍어 전시한 것들을 보면, 예술가들은 그 얼굴을 뒤덮은 주름 하나하나도 예술로 만드는 것을 보게 되며, 이유는 그것들 하나하나에 그 사람의 인생이 담겨 있음을 알기 때문일 거라고, 그것을 어떻게 보느냐는 시선의 문제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글쎄 위로가 되었을지는 모르겠다. 나도 그 나이가 되어 봐야 그 말이 나에게 위로가 될지 알 것 같다.

 

소설 속 산티아고 노인은 다른 사람의 시선을 신경 쓰고 있지 않는다. 어제도 바다에 나갔고 그제도 나갔고 84일 동안 바다에 나갔으니 다음날도 배를 타고 나간다. 그는 아프리카 바닷가에 거닐고 사자가 고양이처럼 뒹굴며 노는 꿈을 꾸고, 먼 바다에서 다랑어를 잡던 시절과 소년과 고기를 잡던 기억을 떠올린다.

 

바다에 나가 혼잣말을 하는 노인의 모습을 통해 그가 오랫동안 혼자 살아왔음을 알 수 있다. 혼잣말 자주 하시냐는 질문에 독거를 하던 가족들이 있던 혼잣말을 조금씩은 한다는 대답을 통해 그분들의 외로움에 대해, 기억을 더듬는 노년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외국에서 일할 때 도대체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 속에서 한국어를 잊지 않기 위해 혼잣말을 했다는, 갑작스러운 솔직한 이야기에 나는 속으로 당황했다. 대부분 홀로 사시는 분들이어서 조심스럽게 질문하고 있었기에, 마음 한가운데가 습격을 받은 것 같은 기분과 함께 찡하게 아파왔다. 망망대해에 홀로 배에 있는 산티아고의 외로움이 그분들 것과 겹쳐졌다.

 

큰 물고기를 잡고 그것에 끌려가면서 노인은 그 물고기를 상상한다. 무언가를 어렵게 성취하지만 여전히 끝나지 않은 상황과 혹시 더 큰 어려움과 실패가 이어질지 모르는 인생에 대한 불안이 노인에겐 없다. “좋은 일은 결코 오래 지속되지 않는 법이야.”라고 말할 뿐이다. 그 물고기를 배 옆에 매어 놓아도 여전히 노인의 것이 아니다. 노인은 “인간은 파괴될 수는 있어도 패하지는 않지.”라고 말한다. 노화가 진행되고 육체는 쇠약해지고 파괴되어도 패하지는 않는다는 의지적 표현이다. 이런 작가에게서 절망이나 죽음을 읽을 수 있을까? “희망 없이 산다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이다. 심지어 그것은 죄다.”라고 했던 산티아고는 뼈만 남은 거대한 사체를 싣고 돌아와 소진된 채 누워있다. 그는 소년에게 자신이 완전히 졌다고 말한다. 노인의 항해는 실패인가? 대답은 각자의 몫이다.

 

『노인과 바다』를 텍스트로 정했다고 하자 남편은 시니어 모임인데 제목 때문에 저항감이 있지 않겠느냐고 했다. 나 역시 제목 때문에 잠깐 망설였었다. 분량과 큰 글씨 책이라는 선정기준 때문에 선택하긴 했지만 여기서 던져지는 메시지와 토론 주제에 대한 확신은 있었다. 몇 개의문장이 그들의 가슴을 건드리고 적시고 생각에 빠지게 했는지 나는 모른다. 그 분들의 노년에 기억될 한 문장, 한 장면이라도 남으면 좋겠다는 바램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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