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반의 서사시 〈대심문관〉은 이 소설 전체를 덮는 주제를 담고 있다. 대심문관의 배경은 예수그리스도가 이겨낸 사탄의 세 가지 유혹을 원형으로 하고 있다. 이반이 쓴 서사시의 배경은 16세기 종교재판이 극심했던 스페인 세비야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하여 다시 기적을 베풀지만 추기경은 그를 체포하고 심문한다. 추기경은 대심문관으로 신약의 세 가지 시험과 관련된 질문을 한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빵과 돈, 권력으로 당시 사람들을 구원할 수 있었지만 그것을 거절하였고, 그가 속한 교회는 이것으로 사람들을 구제하고 권력을 갖게 되었다고 강변한다. 교회가 인간에게 자유를 주는 대신 빵과 기적과 권위를 제공하며 통제한다고 말한다. 죄수(예수)는 그런 그에게 조용히 다가와 입을 맞추고 그(추기경)는 전율한다. 그들의 헤어지는 장면은 이 서사시의 압권이라 할 수 있다. 추기경은 죄수를 풀어주며 그에게 “다시는 찾아오지 마시오……. 앞으론 절대 찾아와선 안 되오……. 절대, 절대로.”라고 말한다. 마음 깊은 곳에서 영적인 파문이 일었지만 다시는 오지 말라고 말하는 것은 그가 돈과 권력을 포기할 수 없음을 알려준다. 인간이 그런 것 아닌가? 마음에 감동이 와도, 양심에 자극을 받아도 욕망에 휩싸이면 결코 돌아서지 않고 더욱 강퍅해지는 것! 교회는 진리, 신앙의 본질인 예수 그리스도 없이 권력과 돈만을 쫓는 부패한 모습을 갖고 있다. 조시마 장로의 죽음과 시취와 그에 동요하고 절망하는 사람들의 반응은 교회의 부패를 상징하는 후각적 장치와 심리다.
인간의 욕망은 러시아 사회를 지탱하고 있다고 믿었던 정교회 뿐 아니라 가정마저도 파괴하고 있다. 표도르 파블로비치 까라마조프의 삶과 그의 아들들 드미트리, 이반, 알렉세이의 태생과 성장기, 현재의 모습을 소개함으로 무너진 가정의 모습을 알려주고 있다. 표도르 파블로비치 까라마조프는 방탕하고 탐욕스럽고 포악하다. 아버지의 이러한 삶은 아들들에게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성격으로 상처로 방어 기제와 병적 기질 등으로 남아있다. 그들에 대한 전망을 어둡게 그릴 수밖에 없다.
<대심문관> 이야기는 드미트리의 심문과 병행한다. 드미뜨리에 대한 심문을 “세 개의 수난”으로 이름 짓고 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세 번의 심문 과정의 패러디다. 그 수난은 수치를 자극하는 것이다. 드미트리는 수치심 때문에 갖고 있던 돈의 출처에 대해 진술을 거부한다. 그가 공공연히 아버지를 죽이겠다고 했던 것들 그리고 친부살해의 혐의와 재판을 받는 것 역시 수치스러운 일이다. 수치심(부끄러움)은 이 소설을 끌고 가는 감정이다.
수치심과 죄의식이 한 개인을 장악하는 것의 부정적인 의미도 있겠지만, 그 감정이 공동체에 미치는 긍정적 효과가 있다. 수치(羞恥)는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이다. 염치(廉恥)는 부끄러움을 아는 것이다. 이등 대위 일류세츠카가 알렉세이에게서 돈을 받지 않은 이유는 그로 인해 당할 수치를 생각했기 때문이고, 염치가 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수치와 염치의 긍정적 효과를 상상해본다. 아마도 우리가 겪는 많은 부끄러운 일들, 불의가 많이 사라질 것이라 생각된다. 가난한 이등대위의 가정과 부유한 까라마조프가의 대조가 두드러진다. 표도르 빠블로비치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이다. 수치를 모르는 사람에게서 무자비하고 무정한 스메르쟈코프가 태어나고 길러지는 것이 이상하지 않다.
심문을 받던 드미트리는 아기 꿈을 꾼다. 울고 있는 아기를 농부는 아귀라고 부른다. 그는 울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꿈속에서 괴로웠던 그는 깨어나서 자신의 머리 맡에 베개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 사람들에게 그 친절함에 감사하며 눈물을 흘린다. 미쨔의 영혼은 눈물로 온통 전율하고 있었다고 한다. 꿈속의 아귀는 사랑받지 못하고 버림받았던 드미트리의 자아이다. 그는 베개를 고여 준 누군가의 손길에 감동해서 눈물을 흘릴만큼 외로웠던 것이다. 연민을 일으키는 장면이다.
이 소설에서 3000루블은 욕망, 자존심, 수치심, 죄의식을 건드리며, 갈등과 사건을 만들어 이야기를 이끌어 가고 있다. 돈의 행방이 시작부터 재판의 결과에 이르기까지 주인공들의 운명의 향방을 정하고 있다. 이반의 <대심문관>의 주제와도 닿아있다. 욕망과 힘에 관한 메시지다.
이제 <대심문관>은 재판정 풍경으로 변형된다. 재판이 시작되기 전 소설은 검사 이뽈리뜨 끼릴로비치에 대해서, 변호인 페쮸코비치에 대해서, 재판장에 대해서, 증인들에 대해서, 방청객들에 대해서 그리고 있다. 이들은 각자 자신의 문제에 집중하고 있고 한 사람의 운명이나 정의에는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방청객들은 검사와 변호사의 논고 중 자신이 관심을 두고 귀기울인 것만을 기억한다. 검사 이뽈리뜨는 논고에서 이 재판과 상관없는 이야기를 장황하게 한다. 그 내용은 이 집안의 형제들이 왜 이렇게 불행한 상황에 빠졌는가에 대한 것이다. 그가 알료샤가 애국주의와 신비주의에 빠지지 않기를 바란다는 부분은 작가의 생각이라고 추측된다. 러시아가 당시 부패와 혼란에 빠진 원인이 바로 그 두 가지라고 보고 있다. 애국주의와 신비주의는 어쩌면 한 뿌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한다.
변호사의 논고에서 밝힌 정황과 증거 논리적이고 정확한 추론에도 불구하고 배심원이 판결의 오류를 보이는 것은 이 재판정은 정의를 받칠 힘이 없음을 보게된다. 전통적 도덕의 잣대, 심정적 호소에 흔들리는 인간의 연약함을 보게 된다. 정의조차 허약하게 느껴진다.
죄의식에 사로잡힌 이반과 드미트리는 정신적 파멸을 보여준다. 인간 정신의 복잡하고 연약함을 새삼 느낀다. 그것이 차라리 미덕임은 그렇지 않을 때 인간 사회가 향할 지점이 끔찍할 것을 전망하기 때문이다. 혹시 우리가 사는 이 시대가 그리로 향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종교와 국가(사법에 나타난), 가정 등 모든 영역에서 붕괴를 겪고 있는 러시아에서 희망은 일류샤의 장례식에 모인 또래 친구들, 미래 세대에 있음을 역설한다. 그들이 어떤 지식과 정의감을 갖고 있는가에 달려 있는 것이다.
인간에 대한 연민, 부서지기 쉬운 마음, 신앙, 도덕....사법, 국가... 다시 읽을수록 새롭게 발견되고 생각할 주제가 많아지는 영원한 고전이란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