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한 상징으로 가득 찬 소설이다. 멜빌이 포경선 선원이었던 경험담으로부터 나왔을 이 작품은 모험담으로 읽기에는 단어, 문장, 장면들의 상징 때문에 다층적이고 복합적인 의미들을 내포하고 있다.
첫 문장 “Call me Ishmael.”을 이 책에서는 “내 이름을 이슈메일이라고 해두자”라고 번역했다. 여러 다른 책에서는 “내 이름은 이슈메일이다.” “나를 이슈메일이라고 불러라”라고도 되어있다. 이 번역을 두고 많은 논쟁이 있었다고 들었다. 그만큼 이 소설에서 중요한 문장이라고 할 수 있겠다. 화자의 이름이 이슈메일이다. 이슈메일 즉 이스마엘은 성경에서 아브라함에 의해 추방되는 아들이다. 아브라함이 아들을 얻지 못했을 시기 대를 잇기 위해 여종 하갈에게서 나은 아들이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얻고 이삭을 보호하기 위해 하갈과 함께 떠나보낸다. 이슈메일의 정체성을 읽게 된다. 주류에 속하지 못한 자, 스스로 자신을 떠도는 자, 추방된 자로 규정하고 있다.
그는 때로 “우울한 기분을 떨쳐버리고 혈액순환을 조절하기 위해” 포경선을 탄다. “권총과 총알 대신(31p)”이라고 말하고 있듯 죽음의 충동을 느끼고, 분노를 조절하지 못할 정도로 심기증이 심해질 때 바다로 나간다.
포경선을 타기 위해 도착한 뉴베드퍼드와 낸터컷에서 그의 눈에 띄고 심상에 새겨지는 이미지와 단어는 관(棺,coffin)이나 형틀, 비문과 같이 죽음을 암시하는 것들이다. 피쿼드 호에 타기 전 만난 선원 일라이저(엘리야)의 예언과 같은 말들도 이 항해가 어떻게 끝날 것임을 암시한다. 그러면 이런 암시와 전조가 가득함에도 이슈메일은 왜 배를 타는가? 사람이 그렇다. 모든 전조를 무시할 만큼 지금 당장 배를 타야한다는 욕구가 그 어두운 암시를 이긴다. 그리고 이슈메일에게는 이런 것들이 상관없는 문제들이다. 죽을 것 같아서, 계속 머뭇대다간 누군가를 죽일 것 같아서 바다로 나가야 하는 것이다.
선장 에이허브(아합)은 성경에서 이스라엘을 도탄에 빠뜨리고, 자신도 비참하게 죽은 왕의 이름이다. 이 이름은 선장이 항해를 어떻게 이끌어 갈지 짙은 암시를 드리우고 있다. 암시라기에는 노골적인 이름이어서 정해진 결말을 가리키고 있다는 생각이다. 독자는 그 마지막을 향해 페이지 한 장 한 장을 넘기면 나아간다. 페이지의 양이 마치 정해진 때를 향한 시간의 분량인 듯이!
표면적으로 에이허브는 자신의 다리를 앗아간 ‘모비 딕’에 복수하기 위해 항해를 한다. 선원들에게 연설을 하고, 자신의 사람을 몰래 승선시킨다. 의혹을 제기하거나 공포에 휩싸인 선원들에게 아주 작은 과학적 트릭으로 그들을 설득하기도 한다. 이러한 그에게 문제의식을 제기하던 스타벅마저도 그를 따르게 된다. 죽을게 분명한 모비 딕과의 결전에 나서는 선장을 만류하는 그의 간청에서 그를 영웅이나 우상처럼 대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에이허브가 선원들이 자신을 따르도록 하기 위해 사용한 방법들은 정치행위와도 유사하다. 작가는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당시 미국 사회를 비판하고 있다. 멜빌이 『모비딕』을 대폭 수정하던 1950-51년 시기 미국은 노예제를 둘러싸고 심각한 국가적 분열의 위기를 겪고 있었다. (『영미문학의 길잡이2』) 그에 따라 피커드 호는 모험담을 위한 포경선의 의미를 넘어 미국이라는 국가 혹은 그와 유사한 공동체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그 국가의 지도자나 전체를 이끌어 가는 정신이 지향하는 지점이 공동체의 일원의 희생을 강요하고, 모두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 실제로 에이해브가 현란한 기교로 선원들을 굴복하게 한 후 “경멸감과 승리감으로 불타는 에이해브의 두 눈에는 그의 파멸적인 오만함이 넘쳐흐르고 있었다.”는 문장은 그런 지도자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선원들은 저마다 이 포경선을 탄 이유가 있다. 이슈메일과 키퀘그의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대부분 생업을 위한 것이다. 모두에게 배를 탄 저마다의 사연과 목적이 있지만 결국 이 배가 나아가는 방향은 모비 딕을 향한 길이다. 그것이 국가가 아닐까? 국가의 방향이 한 사람 한 사람의 욕망이나 지향을 다 수장시킬 수도, 그 방식대로 살아가도록 보호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 국가를 이끌어가는 정신이 한 개인의 삶을 폐허로 만드는 것을 역사는 증언하고 있다.
향유고래에서 기름을 퍼 올리거나 부패한 고래에서 용연향을 건져 올리는 장면은 위험하기도 신기하기도 하다. 그들의 이런 노동은 자본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결국 이 배도 돈, 자본이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고래 떼를 쫓다가 배들이 겁에 질린 그 무리 안으로 끌려 들어가 고래들이 만든 원형 안에 갇히고, 평화롭게 어미가 새끼에게 수유하는 장면들을 목격한다. 선원들은 전쟁 같은 바깥과는 다르게 놀랍고 신비한 세계를 들여다보게 된다. 경이롭고 신비하고 두려움마저 느끼는 이 풍경에서 나는 제국주의가 파괴하고 있는 식민지의 전통과 풍속들, 생명의 이어짐을 보게 된다. 전쟁이 벌어지는 외부의 안쪽에서는 여전히 생명을 지키는 고요함이 유지되고 있지만 언제 파괴될지 모르는 고요함이다. 이것은 식민지 뿐 아니라 대륙 안에서 자행된 원주민들에 대한 강제이주와 학살을 떠올리게도 한다.
배 우현에 향유고래 머리를 달고, 별 가치가 없는 참고래이지만 잡아서 좌현에 그 머리를 달면 뒤집힐 일이 없다는 한 메시지를 얻는다. 한 공동체가 유지되는 방식이다.
“당신이 한쪽에 로크의 머리를 들면 그쪽으로 기울어지지만, 반대쪽에 칸트의 머리를 들면 다시 원래 자세로 돌아오는 것과 마찬가지다(405p)”
그러나 그렇게 평형을 유지하다가도 곧 곤경에 빠지게 된다. 어쨌든 균형과 불균형은 번갈아 가면 오게 되어있으니! 그렇다고 화자가 말하든 이것들을 다 바다에 집어던질까? 고래머리는 그럴 수 있어도 끊임없이 새로 생겨나는 사상은 그럴 수 없을 것이다. 오히려 그것들을 자연스럽게 커지고 소멸하도록 하는 것이 공동체가 유지되는 방법이란 생각이다.
피쿼드 호는 하나의 국가를 상징할 수 있다. 특히 여기에 승선한 32명의 선원은 당시 미국의 32주에 해당한다고 보기도 한다. 이 선원들 사이에는 위계와 역할이 존재한다. 에이해브(선장)·스타벅(일등항해사)·스터브(이등항해사)·플래스크(삼등항해사), 작살잡이들(퀴퀘그, 타슈테고, 다구) 등. 한편 에이해브가 비밀리에 태운 선원들 중 페달라(배화교도)의 역할은 오로지 모비 딕을 추격하고 사냥하기 위해 돕는 사람이다. 페달라가 배화교도로 불리는 것에서 그리고 그와 에이해브가 서로 눈빛으로 대화하는 장면에서 그는 에이해브가 이 항해를 계속할 수 있도록 정신적인 지지와 영적 교감을 하는 관계로 보인다. 한 국가에서 보여지는 모습이고, 민주주의를 무너뜨리는 위험요소가 될 수도 있다.
선원들 모두가 이 배는 모비 딕을 쫓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다. 그들은 모비딕에 대한 인식도 저마다 다르다. 그러나 그 배에 탄 이상 이 추적과 사냥에 가담하게 된다. 이것을 국가의 메타포로 받아들인다면 많은 의미들을 얻게 된다. 에이해브에게 모비 딕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예상하면서도 싸워야 할 어떤 것이었을지 모른다. 그것이 그가 이 배의 선장으로 있는 의미이다. 그러나 모비 딕의 흰색은 저마다 다른 느낌이다. 대표적으로 스타벅에게는 신성으로 다가온다.
삶은 시간의 베틀 위에서 필연과 우연과 자유의지로 짜여진다는 말이 다가왔다. 이슈메일과 선원들이 이 배에 탄 것은 어쩌면 운명이었을지 모른다. 마치 한 국가에 태어나는 것이 선택할 수 없는 것처럼. 그러나 이 항해 중 일어나는 일들은 우연이고 그들의 대응방식은 선택에 의한 것이다. 배라는 공간 안에서 어떤 우연과 자유 의지가 그들로 하여금 파선으로 가는 길을 막을 수 있을까를 생각하게 된다. 외부로부터 오는 위험과 그 위험으로 끌고 들어가는 지도자의 욕망을 제어할 수 있는 것, 개인의 자유 의지가 아닐까? 그 자유 의지가 힘을 발휘하는 것, 멜빌이 고민했던 민주주의에 그 해답이 있다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