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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지향(指向)이 있는 한, 방황하느니라.(『파우스트』 전영애역 317행)”

발자크를 보며 나는 파우스트적 인간을 생각한다.

그의 작품 중 가장 자서전적이라는 『루이 랑베르』를 보며 더욱 그렇다.

송기정 교수는 발자크의 거듭되는 실패와 그로 인한 부채는 그의 “창작의 원동력”이라고 말한다. 자신이 원하는 정체성을 늘 찾아 나섰던 그의 삶은 방황으로 보일 수 있으나, “선한 인간은 바른 길을 잘 의식하고(『파우스트』 전영애역 317행)” 있듯, 그 역시 글쓰기에서 길을 찾았다고 생각한다. 방황이라 보였던 것들이 글을 쓰기 위한 지식들을 담는 시간들이었음을 알게 된다. 그러다 어떤 때는 그의 이 방대한 지식이 빼어난 묘사들을 훼손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줄 아는 “견자”로서의 자질을 보였던 루이 랑베르는 사제인 삼촌의 집에서 천착했던 영성 서적들과 방돔기숙학교에 적응하지 못하고 혼자 있는 시간동안 깊숙이 빠져들었던 신비주의는 파리에서 환멸감을 느낀 시간동안 더욱 빠져 든 사유의 대상이었다. 그의 천재성은 한 가지 주제에 과도하게 빠져 고립됨으로 정신분열을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

과연 그가 삼촌의 신비주의 관련 책을 가까이 접하게 된 것, 그리고 스탈남작부인의 후원을 받아 방돔 기숙학교에 가게 된 것이 그에게 긍정적으로 작용했는가에 대한 물음이 남는다.

 

“반쯤은 군사적이고 반쯤은 종교적인(21p)”인 기숙학교는 루이와 같은 소년에게 합당했는가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발자크의 기억 속에 있는 방돔 기숙학교에서의 시간이 자신의 어머니를 비난할 만큼 불행했음을 알게 된다. 발자크는 이 근대학교의 비인간성과 폭력성을 고발하고 있다. 발자크는 화자로서 루이 랑베르의 삶을 말해주고 있지만 두 인물 다 발자크임을 추측할 수 있다.

 

루이 랑베르가 이 학교 시절부터 계속 천착하여 연구한 주제는 인간의 정신을 과학적으로 증명하는 것이다. “생각하는 것, 그것은 보는 것”이라고 한다. 영적인 세계를 주변에 흐르는 자기로 설명하려 한다. 지금의 지식으로 보면 허황돼 보이지만 당시 과학의 한 흐름이었다고 한다. 그는 <의지론>을 쓰기 시작하지만 완성하지는 못한다. 그 의지론은 쇼펜하워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떠올리게 한다.- “이 고통으로 가득 찬 생(生)의 세계를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첫째 모든 욕망을 떠난 예술적 관상(觀想)을 통해서이다.” 

결국 그렇게 꼼짝 않고 먹지도 말하지도 않는 상태, 정신만 남은 것 같은 상태로 있다가 죽음을 맞이한다.

 

결국 나약한 인간의 그릇에 담을 수 없는 '절대'를 담으려 했기에 그는 분열된 자아로 광기를 일으킨 것이란 생각이다. 그러면, 발자크는 왜 이런 소설을 썼을까? 이 작품이 그의 『인간희극』의 철학분야에 속해 있다는 것이 그 답을 어느 정도는 알려준다. 발자크는 철학자를 추구했다. 또한 과학에도 심취해 있었으며, 실험실을 마련하기도 했다고 한다. 철학과 과학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철학적 명제를 과학으로 증명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이 소설은 그가 진리를 추구해왔던 과정, 그리고 유소년기의 상처와 그를 좌절시킬 수밖에 없었던 환경들에 대한 자전적 이야기를 담은 것이라 생각된다.


 그의 저널들 『현대 생활의 발견』이란 책의 「우아하게 사는 법」, 「발걸음의 이론」, 「현대의 자극제론」은 발자크 <인간희극>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들이 있다. 나는 「발걸음의 이론」에서 루이 랑베르의 연구와 집착, 광기의 위험한 순간들을 엿보았다.

 

발자크는 ‘인간의 겉모습을 뚫고 나오는 의지가 전기 물질로서 드러난다’는 루이 랑베르의 이론을 인용하며, 이런 인간 정신사를 증명하는 이론이 다루어졌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그는 또한 ‘발걸음’이 그의 직업, 정신, 심리 등을 드러내는 체계를 만드는 연구를 하겠다고 한다. 하루 종일 한 자리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관찰하는 그의 집요함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그 발걸음에서 사람의 내면을 파악하는 작가로서의 탁월한 관찰력이 뛰어난 표현력으로 이루어진 작품을 만들어내는 능력임을 알게 된다.

 

“나는 학자의 엄밀함과 바보의 미망(迷妄) 사이에 머무를 것이다. 나는 내 책을 읽으려는 사람에게 그 점을 충실하게 알려야 한다.(『현대생활의 발견』「발걸음의 이론」97p)”

 

여기서 ‘바보’는 구덩이를 보고도 빠지는 사람이고, ‘학자’는 그 깊이와 거리를 측정한 뒤 계단을 만들어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와서 만족하는 사람이라고 발자크는 말한다. 이 둘 사이에서 그 글을 쓰려면 두려움 없이 광기를 상대하고 겁 없이 과학을 상대해야 한다고 말한다. 왜 구덩이였을까?

 

그의 연구도 난관에 봉착하는 순간이 있다.

 

“내 지식의 ‘혼돈 상태’를 두고, 내가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 그로부터 나는 단지 보잘것없는 콩트를 끌어냈을 뿐이고, 혼돈 상태는 거기에서 인체 생리학을 불러냈다. 나는 우리를 극단으로 내모는 법칙들을 연구하며, 신이 그 힘의 중심을 우리 마음속 어느 곳에 두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또한 그 능력이 각 피조물의 환경에 부여한 현상들을 밝힐 수 있었다.(『현대생활의 발견』「발걸음의 이론」105~106p)”

 

루이 랑베르의 좌절이 보인다.

 

“신의 목소리를 가장 잘 들었던 수학자가 천부적인 분석적 재능으로 주장하였듯이, 지중해 해안에서 쏜 총알 하나가 중국 해안에서도 감지되는 움직임을 일으켰다면—만약 우리가 우리 박으로 큰 힘을 발산한다면 말이다.—우리는 주위 환경의 조건을 변화시켰거나, 제자리를 찾고자 하는 활력의 효과를 통해, 우리를 둘러싼 생물과 무생물에 필연적으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현대생활의 발견』「발걸음의 이론」106p)”

 

루이 랑베르의 자기 이론을 연상하게 한다.


18세기 말 메스머의 ‘동물 자기론’과 1830년대 프랑스에서는 ‘신비주의’가 유행했다. 루이 랑베르가 천착했던 스베덴보리의 저작들은 프랑스어로 번역되기 시작하면서 다시 빛을 보았다. 자기에 관한 이론이 가장 많이 언급된 소설은 『루이 랑베르』다. 스베덴보리의 저작들은 루이 랑베르가 천착하며 읽었던 것들이다.

 

“당시의 지적 분위기로 보아 신비주의에 대한 믿음을 과학적으로 증명하려는 발자크의 입장은 아주 특별한 것이 아니다”라고 『오노레 드 발자크』의 저자 송기정 교수는 말한다.

 

“당시 실증주의와 신비주의를 결합하려는 연구는 수없이 많았다. 스베덴보리도 메스머도 라바터도 과학자인 동시에 신비주의자였다. 인간과 땅과 우주의 통일성을 추구했던 발자크에게 과학과 신비주의의 결합만큼 유혹적인 것은 없었을 것이다. 그는 과학에 몰두했지만, 과학자들보다 더 대담하게 우주와 인간과 과학을 통합하고자 했다. 그는 실증주의자였지만 “신비주의적 실증주의자”였던 것이다. 많은 작가가 그의 생각에 동참했다. 그러나 아무도 발자크처럼 시대의 신비주의와 과학의 관계를 묘사하지 않았다. 19세기 풍속연구가다운 그의 면모를 다시 한 번 느끼게 된다.(『오노레 드 발자크』154-169p)“

 

“나는 모든 것을 배웠지만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나는 걸었다. 나와 같은 가슴, 목, 두개골을 가지지 못한 어떤 사람은 이러한 문제에 직면했을 때 다른 도리가 없어서 아마 이성을 잃었을 것이다. (「발걸음의 이론」111p)”

 

“모든 시대에는 그 시대의 비서 역할을 하는 천재가 있다. 호메로스, 아리스토텔레스, 타키투스, 셰익스피어, 아레티노, 마키아벨리, 라블레, 베이컨, 몰리에르, 볼테르는 시대가 말해 주는 대로 펜을 들었다.(「발걸음의 이론」 117p)”

 

좌절의 순간에도 골상학과 신체과학으로 자신의 뛰어남을 피력하는 발자크!

그는 스스로를 자신의 “시대의 비서 역할을 하는 천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던 주제를 연구하는 자신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있다.

 

<인간희극>에는 그가 문학인 이상(以上)의 정체성을 추구했음을 알려주는 철학·과학·역사·예술 분야의 방대한 지식이 담겨있다. 읽어갈수록 로댕의 <발자크>가 오버랩 된다. 좌절과 고단함, 지식으로 가득 찬 머리를 이고 가는 자만심 섞인 고뇌의 발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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