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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의 서재
  • 잃어버린 환상
  • 오노레 드 발자크
  • 32,000원 (1,600)
  • 2012-12-30
  • : 586

『잃어버린 환상』은 복고 왕정시대를 살았던 제롬 니콜라 세샤르의 역정과 인물됨으로 시작해서 그의 죽음과 유산으로 마치고 있다. 그는 중심인물인 다비드의 아버지로 조연이지만 이 소설의 시대를 상징한다. 그의 퇴장은 다가올 시대(7월 왕정 이후시대)를 예고한다.  시대의 부침 덕에 인쇄소 하급 직원으로 일하던 그는 인쇄소 주인이 된다. 그렇게  빈곤을 벗어난 그는 인색함의 대명사가 된다. 그리고 모은 재산을 남겨두고 죽는다. 아들이 그 재산을 지켜낼지 걱정하면서. 1829년의 죽음은 한 시대의 문을 닫는 것으로 읽혔다. 그는 이 소설의 괄호다.

 

발자크의 <인간희극>에는 2500명의 인물이 등장하고 그 중 500명은 여러 소설에서 재등장 합니다. 『잃어버린 환상』은 <인간희극>의 중심이 되는 작품이다. 한 청년의 사랑, 질투, 배신, 복수뿐 아니라 역사, 정치, 저널리즘, 경제(어음발행과 지불문제), 출판, 인쇄업, 연극 무대와 관련된 방대한 내용이 그려지고 있다. 뤼시앙이 주인공처럼 보이지만 다비드나 다른 인물에 초점을 맞춰 여러 가지 주제로 읽어낼 수도 있다.

 

『잃어버린 환상』은 역사의 부침, 프랑스의 급변하는 사회 안에서 뤼시앙과 다비드, 사교계와 세나클 모임, 저널리스트와 작가, 과학자(발명가)와 자본가가 가지는 가치의 대립을 그리고 있다. 이 대립하는 가치들 사이에서 방황하는 인간 뤼시앙의 편력은 파리와 앙굴렘을 오가며 시대의 문제를 드러낸다. 대척점에 있는 가치들은 발자크의 바람과 현실 혹은 환상과 환멸을 보여준다.

 

뤼시앙은 작가를 꿈꾸지만 기사를 쓰고, 작가들의 철학적 모임을 이상으로 여기지만 사교계 사람들과 어울린다. 다르테즈와 같은 고독한 정신의 소유자들을 좋아하지만 루스토에게서 돈이 되는 글을 쓰는 방법을 배운다. 뤼시앙은 기사로 성공하고 은밀한 비평으로 복수하면서 펜의 권력을 맛본다, 두 진영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양쪽 모두에게 배척받는다. 어설픈 양심을 거두지 못해 이도저도 아닌 상황에서 아는 것을 실천하지 못하는 지식인의 모순과 나약함을 본다.

 

『잃어버린 환상』은 프랑스의 18~19세기 역사와 사회 변화를 안고 있다. 그가 살고 있던 지역은 앙굴렘과 루모로 나뉘어져 있다.  바르즈통 저택에 모인 귀족들, 식스트 뒤 샤틀레의 처세는 프루스트의 작품을 떠올리게 한다. 그래서 아마도 독자들이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발자크를 연상하는 듯하다. 귀족인 어머니의 성을 쓰는 루모의 약제사의 아들 뤼시앙이 앙굴렘의 사교계를 들락거리는 것은 노골적인 적대감을 형성한다. 이 계급간의 경계에 비해 오늘날 우리사회에 그어진 경계가 더 깊지 않을까? 거대한 힘 자본이 새겨놓은 우리 사회의 경계는 무기력감을 느끼게 한다.

 

“상부에는 귀족과 권력, 하부에는 상업과 돈이 있는 것이어서, 어느 곳에서나 이 두 사회 지대는 끊임없는 적대 관계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두 도시 지역 중에서 어느 편이 더 상대방을 증오하는가 하는 것을 알아맞히기란 어려운 일이다. 제정 시대에는 상당히 평온했던 상태가 왕정복고가 들어선 9년 전부터 악화되었다. 앙굴렘과 루모를 갈라놓고 있는 감정에 계급의식이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가 하는 것은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일이다. 상인은 부유하고, 귀족은 일반적으로 가난하다. 서로 간에 양쪽을 멸시하면서 그것을 보복으로 삼는다.(35~36p)”

 

함께 파리로 간 뤼시앙과 루이즈(바르즈통 부인)가 거기서 서로에게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은 파리생활의 환상이 사라지고 환멸만이 남을 것을 예고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뤼시앙은 그 자신에게서도 환멸을 느낀다. 그래서 그는 여러번 후회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의 후회나 회개는 의지가 없는 “성실하게 연기된 장면과 같은 가치밖에 없다.(553p)”

 

박수부대가 존재하는 극장과 문학과 무대 비평으로 대중을 호도하는 언론의 타락은 “정신의 자본주의화에 대한 희비극의 대 서사시(루카치)”다. 파리의 문학 생산과 유통·소비의 부패한 구조와 비평의 부조리함은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없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토록 원하는 이런 평판이란 거의 언제나 왕관을 쓴 창녀인 것입니다. 그래요, 저질 문학 작품에 대해서 평판이란 막다른 거리 구석에 얼어붙어 있는 가엾은 소녀입니다. 이류 문학에 있어서는 그것을 저널리즘이라는 창가 출신의 첩이며, 나는 그의 기둥서방 노릇을 하는 것입니다. 다복한 문학에 있어서 그것은 찬란하고 거만한 창부인데, 그런 창부는 가구를 갖추고 있고, 나라에 세금을 내고, 고관대작을 맞아들여 대접도 하고 박대하기도 하고, 하인과 마차를 가지고 있고, 목이 마른 채권자들을 기다리게 할 수 있어요.(277p)”

 

발자크는 나폴레옹시대(1804~1814)와 복고왕정시대(1814~1830)에 유년기와 청년기를 지나고, 7월 왕정시대(1830~1848)에 작품을 썼다고 한다. 이 소설의 배경은 복고왕정시대다. 하지만 그가 비판하는 저널리즘은 발자크가 경험한 7월 혁명 이후의 모습이라고 짐작된다. 19세기 프랑스의 저널리즘은 정치, 사회, 예술과 아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개인적인 감정 때문에 다른 사람을 교묘히 비판함으로 보복하는 펜을 휘두르는 기자는 도살자이다.

 

“신문이 어떤 권력자들에게 악착같이 달려들 때는 언제나 그 이면에는 어음 할인이 거절 되었다거나, 어떤 도움이 주어지지 않았다거나 하는 일이 있다는 것을 알아두라구. 이런 사생활에 관한 공갈은 부유한 영국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기 때문에, 영국 신문의 많은 은밀한 수입원이 되고 있어. 그래서 영국 신문은 우리 신문보다 훨씬 더 타락했어. 우린 어린애에 불과해! (484p)”

 

한편, 모든 주제의 글을 양쪽 진영의 극단적 시각으로 써야만 읽히는 당시 언론의 현상 역시 우리시대의 저널리즘과 일치한다.

 

뤼시앙이 파리에서 발행한 어음때문에 다비드는 파산하고 발명품인 종이제조법을 보트렝형제에게 빼앗기게 된다. 그 과정에서 당시 금융제도와 사법제도를 이용하는 소송대리인 프티 클로의 능란함에 주목하게 된다.  돈과 법을 한 몸처럼 움직이게 할 수 있는 오늘날의 사법 권력을 떠올리게 한다.

 

절망하는 뤼시앙이 카를로스 에레라 신부의 교설에 유혹당하는 장면은 그의 참회가 거짓된 것임을 드러낸다. 스페인 교단참사회 신부라고 밝히는 신부의 수상함은 『돈키호테』를 연상시킨다. 과대망상증에 사로잡힌 돈키호테처럼 그는 또 다른 환상에 사로잡혀 신부와 함께 길을 떠난다. (이 수상한 신부의 정체는 이 작품에서는 비밀이다.) 아마도 그의 길은 사기꾼의 것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7월 혁명 이후 프랑스 젊은이들은 글을 통해 재물을 꿈꾸고 실현하기도 했다고 한다. 슈테판 츠바이크는 발자크 평전에서 “그는 더는 글을 쓰지 않기 위해 글을 썼고, 더는 돈에 신경 쓰지 않기 위해 돈을 벌었으며, 세계의 모든 나라, 모든 여자, 모든 사치와 작가로서의 불멸의 명성을 얻기 위해 세계로부터 등을 돌렸다”고 한다. 그가 원하는 인생을 위해 밤낮 없이 쉬지 않고 일했다. 발자크는 “나는 나 자신의 주인인 동시에 나 자신의 하인이기도 했다”고 말했다. 주인인 때는 언제이고 하인인 때는 언제일까 하고 생각하는 한편, 모든 사람이 다 그렇지 않을까 하는 조금은 슬픈 결론에 다다른다.


발자크는 독자들이 자신의 작품에서 작가의 삶을 읽지 말기를 당부한다. 그리고 작품 안에서 세세한 가이드를 한다. 그 뛰어난 문장으로 독자가 지칠 정도로 방향을 제시한다. 그러나 인쇄업, 언론 출판 사업 등 손을 대는 것마다 실패하고, 돈을 벌기 위해 작품을 써야했던 작가의 고된 체취가 너무나 짙게 배어 있다. 발자크를 생각하면 안쓰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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