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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zinga님의 서재
  • 영혼 없는 작가
  • 다와다 요코
  • 16,200원 (10%900)
  • 2025-08-27
  • : 9,786

(이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하였습니다.) 『영혼 없는 작가』(최윤영 옮김, 엘리, 2025, 272쪽 분량)는 독일어와 일본어로 글을 쓰는 이중 언어 작가 다와다 요코의 에세이 선집이다. 이번 개역 증보판에는 초판본(2011)에서 아홉 편을 추가하여 모두 스물세 편을 담았는데 『유럽이 시작하는 곳』(1991), 『부적』(1996), 『해외의 혀들 그리고 번역』(2002)에서 정수를 모았다. 일본에서 태어나 러시아문학과를 졸업하고 독일에 정착하여 독문학을 전공한 다와다 요코 문학은 일본어 작품과 독일어 작품이 주제, 형식, 문체 면에서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고 역자는 전한다.(p.268) 일본어 작품이 스토리를 갖춘 본격 문학에 가깝다면, 독일어 작품은 에세이적 성격이 강하다고 평가하는데 이번 작품집은 후자에 속하는 작가의 진면목을 만날 수 있다. 작가를 향한 호평은 기대를 높이고, 자유로운 여행자이자 집요한 관찰자, 창조적인 예술가로서의 다와다 요코를 서둘러 만나고 싶게 한다.

 

<유럽이 시작하는 곳>은 화자가 동 시베리아 항구까지 배에서 보낸 시간과 유럽까지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탄 백 육십 시간의 기록을 모았다. 기록은 여행 일기, 여행이 끝난 뒤에 ‘지어낸’ 여행 일기, 여행기와 상상, 배의 도서실에서 본 지도, 동화 모음집, 잠에 빠져들며 들었던 옛 이야기, 어머니가 어린 시절에 추천 받았다는 지혜로 가득 찬 소설, 화자가 썼던 소설의 한 부분 등을 포함한다. 이야기와 현실, 과거와 현재가 뒤섞이면서 화자는 목적지를 향하여 이동하고 마침내 도착한다. 기록 중 등장하는 시베리아의 숲처럼 지혜로 가득 찬 소설, 모스크바를 도서관이 중심인 도시로 각인케 만든 책은 과연 무엇이었을지 궁금하다. <엄마말에서 말엄마로>는 독일로 이주한 작가가 필기도구와 문구류를 소재로 언어의 독특한 차이, 언어를 선물해준 타자기에 대한 회고를 담았다. 특히, 유년 시절에는 단어가 어떻게 다가오는지를 서술한 장면이 특히 인상적이다.

 

표제작 <영혼 없는 작가>는 독일어 단어 ‘방’에서부터 연상의 실타래를 풀어나간다. 방은 공중전화 부스인 전화 방, 고해 방, 작가의 서재로 이어진다. 인간의 영혼을 생각할 때 떠오르는 두 가지 이미지를 기다란 빵과 물고기와 견주고, 영혼이 그 사람으로부터 독립되어 동물로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는 설명도 덧붙인다. ‘내가 겪고 쓰는 모든 것은 영혼의 삶과 부합한다.’(p.52)는 문장이 여운을 남긴다. 작가가 영혼이 없을 수 있을까, 영혼을 정신과 등치시킨다면 오히려 영혼 지킴이, 영혼 수호를 사명으로 하지 않을까. ‘영혼 없는 작가’라는 아이러니한 제목에 대해 작가는 근거를 들어 설명한다. 영혼은 비행기처럼 빨리 날 수 없어서 비행기로 여행할 때 영혼을 잃어버리고 영혼이 없는 채 목적지에 도착한다고. 동화적인 이유를 독자는 곱씹으며 페이지를 넘긴다.

 

중세도시 관광여정의 짧은 스케치 <로텐부르크 옵 데어 타우버:독일 수수께끼>는 진짜 독일 인형인 호두까기 인형과 다양한 인형들 이야기를 보여준다. <통조림 속의 낯선 것>은 읽기와 이해, 오해와 불일치 등을 다양한 대상과 소재로 연결시킨다. “가끔 나는 모어를 유창하게 말하는 사람들을 보면 구역질이 났다. 그 사람들은 착착 준비해 척척 내뱉는 말 이외의 다른 것은 생각하거나 느끼지 않는다는 인상을 주었기 때문이다.”(p.83)라는 문장은 독자를 멈추어 생각하게 만든다. 말 뿐인 말, 말을 위한 말, 의식을 거치지 않은 소리에 가까운 말을 비롯해서, 유창함의 허위와 위선을 비판한다. <사실 아무에게도 말하면 안 되지만 유럽은 존재하지 않는다>에서도 감각과 언어가 맺는 타성을 직시한다.(p.88)

 

<부적>은 의심과 회피, 경계와 자기방어의 영역이 서서히 겹치다가 분리되는 일상을 엿볼 수 있다. <전철에서 책 읽기>는 제목 그대로가 주제인 일종의 관찰이자 고찰문이다. 한번쯤은 관심을 가지고 생각해봤을 법한 이야기를 작가는 멋지게 펼친다. <사전 마을>도 발상의 전환, 상상의 거침없음을 즐길 수 있는 작품이다. 일본어 원전과 독일어, 한국어 번역을 함께 실었다. <귀신들의 소리>에서 작가는 어린시절 가면극의 북소리를 회고하며 자신에게 비인간적인 무엇이었던 음악에 대해 말한다. 하나의 소리가 품고 있는 여러 겹의 소리가 낯설고 이질적이라 작가는 계속 자문한다. 연상은 불꽃의 갈라지는 끝자락, 이중의 혀를 지나 부조화의 다성성을 상징하는 인물 ‘악마’(p.182), 바흐의 칸타타에 등장하는 단어에 이른다. 바흐 음악회 감상 후 ‘우리의 음악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p.183)라는 질문에 편을 나누어 받아들이거나 배척하는 함의를 지닌 ‘우리’라는 단어에 주목한다. 독자 역시 일상에 배어있는 관습적 사고를 다시 바라보게 된다. 각성의 순간은 때때로 등장한다.

 

<번역가의 문 또는 첼란이 일본어를 읽는다>에서는 문학의 ‘번역 가능성’, 번역본 또한 문학일 수 있는지를 숙고한다. 작가는 파울 첼란의 시 원전과 일본어 번역본의 관계를 시를 직접 인용하며 ‘첼란의 시들이 일본어를 들여다본다는 인상은 더욱더 강해’(p.195)진 근거를 밝힌다. 첼란의 단어들이 보관 용기가 아니고 열림이라는(p.200) 발견, ‘단어 하나를 쓴다는 것은 문 하나를 연다는 것’이며 글자 읽기는 단어 읽기이지 문장이나 음향 읽기가 아니라는(p.201) 통찰을 차분하게 전달한다. 독자는 작가의 세심함 덕분에 경이로운 세계를 잠시 엿본 듯한 기분에 잠긴다. <해외의 혀들 그리고 번역>에서 작가는 프랑스 시인의 시 원전을 받고 ‘배우지 않은 언어는 투명한 벽’(p.216)이라고 생각한다. 초벌 번역본을 받기 전의 기간을 ‘며칠 동안이지만 읽을 수 없는 원본과 같이 살았다는 것을 기쁘’게 여긴다. 짐작하고 추측하는 알지 못하는 문자를 낯설게 동시에 기대하며 기다리는 풍경은 그 자체로 시적이다.

 

『영혼 없는 작가』는 정좌하고 책상에 앉아서 읽고 있어도 내내 흔들리며 어딘가에 기대어 있다는 느낌을 준다. 작가는 여행 중이고, 그 여행길의 동반자로 독자를 택했다. 독자는 이름 모를 여행지의 예기치 않은 날씨의 변화, 분위기나 낯선 풍경에 반복해서 노출된다. 지도도 정보도 없이 무작정 작가를 따라 나선 채, 길 위에 서서 띄엄띄엄 행하는 독서, 급하게 넘기는 페이지, 여운을 정리하지 못하고 다음 이야기로 서둘러 뛰어들 때의 불안과 조급함, 뜻밖에 발견한 보석을 주어 담을 새 없이 이루어지는 자리이동 등이 그의 작품을 읽으며 부차적으로 얻는 수확, 또는 경험이다. 작가의 아이같은 상상력이 때론 천진하게 다가오고 유머와 위트는 생기를 부여한다.

 

능수능란한 이야기의 세계는 휘리릭 지나가는 듯하나, 상당히 정교한 일침들이 박혀있다. 유년 시절에 단어는 어떤 힘을 갖는지(p.46), 원본 없는 번역이 일어나는 인간의 몸과 태어날 때 주어지는 원본 텍스트 보존 장소인 영혼(p.55), 모어 유창자를 볼 때 경험하는 구역질, 포장과 내용물의 불일치, 단어와 이미지의 괴리, 파울 첼란의 시 탐구에서 원전과 번역의 불가사의한 연결, 번역을 염두한 창작 가능성 등 이야기는 독자를 매혹한다. 단어, 텍스트, 의미, 소통으로 이야기는 무한히 확대된다. 공간을 차지할 때 작가는 이방인으로 때론 정착민으로 존재하며 투명하게 움직임과 쉼을 누린다. 누릴 수 있는 이유는 아마도 작가의 관찰자적 시선, 적극적인 기록자 시선, 깨어 있는 의식, 그렇게 무한히 수집하는 순간을 결코 잃어버리는 법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자유롭고 에너지가 가득하며 거침이 없다. 그렇게 고요하고 소란한 즐거움을 책에 저장했다. 『영혼 없는 작가』는 다와다 요코의 세계로 들어가는 빼어난 입문서 또는 초대장이 되어줄 것이다.

 

 




책 속에서>


유년 시절에는 단어 자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럼으로써 모든 단어가 각자의 삶을 살게 된다. 이 삶은 단어를 문장 내의 의미에서 해방시켜준다. 심지어 어떤 단어들은 너무나 생명력이 넘쳐 마치 신화속의 인물처럼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펼쳐 나갈 수 있다.(p.46)

 

글을 쓰는 사람은 삶을 온전하게 사는 게 아니라는 주장은, 사람과 삶을 주체와 객체로 나누어 생각하는 사람들에게서 나온 것임이 틀림없다. 아마 그들은 인간은 무엇보다도 자신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나는 나도 살고 있고 나의 삶도 살아간다고 말하고 싶다. 나의 글도 삶이 있다. 그래서 누군가가 글을 쓸 때 그가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느냐는 질문은 비뚤어진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이 질문은 인간을 중심에 세우기 위해서 던지는 것이다.(p.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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